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유보트, 또는 현대성의 멜랑콜리

2024-12-31     이츠하크 골드버그 | 예술사학자, 비평가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의 현대성은 독특하고도 이질적이다. 그의 시선은 파리 거리의 풍경과 현대인의 삶을 담은 장면들에서 저항할 수 없이 강하게 끌린다.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유럽 다리의 금속 구조물, 오스만 남작에 의해 새롭게 그려진 넓은 대로, 그리고 1876년에서 1882년 사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파리의 ‘부촌’ 같은 대담한 도시 풍경을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카유보트는 나폴레옹 3세의 고위관료였던 오스만 남작이 추진한 ‘빛의 도시’ 파리 재개발 프로젝트에 매료되었을까? 그의 작품에 담긴 감정과 도시 풍경의 세밀한 묘사를 보면, 이런 의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현대 도시의 고독, 카유보트의 비 오는 날

그러나 실제로 19세기 후반 현대성을 상징하는 도시의 활기는 카유보트의 작품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1877년에 그려진 대작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212 x 276cm)을 보자.

이 작품은 파리의 투랭 거리와 모스크바 거리가 만나는 넓은 교차로를 그려내고 있다. 회색빛 조명이 젖은 돌길에 반사되고, 실물 크기의 커플이 관객을 향해 결연히 걸어오는 모습은 관객을 자연스레 한 걸음 물러서게 할 만큼 강렬하다. 주변에는 몇몇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마치 자동인형처럼 어색하게 걸어 다닌다. 이 넓고 과장된 공간은 마치 광각 렌즈로만 포착할 수 있을 듯한 구도로 심리적 공허함과 허무함을 불러일으킨다.

시선은 화면 여기저기를 떠돌지만, 정작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한다. 이 이미지가 주는 낯섦은 인물들의 무의미한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어색한 조화와 기하학적으로 정돈된 구성이 만들어내는 긴장에서 비롯된다. 카유보트가 그려낸 도시는 활발한 소통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 모르는 이방인들이 떠도는 텅 빈 장소다.

그의 작품에 담긴 세밀한 디테일은 때로는 추상적인 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건축적 구조와 원근법, 인물과 세부 묘사를 위한 밑그림은 마치 자로 잰 듯 정교하게 계획되어 있어 즉흥적인 창작의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다. 카유보트의 도시 풍경은 철저히 계산된 구성과 냉정한 시선으로 완성된 결과물이다.

 

카유보트가 그린 현대 도시의 낯설음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그린 도시는 인상파 화가들이 주로 그린 활기찬 파리와는 달리,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15세기 ‘이상적인 도시(Ideal city)’에 더 가까운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 속 공간은 엄격하고 질서 정연하며, 거의 비어 있다. 이는 오귀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같은 화가들의 시선과는 분명히 다르다. 

카유보트의 이미지는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고, 사람들은 그 무대 장식 속 작은 점처럼 자리 잡는다. 고요함과 정지된 시간, 움직임을 잃은 인물들은 공연이 막 시작되기 직전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의 작품 속 공연은 끝내 시작되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시각적 인상을 충실히 재현하는 데 있지 않다. 카유보트의 이미지는 인상파의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흐르는 시간이나 순간적인 대기, 일시적인 감각, 사람들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모든 표현의 근간이 되는 인위적 구조를 강조한다. 거리 풍경의 낯섦, 드문 등장인물, 거리감 효과는 관객에게 마치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파리의 소음과 활기를 차단하며, 그의 진정한 관심사가 단순히 도시의 외형에 있지 않음을 암시한다.

카유보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연출 방식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구도의 요소들이 독립적인 주인공처럼 기능하며, 구조적으로 종종 낯설고 비일상적인 느낌을 준다. 강렬한 원근법, 통일성을 거부하는 화폭 구성, 가까움과 멀어짐 사이의 긴장, 혼란스러운 시점은 모두 그의 작품이 가진 현대성을 형성한다. 이처럼 카유보트는 단순히 시대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대의 감각을 새롭게 구성하고 제시한다.

 

카유보트의 작품에서 바라본다는 것의 의미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단순히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와 무엇이 보이는 조건을 만드는가에 대해 질문한다. 그의 작품 제목만 봐도 이러한 접근 방식을 알 수 있다. 동시대 화가들이 주로 ‘카푸신 대로’, ‘몽마르트르 대로’, 몽토르괴유 거리’ 또는 ‘클리시 광장’처럼 장소를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제목을 사용했던 반면, 카유보트는 ‘6층에서 내려다본 알레비 거리’, ‘위에서 본 대로’, ‘발코니 위 남자’, ‘발코니에서’처럼 독특한 시점을 강조하는 제목을 사용한다.

카유보트의 작품에는 시선의 존재가 체계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인물들은 지나가는 행인,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창문이나 발코니에 서서 도시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이들은 모두 도시 풍경을 바라보는 데 몰두하고 있다. 그는 관객에게 편안하고 수동적인 시각적 경험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림을 단순히 관찰하며 즐기는 태도를 거부하며, 화가와 관객 모두가 시각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기존의 수동적인 감상 습관에서 벗어나, 작품과 시각적 경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도록 유도된다.

카유보트는 작품 속에서 화가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이 서로 교차하도록 설계하여, 우리가 가진 시각적 경험에 혼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감각적 질문을 던진다.

 

시선 위의 시선

1876년에 제작된 ‘창가의 젊은 남자’는 카유보트가 이런 구성을 시도한 초기 작품 중 하나다. 작품 속 남자는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약간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거의 텅 빈 거리를 관찰하고 있다. 실내에 자리한 그는 돌난간에 의해 바깥의 공허함으로부터 보호받는 듯하다. 카유보트의 다른 작품에서 자주 느껴지는 현기증 같은 감각은 이 작품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관객은 여전히 묘한 낯섦을 느낀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 화가들이 즐겨 다뤘던 ‘열린 창문’이라는 주제를 변형하여 전경과 배경 사이에 독특한 ‘충돌’ 효과를 만들어낸다.

카유보트는 전경과 배경이 부딪히는 듯한 구성을 사용했다. 전경은 극도로 확대된 반면, 화면 하단은 비정상적으로 축소되어 있다. 예를 들어, 거리 가장자리에 묘사된 여성은 지나치게 작게 표현되어 있으며, 이런 과도한 축소와 왜곡은 거리감과 공간감을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이처럼 공간의 비례가 왜곡되고 거리감이 불균형하게 처리된 결과, 작품은 관객에게 비현실적이고 낯선 공간의 느낌을 준다. 이런 독특한 구성은 카유보트의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접근 방식을 잘 보여준다.

 

현대 도시와 새로운 남성성, 카유보트의 시선

인상파 화가들이 그린 도시 풍경은 넓게 열린 대로를 통해 관객을 도시에 초대하고, 충돌 없이 조화롭고 통일된 공간으로 도시를 묘사한다. 그들의 작품은 도시를 갈등 없는 이상적인 세계로 그려내며, 진보에 대한 강한 믿음과 긍정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현대 도시를 낙관적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현대적 삶의 장면을 차분하고 조화롭게 담아낸 현대성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진보가 큰 갈등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품은 세대였다.

하지만 카유보트는 마네와 드가처럼 현대 도시의 또 다른 면을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작품은 도시 공간에서 드러나는 충돌과 이질성을 포착하며, 통일된 도시 질서를 그리기보다는 그 비정상성과 현기증을 드러낸다. 이러한 표현은 도시의 비인간화와 대도시의 현대적 문제들을 암시하며, 그의 멜랑콜리한 시선은 오스만 시대 파리를 이미 향수와 비판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이츠하크 골드버그 Itzhak Goldberg
예술사학자, 비평가, 또는 작가

번역·아르망

 

 

남성을 그리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은 2024년 10월 8일부터 2025년 1월 19일까지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남성상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시 기획자들은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남성성의 승리와 공화국적 형제애가 지배적이던 시대이자, 동시에 전통적 남성성이 처음으로 위기를 맞이했던 시기에, 이 이미지들은 사회적 질서뿐 아니라 성적 질서에도 도전하며 새롭고 강렬한 질문을 던진다.”

전시와 함께 발간된 도록(오르세 미술관/아잔 공동 발행)은 카유보트가 묘사한 새로운 남성성의 이상을 강조한다. 이 남성성은 강인하면서도 취약하고, 정복적이면서도 우울하며, 공공 공간을 장악하면서도 실내에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다만, 이러한 설명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형식적이어서 문법적으로도 매끄럽지 않고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에블린 피예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틀이 이번 전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글·에블린 피예에 Évelyne Pieiller
작가, 저널리스트, 비평가

번역·아르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