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희의 문화톡톡] 공인의 입장 표명의 방식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다. 날카로워진 신경만큼 타인들의 행동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공개되는 사람들의 모든 일상에 기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입장을 어떻게 취하는가가 정체성으로 치환된다. 사상 검증과 비슷한 과정이다. ‘타인’의 일상을 털어 먼지를 찾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 없는 문제에서 ‘타인’의 입장을 무조건으로 요청하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알량한 도덕적 우월감? 혹은 비겁한 태도에 대한 비난?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방식이든 누군가의 의사를 선택하는 과정에 자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분명 지금의 사태는 위험하다.
침묵의 나선, 소리없는 아우성
2024년 대한민국은 계엄령과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 중이다. 늘 평화 속에서 살았기에 평온한 일상을 인지하지 못하던 국민들에게 갑작스러운 계엄령은 언제든 나라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감각을 경험케 했다. 무력감과 두려움 속에서 국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는 여의도로 향했고, 누군가는 향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입장을 목놓아 외쳤고, 누군가는 침묵했다. 방식의 차이다. 물론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여의도로 향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의견을 개진한 셈이다. 다만 누군가의 외침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을 뿐이다.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이 다수의 의견과 동일할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만, 소수일 경우에 침묵하는 현상을 침묵의 나선이라고 부른다. 독일의 정치학자인 노엘레 노이만의 이론이다. 여론의 형성 과정은 한 방향으로 쏠리는 모습이 나선 모양처럼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침묵이 누군가에게는 비겁과 동의어로 쓰일 수 있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의견을 내고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은 비판 거리일 뿐, ‘비난’의 대상이자 ‘나락’을 보내려는 의도와 동일할 수 없으며, 동일해서도 안 된다.
말하지 못하는 입
연예인의 경우 정치적 발언에 있어서 민감할 수밖에 없다. 몇 번의 정치적인 이슈에 입장을 표명했던 연예인들은 화이트 리스트, 블랙 리스트에 각각 이름을 올렸다. 언급만 했을 뿐이지만 언론과 대중은 색으로 그들을 나누었다. 정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치적으로 선호하는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미래는 바뀐다. 얼마나 큰 업적을 세웠는가, 얼마나 대단한 아티스트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00당과 연관된 인물로 존재하게 된다. 여전히 몇몇 연예인의 꼬리표가 과거의 정치적 발언이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들에게 정치적 발언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입이 있지만 발언은 할 수 없는 입이다.
대중의 사랑은 편향적이다. 아무리 좋아하던 연예인일지라도 정치적인 문제가 있다면 대중은 금세 거리감을 둔다. 대중의 사랑을 받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연예인은 없다. 따라서 연예인의 팬들 또한 자신의 연예인이 정치적 발언에 소극적이기를 요구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얽혀서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예인들은 정치에서 점차 멀어진다. 어떤 정권에서든, 어떤 문제에서든 그들은 최대한 침묵을 통해 자신들의 자리를 유지한다.
리스트 업과 뭐요의 사이
지금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계엄령과 탄핵에 대해서 언급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임영웅과 이승환은 연예인의 정치적 발언에 대한 쟁점을 명확히 드러나는 사례다. 그들은 정치적 사안에 관여하는 정반대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적극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침묵을 지키는 것도 결국 그들의 의견의 표현 방식이라는 점이다. 동시에 그들의 의견은 다를 뿐, 잘못이 없었다는 점도.
이승환의 경우,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이슈에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 인물이다. 소신을 지니고 자신이 생각하는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했다. 물론 그로 인해 부정적인 반응도 많았다. 미움받을 용기를 지닌 행보다. 그는 의연하게 자신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수긍하고, 여전히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데 적극적이다. 계엄령과 탄핵 상황에서도 이승환은 탄핵집회에서 공연을 하며 적극적으로 현상황에 참여한다.
임영웅의 경우는 다르다. 발언을 자제하는 모습이다. 최근의 계엄령과 탄핵의 과정에서도 그는 침묵을 지키고 일상을 업로드한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을 통해 누군가 복잡한 시국에도 본인의 반려견 사진을 올린 점을 다이렉트 메시지로 지적한다. 물론 임영웅이 대답은 문제의 여지가 분명 있다. ‘뭐요’라고 답하며 정치인이 아니기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덧붙인 것은 비윤리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국에 대해 말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을 일부러 개인적인 메시지를 통해 대답을 강제적으로 요구한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동시에 개인적인 메시지를 마음대로 폭로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임영웅의 주소비층이 이전의 계엄령을 겪은 나이대 분들이라며 무신경하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임영웅이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주된 팬층들을 위한 어떤 말들을 적었어야 했던 걸까.
문제의식과 진짜 문제
물론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자유다.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계엄령이라는 위태로운 사회 상황에서 개인의 강아지 기념일을 업로드하는 모습은 경솔해 보일 수도 있다는 메시지였다면 충분히 서로의 의견의 차이를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문제의식을 지녔을 수도 있다. 물론 가정이지만. 정치적인 민감성을 지니지 않았던 점은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는 지점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몰라서 하는 것과, 알면서 행하는 차이는 분명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개인 대 개인의 메시지가 범죄의 수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론화 과정을 통해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과정이다. 과연 우리는 단편적인 메시지 캡처를 통해서 임영웅이라는 사람의 정치 인식과 현실을 인식하는 모든 과정을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이렇게 과한 비난을 받아야 마땅할까. 사실 가장 궁금한 건, 임영웅의 대답이 왜 그렇게 중요한 걸까. 그의 의견을 통해 무엇인가 바뀌는 게 있었을까. 그는 국민의 어떤 부분도 대표하지 않는 그저, 한 명의 국민이다.
공인과 국민의 발언
더 나은 사회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누구나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침묵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상 검증의 방식은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 폭력적으로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더 좋은 사회가 되는 전제가 될 수는 없다.
문제적인 발언이지만, 사실 국민의 의견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명해야 했던 국회의원들의 발언에 더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계엄령에 어떤 생각을 지녔고, 탄핵 과정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고민했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이다. 그들이야말로 국민의 대표 기관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대표해서 발의하는 자들의 발언을 주목하고 그들에게 의견을 개진해야 하는 것이 옳다. 그들이 침묵한다면 말을 하라고 촉구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국민을 통해서 선출되며, 국민을 위하여 의견을 개진하며 복무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기에.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다. 연예인은 우리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의견은 그저 국민의 의견일 뿐이다. 너무 많은 해석과 주석을 붙이며 그들의 발언을 과대해석하기에 그들은 오히려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침묵은 소수에 속해서가 아니라, 다수에 속하더라도 아예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그들의 의견이 듣고 싶다면 무차별적인 공격을 멈춰야 한다. 그저 개인의 의견으로만 들어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만 그들의 의견이 나선 어디쯤 위치하는지 말할 수 있다.
글·한유희
문화평론가. 제 15회<쿨투라> 웹툰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21년 만화평론 공모전 우수상 수상.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며, 경희대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으로 웹툰과 팬덤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