서아프리카에 부활하는 범아프리카주의

“청년들은 더 이상 부패한 ‘프랑사프리크’를 원치 않아”

2024-12-31     레미 카라욜 | 기자

과거와의 단절을 내세우며 2024년 세네갈 대선에서 승리했으나 취임식 이후 바시루 디오마예 파예의 모습은 변한 게 없었다. 푸르스름한 양복과 넥타이, 사자 대십자 훈장이 달린 녹색 어깨띠에 최고 지도자의 금목걸이까지 온갖 명예로워 보이는 것은 다 걸쳤다.

대선 1차 투표에서부터 54%가 넘는 득표율로, 세네갈 역사상 최연소(44세) 대통령에 당선된 이 신임 대통령은 각국 아프리카 지도자 및 총리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서를 했다.(1) 허풍도 배척하는 표현도 없었다.

십여 분 동안 이어진 간결한 연설에서 그는 “민주주의”, “자유”, “발전”, “주권”을 말했고 “단절”은 입에 올리지 않았으며, “혁명”에 대해서는 더더욱 언급하지 않는 등 서아프리카 지도자들의 연설과 구분되는 표현은 조금도 쓰지 않았다. 마키 살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청년들이 반정부 시위에 여러 차례 참가해 진압당한 바 있는데(국제 앰네스티에 따르면 2021년 이후 발생한 사망자의 수가 적어도 56명에 달한다), 그는 자신을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했던 청년들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투표 결과에는 체계의 변화를 바라는 깊은 열망이 담겨 있다”라고 말하며 변화의 필요성을 상기시켰다.

 

“범아프리카주의는 역사적 수수께끼”

이에 앞서 대선 승리가 확실시됐던 2024년 3월 25일, 파스테프(PASTEF, 노동, 윤리, 박애를 위한 세네갈 애국자당)의 파예 당선인은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련하여 지지자들에게 “나는 좌파 범아프리카주의를 지지한다”라는 상당히 상징적인 말을 했다. 그의 참모들은 좌파 범아프리카주의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사상이라고 주장해왔다.

한 참모는 “우리는 처음부터 이를 위해 싸웠다. 우리는 자유로운 세네갈, 자유로운 아프리카,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싸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범아프리카주의가 곁길로 가면서 많은 이들이 범아프리카주의를 한물간 구식으로 생각했으나, 파스테프의 승리가 범아프리카주의의 원대한 사상이 다시 살아나는 부흥의 “첫 단추”가 됐다고 생각했다.

역사학자 암자트 부카리야바라는 범아프리카주의가 “역사적 수수께끼”라고 말하며 “범아프리카주의가 태동한 날짜와 장소는 관련 내용 중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르고 심지어 그 정의조차 다양하다”라고 말했다.(2) 범아프리카주의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정의는 유럽인들의 인종차별적이고 식민지를 정당화하는 발언에 대항해 아프리카 민족과 그 후손들이 벌이는 정치적 해방 및 문화적 표명 운동을 말한다.

범아프리카주의를 지지하는 조지 패드모어는 1960년 범아프리카주의를 “아프리카인의, 아프리카인을 위한, 아프리카에 의한 정부를 만드는 것”(3)이라고 정의했다.

 

보이스와 가비가 문을 연 ‘범아프리카주의 2기’

사회학자 사이드 부마마가 “제1시대”(4)라고 부르는 ‘범아프리카주의 1기’는 1901년부터 1950년까지 주로 미국 대륙에서 진행됐다. 당시 범아프리카주의란 노예 후손이 백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의 역사와 정체성을 되찾는 것이었다. 범흑인주의와 연합한 범아프리카주의는 아프리카와 흑인의 문화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인종적 연대를 추구했다.
범아프리카주의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수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형성됐다. 이들 중 미국인 교육자 윌리엄 에드워드 버가트 듀 보이스(W.E.B. 듀 보이스)와 자메이카 사회운동가 마커스 가비가 큰 족적을 남겼다. 듀 보이스는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주장하며 미국 내 흑인의 평등권을 요구했다.

그는 특히 런던에서 1900년 개최된 제1회 범아프리카 회담(conférence panafricaine)에 참여했고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범아프리카 회의(congrès panafricains)를 다섯 차례 개최했다. 마커스 가비는 흑인 노예의 후손들의 아프리카 대륙 귀환(흑인 시오니즘)을 장려했다. 그는 ‘순수한 인종들’이라는 개념을 주창하며 서로 다른 인종들을 분리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흑인들의 인종적 정체성 인식에서 그치지 않고 식민 지배로부터 아프리카를 해방시키기 위한 정치적·지리적 계획을 도모함으로써 범아프리카주의를 범흑인주의와 구분 지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펼쳐진 해방운동들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사상적 도구로서 범아프리카주의를 채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시기가 ‘범아프리카주의 2기’다.

이때 새로운 인물이 여럿 부상했는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콰메 은크루마로 ‘아프리카 연방국’ 설립이 가능하다고 믿은 가나의 정치 지도자다. 그는 옛 지배국들과 소련,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 맞서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연방국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은크루마 외에도 정신과 의사이자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출신 사회운동가 프란츠 파농, 세네갈 역사가 셰이크 안타 디오프, 콩고의 독립 영웅 파트리스 루뭄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아프리카가 분열되고 신식민주의가 들어설 위험을 경계했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와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지역과의 동조를 꺼리는 대신 혁명을 꿈꾸는 세력과 연대하며 반자본주의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은크루마는 특히 식민지가 되기 전 아프리카의 전통에 뿌리박힌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이 아프리카식 사회주의를 컨시언시즘(Consciencism)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아프리카에 사람 중심의 평등한 사회 건설을 위해 필요한 여러 원칙들을 되살리자는”(5) 주의였다.

그렇지만 이를 위해 행동에 나서려 했던 사람들은 서방 세력의 개입으로 가차 없이 공격을 당하거나 제거됐다. 예를 들어 루뭄바 콩고 초대 총리는 1961년 암살됐고, 가나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1966년 은크루마 초대 대통령이 실각했다. 1963년에는 아프리카 통일 기구(OUA, 2002년 아프리카 연합으로 명칭 변경)가 설립되긴 했으나 역사학자 부카리야바라는 이 기구가 “권력을 지키려는…각국 지도자 간 연대”였다고 꼬집었다.

한편 탄자니아 정치인 줄리어스 니에레레, 기비니사우 민족해방 운동가 아밀카르 카브랄, 부르키나파소 대통령 토마 상카라 같은 다른 혁명가들은 이후 몇 세기 동안 범아프리카주의를 구체화했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상황이 달라졌고, 범아프리카주의는 속 빈 강정이 됐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모두가 그러했다.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번영을 위한 원대한 계획에 재정 후원을 하면서도 몇몇 나라의 무장 반란을 지원했다.

그리고 압둘라예 와데 세네갈 대통령은 수도인 다카르에 ‘아프리카의 르네상스’라는 기념물을 세우면서도 (북한이 시공을 맡았다—역주) 급진적 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2년 11월 튀니지에서 열린 제18회 프랑코포니(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의 모임) 정상회담에서 한 발언은 범아프리카주의를 도구로 사용하는 데 있어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행사에서 프랑스어가 “아프리카 대륙의 진정한 공용어”이며 그런 의미에서 “프랑코포니가 범아프리카주의의 언어다”라고 말했다.

 

범아프리카주의, 아프리카연합 헌장에 담겨

그렇다보니 21세기 초가 되자 그 누구도 범아프리카주의를 조심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브레턴우즈 기관(2차 세계대전 후 세계 무역을 되살리고자 각국 재무장관들이 세계통화기금과 세계은행 체제를 만드는 데 합의한 곳이 미국 브레턴우즈 시이다. 이로 인해 두 기관을 통틀어 이를 때 ‘브레턴우즈 기관’이라 표현한다—역주)인 세계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조차도 아프리카 국가 간 관세 장벽 철폐에 의문을 제기한 발언을 자신들에게 득이 되도록 이용했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연합은 국제금융기구와 서방국가들이 장려하는 (그리고 흔히 강요하는) 신자유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개발 및 통합을 목적으로 한 대표 계획인 ‘아프리카 신개발 협력 계획(Nepad,네파드)’을 출범시키며, “아프리카 대륙의 연합 조직체를 만든 위인들과 범아프리카주의를 따르는 여러 세대를 이끈 고귀한 이상”을 아프리카연합 헌장에 담았다.

나이지리아 사회 활동가 무사 창가리는 범아프리카주의가 “아프리카의 신자유주의”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네파드와 비슷한 성격의 2063 아젠다나 아프리카대륙자유무역지대(Zlecaf)가 뒤이어 만들어졌다.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이 추진해 2021년 공식 출범한 아프리카대륙자유무역지대는 아프리카 54개국에서 다루는 재화 및 서비스를 대상으로 한 아프리카 단일시장을 구축했다.

이러한 ‘우파 범아프리카주의’는 1900년 런던에서 개최된 범아프리카 회담과는 성격이 상당히 다른 범아프리카 공식 회의에서도 나타났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다섯 차례 열린 범아프리카 회의는 이후 1974년, 1994년, 2014년에 세 차례 열렸고, 제9회 회의는 2024년 10월과 11월 토고에서 개최되었다. 한편, 이 회의는 여러 국가원수에 의해 이익 수단으로 사용됨에 따라 결국 더 이상 사회운동가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러한 침체된 분위기 속에 소수의 정당과 단체, 예술가, 다양하게 분산되어 있는 몇몇 연구진 및 학자 집단들만이 범아프리카주의에 대한 열정을 유지했다. 정치학자 아지즈 살모네 팔이 그 중 하나였다.

외교관인 세네갈인 아버지와 교육자인 이집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984년 다른 사회운동가들과 함께 ‘아프리카의 자유를 위한 연구 및 계획 그룹(Grila)’을 창설했다. 그들은 40년 전부터 ‘제도상의 범아프리카주의’에 반(反)하는 ‘단절의 범아프리카주의’를 주창했고 오랜 고생 끝에 실제적인 “범아프리카주의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렇지만 팔은 새로운 세대가 자유주의만 알고 콰메 은크루마나 조지 패드모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점에 대해 우려를 드러냈다.

다카르에 있는 셰이크안타디오프 대학교의 철학과 조교수인 우마르 디아는 세네갈 역사에서 셰이크 안타 디오프와 토마 상카라 전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을 필두로 하는 범아프리카주의의 ‘영웅들’의 인기가 매일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프리카 여러 국가가 독립한 뒤 (범아프리카주의에 대해) 실망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다시 이 사상을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젊은 층 사이에서 특히 그렇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를 어떤 이들은 “새로운 시대” 또는 사회학자 부아마마처럼 “제3기”라고 불렀다. 제3기가 역사적인 범아프리카주의의 큰 줄기를 다시 잇는다고 했을 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두 가지 있다. 먼저 20세기와 달리 제3기에는 엘리트가 없다.

세네갈 경제학자 은동고 삼바 실라는 “외교와 정치뿐만 아니라 학술적 관점에서도 몇몇 흔치 않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범아프리카주의에 있어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국가원수나 정당이 범아프리카주의를 표방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고, 오히려 여러 민족, 특히 사헬 지역(사하라 사막 남쪽에서 아프리카 동쪽부터 서쪽까지 띠 모양으로 이어진 지역—역주) 사람들과 고국을 떠나 타국에 거주하는 이주민 집단에서 범아프리카주의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로, 새로운 범아프리카주의의 구성원은 보통 일관적이지 않고 혼합돼 있다. 검은 아프리카(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역주) 기초 연구소(IFAN)의 사회학자 무함마드 압둘라 리 연구원은 특히 열정적인 사회운동가들로 구성된 새로운 세대에 대한 기대가 컸다.

리 연구원은 “이 청년들은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박사과정생부터 월로프어(세네갈, 감비아, 모리타니에서 사용되는 토속어—역주)만 할 줄 아는 보부상까지 다양한 젊은이들로 구성돼 있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현상은 아프리카의 주권에 대한 갈망과 사회관계망 서비스 도래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다.

SNS 사용으로 범아프리카주의에 대한 지식이 간편하게 전달되고 공유되었으며 지식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슬로건 정도는 널리 퍼져나갔다. 또한 10여 년 전부터 여러 독립 기관이 청년들을 모아 범아프리카주의에 대한 의식화 작업을 진행했다. 예를 들면 세네갈에서 2011년 1월 창설된 ‘이제 그만(YAM)’이 그러한 역할을 했다.

기자와 래퍼들이 모여 만든 이 단체는 정전(停電)이 수없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송전 중단, 사회 혼란, 물가 상승 문제를 끝내기로 결심했다(6). 이 단체는 급진적 메시지와 함께 현실에 맞닿은 활동을 벌이며, 몇 년 전 유럽에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횡단하기 시작한 새로운 세대의 포부를 대변하는 확성기 역할을 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리고 1년 뒤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자리를 유지하려는 와데 대통령을 규탄하는 반정부 시위에서 ‘이제 그만’ 멤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봉기의 중심에 선 ‘시민의 빗자루’

같은 시기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뤼차(Lucha)’라는 단체가 세상에 나왔으며 몇 달 뒤 부르키나파소에서는 ‘시민의 빗자루’라는 단체가 떠들썩하게 설립됐다. 2013년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이 단체는 상카라주의(Sankarisme)를 표방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혁명가 상카라를 죽음으로 내몬 독재자 블레즈 콩파오레 대통령 시대에 상카라 정신이 부활한 것이다.

2014년 ‘시민의 빗자루’는 재임 27년째인 콩파오레 대통령을 타국으로 축출한 봉기의 중심에 있었다(7).

당시 이런 단체들이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미 확실한 흐름이 되었다. 이들 단체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인구 변화(UN에 따르면 2020년 아프리카 인구의 60%가 24세 이하다), 2008년 물가 급등에 따른 규탄 시위 등 경제적·사회적 상황 악화, 정당과 선거 체계에 대한 불신 등에서 초래되는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속속 생겨나고 활동하게 되었다.

정치학자 오귀스탱 로아다와 마티외 일링제는 ‘시민의 빗자루’의 성공과 관련하여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설명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세대가 갖는 고유한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젊은 세대는 폐쇄된 정치 체계에서 성인이 됐으며, 권력 집단에 속하지 않은 대부분의 청년들은 소외감을 느꼈다”라고 설명했다.(8)

메시지는 빠르게 변화했다. 2010년대 중반에는 상황이 급변하며 신식민지주의 거부가 인기를 끌었다. 부크키나파소의 시민 단체 ‘CAR’가 그 예다.(9) ‘CAR’는 ‘반국민투표(콩파오레 대통령의 5선 연임이 가능하도록 헌법 37조를 개정하는 안에 대한 찬반투표—역주) 연대(Collectif Anti Référendum)’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단체명인데, 대통령 퇴진 이후에도 그 이름은 고수했지만 ‘아프리카의 부흥을 위한 시민 단체(Citoyen Africain pour la Renaissance)’로 의미는 달라졌다. CAR를 창설한 에르베 우아타라는 2017년 범아프리카주의의 확산을 위해 투신했으며 세파프랑(프랑스의 해외 영토나 식민지였던 국가에서 사용하는 통화) 반대 운동을 그의 1순위 목표로 삼았다.

세네갈에서는 YAM의 활동이 저조해진 2017년 여러 단체가 ‘반제국주의 범아프리카 민중 혁명을 위한 전선(Frapp)’을 구축했으며 이들의 슬로건 “프랑스, 물러나라(France, dégage)”가 삽시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Frapp은 물가 상승 억제를 위해 싸우고 교육을 위한 방안을 요구했으며 아프리카 국가들과 유럽연합 간 맺은 경제동반자협정을 재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2022년 창설된 서아프리카인민기구(WAPO)와 협력하며 서아프리카 내에 있는 여러 기관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Frapp의 최우선 과제는 특히 세네갈의 “경제 주권과 국민 주권”이었다. 따라서 이 단체는 자국의 독립 이후 다카르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이 철수하고 세파프랑이 종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Frapp 창단 멤버인 술레만 기예는 Frapp의 대표인 기 마리우스 사그나가 과거 식민 지배국과 “제국주의 전반에 순응하고, 관료주의적이고, 기생충 같은 세네갈 부르주아 계급”(10)에 대한 신랄한 독설로 눈길을 끌었다며 “이것이 바로 청년들이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바로잡고 싶어 했다”라고 설명했다. 기예는 반제국주의 운동이 범아프리카주의에 온전히 속해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사회학자 무함마드 압둘라 리는 새로운 범아프리카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주장 중 하나가 “두 번째 독립” 또는 “진정한 독립”을 쟁취할 필요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청년들은 독립이라는 과업이 1960년 마무리되지 않았고, 식민주의는 결코 종식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점차 심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꼬집었다.

 

과거와 구분되는 범아프리카주의 2.0

그런데 세네갈에서는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다른 아프리카 국가처럼 식민주의가 프랑스에서 비롯됐다는 인식이 있었다. 경제학자 삼바 실라는 이 범아프리카주의 ‘2.0’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연대를 강조한 연방주의보다 데가지즘(dégagisme. 제거하다, 치우다는 뜻의 dégager에서 파생된 단어—역주)에 더 초점을 맞췄다”라는 점에서 과거의 범아프리카주의들과 구분된다며, “청년들은 더 이상 부패한 지도자를 원치 않고 특히 ‘프랑사프리카(프랑스와 아프리카의 합성어로 프랑스와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 간 신식민지 관계를 뜻함—역주)’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아프리카 단체들은 프랑스 내에서 ‘반프랑스 감정’이라고 부르는 행보로 많은 명성을 얻었는데, 이 행보를 실제로 보면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행한 정책을 거부하는 것에 가깝다. 다른 아프리카 단체들의 경우 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정책을 거부하는 싸움이 본래 목표가 아니었는데도 이 싸움에 참여했으며, 급기야 그 싸움을 1순위로 삼았다.

때때로 ‘새로운 범아프리카주의자’로 평가받는 인물들은 사회관계망 서비스뿐 아니라 정치계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어권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호불호가 크게 나뉘는 인물은 아마도 케미 세바일 것이다.

프랑스로 이민 온 베냉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스텔리오 카포 시시(케미 세바의 본명)는 2000년대 중반 흑인 우월주의자나 분리주의자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단체를 여럿 설립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가 창설한 단체 중에는 ‘트리뷔 카’가 있었는데, 인종 간 증오 조장을 이유로 자크 시라크 정부에 의해 2006년 해산됐다.

프랑스에서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던 그는 “우리가 과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프랑스인이 우리 조상에게 했던 행위의 결과다”(11)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2011년 프랑스를 떠나 세네갈로 넘어가 신식민주의를 척결하고 “범아프리카주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등 태도를 바꿨다.

2017년 그는 집회에서 5천 세파프랑(7.6유로) 지폐 한 장을 태우는 행동으로 세네갈을 넘어 국외까지 이름을 알렸다. 그 후 그는 체포돼 프랑스로 추방된 뒤 베냉으로 가 ‘긴급 범아프리카주의’라는 비정부기구를 설립했다. 그는 이 단체를 “시민의, 지정학적, 전통주의 및 주권주의” 기구라고 소개했다.

 

왜곡되는 범아프리카주의 유산

그때부터 케미 세바는 세파프랑 사용을 종결하고 프랑스군을 몰아낼 것을 촉구하는 등, 할 수 있는 행동은 다 했다(한편 지난 7월 9일, 그는 상당히 이례적인 절차에 따라 프랑스 국적을 박탈당했다). 수많은 ‘신(新)범아프리카주의자들’처럼 그도 2020년 말리, 2021년 기니, 2022년 부르키나파소, 2023년 니제르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프랑스와 관계를 끊은 대통령을 강력히 지지했고, 알라사네 우아타라 코트디부아르 대통령과 파트리스 탈롱 베냉 대통령 등 프랑스의 ‘하수인’으로 자신이 규정한 이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아프리카 대륙뿐 아니라 프랑스 본토 및 프랑스령에서도 상당히 영향력 있는 케미 세바의 SNS 팔로워 수는 각각 페이스북에서 130만 명, 인스타그램에서 30만 6천 명, X에서 26만 8천 명에 달한다.

케미 세바는 범아프리카주의자들을 관통하는 긴장과 반대를 상징한다.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그의 친러시아적 성향이나 우월주의적이고 남성 편향된 발언을 비난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는 어쨌든 범아프리카주의의 ‘가계’에 속했다. 그는 그 중에서도 ‘가비’계에 속했는데, 이는 보수적이고 인종주의적이고 심지어 파시스트적인(가비가 사용한 단어다) 자메이카의 사회운동가 마커스 가비의 이상을 따르는 그룹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세네갈 작가이자 기자인 엘 하지 술래만 가사마(흔히 ‘엘가스’라고 부른다)는 케미 세바가 “범아프리카주의의 파괴자”밖에 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그는 새로운 범아프리카주의자들이 갇힌 “계파적 유폐”와 그들의 “콩퓌지오니즘(사람들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어떤 상황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방해하는 행동 양식—역주)”을 비난했으며 범아프리카주의의 “유산이 왜곡”됐다고 밝혔다.(12)

정치학자 아지즈 살모네 팔은 특정 인물들을 언급하지 않은 채 자신이 봤을 때 역사적인 범아프리카주의가 변질될지 모른다며 우려를 드러냈다. 그는 “많은 이들이 토마 상카라 전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을 모른 채 상카라주의를 따르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기 위해 두려움과 무지를 이용하는 반동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신주권주의” 단체들로 인해 범아프리카주의가 도구화되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말리, 니제르, 기니, 부르키나파소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된 국가수반들은 무엇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빠르게 파악했다. 프랑스 제국주의를 비난하고, 주권주의를 강조하고, 따라서 범아프리카주의에 찬동하는 것이 인기를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안 것이다.

사실 민중이 결집되면 무엇보다도 그들의 권력이 오래 지속되고 국제사회의 압박에 저항할 수 있다. 처음엔 이 대통령들 중에서 자신의 혁명 사상으로 이름을 알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는 결국 적절한 타이밍에 범아프리카주의에 편승했으며, 심지어 이 사상을 남용하기까지 했다.

말리에서는 아시미 고이타 대령(쿠데타를 거쳐 국가수반이 됐다—역주)이 ‘범아프리카주의자’로 불리는 대표단을 정기적으로 영접했고(특히 기 마리우스 사그나와 케미 사바를 만났다) 연설에서 “말리의 범아프리카주의적 사명”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러는 동시에 비판은 못하게 하고 공개 토론을 막았으며, 러시아 용병기업 와그너 그룹을 고용해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주의자—역주)와 전쟁을 벌였다.

부르키나파소에서는 이브라힘 트라오레 대통령이 토마 상카라 전 대통령을 이용했다. 그가 취한 조치는 모두 적절했다. 어느 날 그는 샤를 드골 대로(大路)를 토마 상카라 대로로 도로명을 바꿨고, 이어 토마 상카라를 ‘국가 영웅’으로 격상시켰다. 그는 1987년 살해당한 혁명가 토마 상카라가 했던 것과 “동일한 싸움”을 이어나가고 싶은 척했으며, 상카라처럼 “조국 아니면 죽음,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말로 연설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 역시도 어떤 비판의 장(場)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목소리는 모두 억누르고 은폐했다. 니제르의 국가원수인 압둘라하마네 티아니 장군은 2023년 7월 권력을 탈취한 후부터 줄곧 프랑스군, 그다음으로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반제국주의를 연호했다. 그렇지만 그는 쿠데타 전 대통령 경호를 맡은 지휘관으로서 서방 군인들과 일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었다. 2024년 8월 초 니제르가 케미 세바를 특별 고문으로 임명하자 프랑스는 이를 새로운 도발로 여겼다.

위 국가원수들은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경제 개혁 몇 가지를 단행했다. 이들은 특히 광산 채굴에 관련된 법을 개정했으며 서방의 다국적기업들과 체결한 계약 일부를 재협상했다. 예를 들면 니제르는 2024년 6월 프랑스 기업 오라노(구 아레바)가 갖고 있던 우라늄 광산 채굴권을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사헬국가연방(AES), 서아프리카권에서 높은 지지 보여

부르키나파소에서는 트라오레 대통령이 식량 주권을 강조했다. 그는 부르키나파소에서 상당히 오랜만에 밀 재배를 위한 ‘농축산 공세’ 계획을 개시했다. 그렇지만 독립 후 범아프리카주의자들이 약속한 ‘바로 그날’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어떤 지도자도 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소득층의 월급 인상이나 부패 척결을 위해 일한 것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모두가 사회보수주의(전통적 가치를 통한 사회 안정을 주장하는 사고방식—역주)를 추구했다. 토마 상카라와는 달리 그들에게 여성의 권리와 환경은 아예 관심 밖이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좌파 범아프리카주의자들이 이런 권위주의 정권들을 그리 좋게 보지 않고 맞서 싸웠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순차적으로 프랑스군에 철수를 요구하고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많은 이들이 제국주의의 수단으로 여기는 서아프리카국가경제공동체(Cedeao)를 탈퇴하고 자체적으로 사헬국가연방(AES)이라는 ‘연맹’을 창설했다.

이 연맹은 안보, 농업, 에너지 분야에서 연맹 가입국끼리 서로 돕는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결국 세파프랑을 종식하고 새로운 공동 화폐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 연맹은 말리, 니제르, 기니, 부르키나파소 등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사회운동가 중 몇몇이 이들 국가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들의 많은 동료들은 군부의 용기를 추켜세우며 이들을 따라야 할 대상으로 소개했다. 피에르 사네 국제앰네스티 전 사무총장(1992~2001)은 “그들이 군복을 입었기 때문에 범아프리카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범아프리카주의에서 언급된 격변의 한계는?

역사학자 암자트 부카리야바라가 현대의 범아프리카주의를 이념적 ‘잡탕찌개’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 이 이념에 대해 갈피를 잡기란 쉽지 않다. 질문은 끝없이 쏟아진다. 누가 범아프리카주의자고 누가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이 범아프리카주의에 대해서 말하며 언급하는 ‘격변’의 한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러한 격변이 프랑스의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할까?

신임 세네갈 대통령이 속한 파르테프당이 범아프리카주의의 여러 소명에 다른 이들을 참여하게 할 수 있을지, 사헬국가연방(AES) 소속 국가들이 서아프리카에서 힘의 균형을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여기 질문이 하나 더 있다. 때로는 정치적 측면에서 기만적 메시아니즘에 가까워 보이는 범아프리카주의 ‘2.0’이 파시즘의 형태로 변하거나, 사회학자 부아마마가 말한 “식민주의 이전 아프리카의 우상화”로 인해 그 정체성이 달라지지는 않을까?(“식민주의 이전 아프리카의 우상화”란 조상들의 아프리카를 평등한 낙원으로 소개하는 미성숙한 시각을 뜻한다)

이것이 범아프리카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점들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람은 “아프리카는 다른 나라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범아프리카주의의 정체성 문제를 주의 깊게 다루고 도처에서 ‘서방 세력’이라고 부르는 과거 식민 지배국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현재의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필수불가결한 단계다. 프랑스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은 스스로 물러날 의향이 없기 때문에 이 단계는 급진적이고 더 나아가 폭력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범아프리카주의가 국경과 출신을 넘어 사람들 간 연대를 약속하는 국제주의라는 사실을 놓친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글·레미 카라욜 Rémi Carayol
기자

번역·김은혜


(1) 2024년 5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Francis Laloupo의 글 「Résilience du modèle sénégalais ‘세네갈의 프럼프’라 불리는 송코의 집권」 참조.
(2) Amzat Boukari-Yabara, 『Africa Unite! Une histoire du panafricanisme 아프리카가 연합하다! 범아프리카의 역사』, La Découverte, Paris, 2014.
(3) Georges Padmore, 『Panafricanisme ou communisme? 범아프리카주의인가 공산주의인가?』, Présence africaine, Paris, 1960.
(4) Saïd Bouamama, 『Pour un panafricanisme révolutionnaire. Pistes pour une espérance politique continentale 혁명적인 범아프리카주의를 위해. 대륙의 정치적 희망을 위한 길』, Syllepse, Paris, 2023.
(5) Kwame Nkrumah, 『Le Consciencisme, Présence africaine 컨시언시즘, 아프리카의 존재』, 2009(1re éd. : Payot, Paris, 1964).
(6) 2015년 4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Jacques Denis의 글 「“Taper sur un monde creux pour le faire résonner” 텅 빈 세상을 때려 소리가 울리게 하는 것」 참조.
(7) 2015년 4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David Commeillas의 글 「Coup de Balai citoyen au Burkina Faso 부르키나파소에 있는 시민의 빗자루」 참조.
(8) Mathieu Hilgers et Augustin Loada, 「Tensions et protestations dans un régime semi-autoritaire : croissance des révoltes populaires et maintien du pouvoir au Burkina Faso 준독재정권에서의 긴장과 항거: 부르키나파소의 민중 봉기 증가 및 권력 유지」, <Politique africaine>, vol. 3, n° 131, Paris, 2013.
(9) 2018년 1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Au Burkina Faso, deux conceptions de la révolution 부르키나파소에 있는 혁명의 두 가지 견해」 참조.
(10) 2021년 5월 7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블로그 프랑스어판 Florian Bobin의 글 「Au Sénégal, sortir du bourbier néocolonial 세네갈에서 신식민지주의라는 구덩이에서 나오는 것이란」 Mots d’Afrique 참조.
(11) Kemi Seba, 『Supra-négritude 흑인의 특성을 넘어서』, tome 1, Fiat Lux, Marseille, 2018 (1re éd. : 2013).
(12) Elgas, 『Les Bons Ressentiments. Essai sur le malaise post-colonial 좋은 원한. 식민지 시대 이후의 불안에 대한 에세이』, Riveneuve, Paris,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