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가치를 다시 묻는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개인적 성취의 수단일까, 아니면 단순히 생계를 위한 의무일까? 기술 발전과 노동 환경의 변화 속에서 노동의 본질과 그 가치를 재고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콰이강의 다리>가 보여주는 노동의 얼굴
영국군 병사들은 기력이 다해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때 포로수용소장인 일본인 대령이 다리 재건작업을 명령했다. 일본군 증원이 필요했고, 연합군의 반격도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태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더 정확히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명작 <콰이강의 다리>(1957)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영국군 포로수용소의 최고 책임자인 니콜슨 대령은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병들고 다친 병사들까지 동원하면서도 이 영국군 대령은 이 구원의 노동이 부하들에게 존엄성을 되찾아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니콜슨 대령은 영국군의 자존심과 능력을 보여주는 기회로 삼고, 다리 건설에 있어 높은 기준과 군사적 규율을 고수했다.
실제로 영국군 병사들은 이 공사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했다. 그러나 미군 특수부대의 다리 파괴 계획을 알게 된 영국군 니콜슨 대령은 다리를 지키기 위해 일본군 포로수용소장인 사이토 대령에게 이를 알리게 된다. 이처럼 노동의 주관적 의미는 때로 그 객관적 의미와 충돌한다.
청년 세대에게 워라밸이란?
의미에 대한 이런 고민은 오늘날 다른 형태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젊은이들은 곳곳에서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 일명 ‘워라밸’)”, “의미 있는 일”, “실질적인 성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때로는 “성공을 좇지 않고, 현재의 품격을 지키며, 삶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고 누리려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한다.(1)
인사 부서는 이에 분주히 대응하고 있다. ‘인재’ 유치를 위해 코칭과 친목을 내세우며 ‘밤새 즐기는 파티’와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근무’까지 약속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정말 이렇게 살고 싶어할까? 그들이 찾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전 세대들은 정말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의 도식적이고 추상적인 접근이 주를 이뤘던 것은 사실이다. 이제 심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일의 의미는 우리가 쓸모 있다고 느낄 때, 직업윤리를 지킬 때,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질 때, 기술과 경험을 쌓아갈 때, 그럴 때 생긴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2)
물론, 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일의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계약직이나 공무원 신분으로 일하는 임금노동이 지배적이며, 결국 종속과 복종이 따른다. 우리 일의 목적이 다른 곳에서, 어쨌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때로는 우리의 신념과 반대로 결정될 때, 일의 의미를 고민하는 것이 과연 어떤 가치가 있을까? 많은 이들은 이성적 사고를 통해 일의 주관적 의미와 객관적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꼭 필요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니콜슨 대령이 겪었던 갈등이나, ‘영광의 30년’(1945년에서 1975년까지 30년간 프랑스의 경제적인 호황기—역주)동안 서구 경제의 노동자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일의 주관적 의미와 객관적 의미 사이의 충돌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때 테일러주의(작업을 최소 단위로 분해하고 표준화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와 포드주의(조립라인을 통해 작업을 표준화하고 생산성을 높인 대량생산 시스템)가 효율성의 극대화라는 측면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사무실에서는 조각조각 나뉜 반복적인 일이, 작업장에서는 고된 노동이 이어졌다.
창의적인 노동에서 일의 의미 커져
클레르 에체렐리의 『엘리즈 또는 진정한 삶』(1967)은 알제리 전쟁이 한창일 때 파리 쇼와지 문의 시트로엥 공장에 만연했던 폭력과 인종차별을 이야기한다. 지치고 좌절스러운 일이었지만, 전후 재건 시기에 사람들은 오히려 일을 할 수 있어 안도했고 소비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고 노동조합이 정기적인 임금 인상을 쟁취할 때는, 지속적인 노동 강도 증가와 완전한 종속도 받아들일 만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든 자율성을 박탈당한 노동자들이 과연 행복한 소비자와 시민이 될 수 있을까? 같은 시기에 일관성을 지키고 존엄성을 찾기 위해,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적 정체성을 되찾고자 했다.
실제로 노동자들은 단순히 위에서 내린 지시를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더 잘할 수 있는 의견을 제안하고 실천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과 혁신을 적용해 조직을 변화시켰고, 이를 통해 단순히 명령에만 따르는 것이 아닌 노동자의 창의성, 경험, 개인적 혹은 집단적 지식에서 비롯되는 기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공장에서 피어난 저항의 기술
노동자들은 공식적인 작업 시스템 내에서 자체적인 생존 전략을 개발했다. 기술적인 노하우 뿐만 아니라, 작업 효율을 높이면서도 개인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실용적인 요령까지 후배들에게 전수했다. 이러한 지식 전수는 단순한 기술 전달을 넘어, 노동자들 간의 연대의식과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1978년 로베르 리나르의 회고는 노동자들의 적응 전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파리 쇼와지 문의 시트로엥 공장에서 일하던 유고슬라비아 출신 특수직 노동자들의 사례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높은 숙련도와 효율적인 작업 방식을 통해 세 명이 할 일을 두 명이 처리함으로써, 나머지 시간을 개인적 휴식과 소통의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엄격한 산업화 체제 속에서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능동적으로 대응했음을 보여준다.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작업의 효율성을 유지하면서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적 관계를 발전시키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처럼 ‘재조직된’ 노동은 엔지니어들과 다른 이들의 노동을 통제하려는 그들의 오만함에 도전장을 던졌다. 노동자들을 말단으로 여기는 이들에 대한 반항이었다. 말단들은 더 빠르게 더 잘 일했고, 때로는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나는 수년을 회사에 바쳤는데, 보세요,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라고 후회하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장들의 폐쇄는 노동자들에게 잔인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효율성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려온 시스템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러한 시도들은 오히려 노동자의 존엄성이 무시된 채 만들어진 왜곡된 조직을 더 오래 연명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결국 공장 폐쇄의 진정한 비극은 그 순간의 고통이 아니라,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던 비인간적 시스템을 지속시켜 왔다는 데 있다.
규정 준수 파업—지시받은 것만을 엄격히 따르는 행동—이 이를 증명한다. 생산성은 필연적으로 하락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으나, 그 시도가 오히려 자신들을 혹사시키는 조직을 강화하는 역설적 상황에 지쳐갔다.
1968년 5월 혁명은 예견된 폭발이었다. 소비사회가 주는 위안으로도 자본에 종속된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기엔 한참 모자랐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으려는 ‘예술가적 비판’(3)으로 시작된 청년들의 저항은 3주간의 공장 점거 총파업으로 번져나가 모두의 투쟁이 되었다. 이는 더 이상 생계를 위해 삶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노동자의 주관성을 부정한 경영진의 전략들
합의를 추구하던 경영진은 전략을 바꾸었다. 1970년대 말부터 이후 수십 년간, 그들은 문화와 윤리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회사를 위해’ 싸우고, 각자가 ‘기업에서 성장’하고 ‘편안한 영역을 벗어나’ 자신과 상사 모두에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도록 하면서 일자리를 지켜나갔다.
경영진은 개인의 내면, 즉 상부가 구상한 도전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이나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하며, 지속적으로 역량을 갱신하고 회복탄력성을 극대화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새로운 의미를 강요했다. 인사부서와 수많은 컨설턴트들은 자율성과 대담함을 강조하면서, 절차와 프로토콜, 프로세스, 체계화, 명세서, 보고, 벤치마킹, 모범사례 등을 더욱 강력하게 도입했다.
창고 통로와 개방형 사무실, 계산대와 교환실에서 새로운 형태의 행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더 이상 소비나 끝없는 성장이 주는 행복이 아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자기도취적 만족감이었다. 이로써 ‘이달의 직원’, 성과급, 보너스, 도전 과제가 넘쳐나는 시대가 열렸다. 일터에 감정이 스며들며 자아 중심적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4) 그러나 이러한 경영학적 재구성은 실제 현실과 노동자의 주관적 경험 모두를 부정하기에, 결국 공허한 시도에 불과했다.
2020~2021년 봉쇄조치라는 단절의 순간이 이러한 진실을 드러냈지만, 이번에는 총파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모든 직업군에서 깊은 불안감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터져 나왔다. 민간은 물론 이제는 같은 압박에 시달리게 된 공공 부문에서도 직장 내 괴롭힘이 속출했다. 프랑스 사회는 때때로 중죄법원의 자극적인 사건들에 열광하듯, 이번에는 프랑스 텔레콤 경영진들의 재판을 뜨거운 관심으로 지켜보았다.(5)
2022년, 직원들의 비극적인 자살 사건 이후 파리 항소법원은 조직적, 정신적 괴롭힘에 대한 그들의 유죄를 확정했다. 젊은 세대는 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지루하거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인턴십 경험, <오피스>와 같은 드라마 시리즈, 스테판 브리제 감독의 영화 <또 다른 세상>(2021),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저서 『쓸모없는 일자리』(2018)는 이들에게 노동 세계에 대한 어둡고 비극적인 시각을 심어줄 수밖에 없었다.(6) 하지만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였던 피에르 부르디외가 상기시켰듯이, “‘젊음’이란 단지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이 말 역시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때로는 불확실하다.
카미유 퓨니는 30세 미만 유럽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직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측면들에 대해 응답이 고령층의 응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했다.
실제로 “이들 중 80%가 업무를 통해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약 60%는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비율은 30~59세 연령대에서 관찰되는 수치와 매우 유사하다.”(7)
한편, 청년층 내에서도 노동에 대한 태도는 특히 사회적 기반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퓨니는 “실업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을 때 노동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것이 더 용이할 것”이라고 관찰했다.
자영업과 프리랜서, 청년층의 새로운 도전과 리스크
많은 젊은이는 무엇보다 임금노동의 구속과 그에 따른 지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들은 경제활동인구의 약 90%를 차지하는 임금노동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개인적인 자구책의 일환으로 이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 이는 독립, 프리랜서, 자영업의 선택이거나, 혹은 더 제약적인 형태인 우버화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얻게 되는 표면적인 자율성은 결국 사회적 보호망을 잃는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그럼에도 최근의 법적 변화들은 자영업자 지위 신설부터 실업수당을 사업 자본금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하는 등, 이러한 흐름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다른 한편의 젊은이들은 임금노동에 만족하며, 주된 불만을 경영의 ‘현대성’에 제기한다. 경쟁 구도의 형성과 노동관계의 개인화, 그리고 과도한 자기극복에 대한 감정적 자극을 줄이기 위해서는 전문성에 기반한 서열과 부하 직원에 대한 지원, 그리고 보다 집단적이고 합리적인 관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들은 요구받은 업무의 질을 위해 필요한 안정된 조건 속에서 성장하고 역량을 키우고자 한다. 이들은 종속관계에 만족하며, 노동의 목적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반면 다른 이들은 처음부터 노동의 의미를 문제 삼는다. 이들은 사회연대경제(ESS)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연구원 에밀리 베라는 명문대 졸업생들에게 ESS가 우수성과 자아실현을 결합한 새로운 차별화 경로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26세 환경보호단체 임원 가브리엘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 모두는 일을 통해 유용성과 의미를 찾고 있는데, 기후변화는 자신의 존재에 목적을 부여하기에 매우 실용적이다.”(8)
그러나 흔히 청년들은 ESS에서도 현대적 경영이 부과하는 동일한 고용조건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협회 부문의 생존을 돕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자원봉사자들이 업무 강도를 높이고 압박을 가하는 것은 좋은 대의를 위해서라는 것이다!(9)
사회연대경제, 젊은 세대가 찾는 의미 있는 일터
약간 다른 관점에서, 저널리스트 마린 밀러가 “엘리트의 반란”이라 부르는 현상이 있다.(10) 최고 학교 출신들이 생태학이나 사회적 관점에서 노동의 의미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들은 직원들에게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는데 기여하도록 강요하는 명망 있는 기업에서 부모처럼 경력을 쌓지 않을 것이다. 대신 퍼머컬처 농부나 유기농 빵집 주인처럼 힘들지만, 지구에 유용한 수공업을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보며 때론 미소 짓다가도, 이들을 포함한 모두를 보며 자주 안타까움을 느낀다. 노동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개인적으로 학대를 피하려 하는 비정치적 선택을 바라보며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이 다양한 청년층은 더 이상 쉽게 속지 않으면서 모색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주관적 의미에 대한 끈질긴 주장에서, 노동의 또 다른 객관적 의미를 그려내고 있지 않을까?
마치 이 둘이 항상 더 이상 충돌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말이다.
글·다니엘 리나르 Danièle Linhart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명예 연구원, 노동 사회학자.
번역·성지훈
(1) Corinne Morel Darleux, 『우아하게 표류하기보다 아름답게 침몰하는 편이 낫다: 붕괴에 관한 성찰』, Libertalia, 2019.
(2) Thomas Coutrot, Coralie Perez, 「노동의 의미: 공중보건의 주요 쟁점」, 『노동에 관한 우리의 이해』, <르몽드>˙Sciences Po, 파리, 2023.
(3) Luc Boltanski, Ève Chiapello,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 Gallimard, 파리, 1999(초판), 2011.
(4) Aurélie Jeantet, 『일터의 감정들』, CNRS Éditions, 파리, 2018.
(5) 「나를 스승이라 부르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미간행 기사, 2019년 9월.
(6) Pierre Bourdieu, 『사회학적 질문들』, Minuit, 1984(초판), 2002.
(7) Camille Peugny, 「젊은이들은 다른 노동자들과 다른가?」, 『노동에 관한 우리의 이해』, 상게서.
(8) Émilie Veyrat, 「부합성 추구에 관한 합의: 노동의 갈등화 없는 불안 대응」, 「노동의 ‘의미’: 활동의 심리적˙사회적˙정치적 쟁점」 학술대회 발표문, 파리, 2024년 10월 3일.
(9) Simon Cottin-Marx, 『선한 의도를 위해서입니다! 시민단체 노동의 환멸』, Éditions de l'Atelier, 이브리쉬르센, 2021.
(10) Marine Miller, 『반란: 생태 위기에 직면한 젊은 엘리트들에 관한 조사』, Seuil, 파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