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무역주의, 세계화의 일탈에 제동 건다
특집 '보호무역주의'의 새로운 가치Ⅱ
각국 사회·정치·제도·이념·전략적 변수 따라 선택 다양
자유무역이 옹호하는 지배 계급 이익, 보호무역이 해체
1930년, 1,028명의 경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미국 의회에 상정한 '스무트 하울리 보호무역주의법'을 반대했음에도 이 법률안은 통과되었다.
위기 때마다 보호무역주의, 통화주의, 국유화, 평가절하, 혁명과 같이 여러 개의 '해답'이 모색될 수 있다. 그 중 어떤 해답이 채택될 것인지 예측하려면 '블랙박스'를 구성하는 5개 요소 간의 상호작용을 검토해 봐야 한다. 이 '블랙박스'의 5요소는 첫째, 지배적인 사회세력의 경제적 입지 및 자신의 의지를 표명할 수 있는 중간 구조(노동조합, 경영자 조직)의 힘의 정도. 둘째, 다양한 집단 및 단체와 연대를 맺을 수 있는 정당의 능력 정도. 셋째, 기업의 활동에 개입하려는 국가의 성향과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수단의 여부. 넷째, 국가적 전통(자유주의). 마지막으로, 국제관계에서 해당국가가 점유하고 있는 입지다.
위기 돌파 5개 변수의 '블랙박스'
노동조합의 힘, 집권층의 정치적 성향, 국가적 생존과 직결되는 물품(밀, 철강, 전자제품)의 수급을 국제무역에 의존하려는 성향과 같이 다양한 요인에 따라 위기에 대한 대응 방식은 상이하게 나타난다. 앞서 열거한 5개 변수(사회, 정치, 제도, 이념, 전략)를 갖고서는 개략적인 예측만을 할 수 있다. 피터 구레비치의 정치경제학 저서 <힘든 시기의 정치>는 더욱 이를 명확하게 조명한다.1)
그는 1873년~1980년 시기에 걸쳐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스웨덴의 경제위기에 대한 상이한 대응방식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는 각국마다 정부의 대응책에 있어서 5개의 변수의 역할을 평가하였다. 1930년대 대공황이 미국에서는 뉴딜을, 그리고 동시에 독일에서는 나치즘을 잉태하게 된 이유는 이 두 나라의 '블랙박스'에 장착된 5개 퓨즈의 배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또한 1980년대에도 동일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제2차 석유파동은 미국에서는 보수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을, 그리고 6개월 뒤 프랑스에서는 사회주의자 미테랑의 집권을 용이하게 하였다.
1873년 경제위기의 교훈
구레비치의 세밀한 연구가 진행된 1873년~1896년 사이 유럽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경제위기는 보호무역주의의 문제를 다시 성찰하게 한다. 실제로 보호무역주의를 중심으로 당시 광대한 사회적·정치적 연대가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해당 국가의 대응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73년, 물가가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디플레이션의 기나긴 악순환을 야기하였다. 현재처럼 위기의 동력은 비교우위론2)을 신봉하며 대외개방 정책을 끊임없이 추구하던 국가의 경제에서 유발되었다. 19세기 말, 아무도 보호무역주의를 디플레이션의 원인으로 보지 않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호무역주의는 반대로 위기의 효력을 감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1873년 위기의 원인은 농업·산업분야에서 일어난 세계적 규모의 과잉생산 때문이었다. 이 과잉생산은 기술 발전(자동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 경쟁적인 투자(이 과정에서 고위험 저수익의 대상에 이르기까지 투자의 손길이 뻗쳤다), 그리고 운송혁명이 초래한 것이었다. 농기계의 보급과 새로운 종자의 밀이 북미, 아르헨티나, 우크라이나의 대평원에서 재배되어 저렴한 가격으로 화물선과 철도를 통해 운송되면서 프랑스나 프러시아에 사는 농부들은 자신의 '비교우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판로를 찾지 못하여 야기된 위기는 산업 영역에까지 미쳤다. 철강 수요의 붐을 일으킨 철도망 건설은 완숙기에 접어들었다. 철강 수요는 계속 증가하였지만 그 증가율은 떨어졌다. 구레비치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요약했다.
"가격은 폭락하고 실업률은 치솟았으며 생산은 증가하고 수익성은 악화되었다. 일부 기업의 몸짓은 어마어마하게 불어났으며 다른 수많은 기업들은 사라져갔다. 수백만 명이 유럽을 떠났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산업 경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이들 국가들은 무엇을 하였을까? 우선 자유무역주의를 선택하여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생산 요소를 할당하도록, 즉 인력·공장·기계 설비를 수요가 존재하는 새로운 분야로 이동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다. 곡류를 생산하는 농부가 전문적인 축산업자로 변하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고 있어서 정치세력간 힘의 관계의 변화를 야기한다.
농업인구의 감소와 노동인구의 증가는 쥘르 멜린이 옹호하는 '기회주의적' 공화국과3) 빌헬름 1세의 독일 제국을 위협하였다. 경제적 현대화는 공권력에 의해 늦춰질 수도 있다. 영국의 산업화 이후, 다른 나라들의 지배계급은 아무런 예방 조치도 없이 개척자의 길을 걷는 위험을 감수하였다.4)
영국 유일하게 자유무역 공세
마르크스가 자유무역을 옹호하였다고 비칠 수 있는 측면은 이러한 역사적 문맥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다. (관련기사 하단)
마르크스는 자유무역에서 어떤 '혁명적 의미'를 도출하였다. 즉, 대외개방이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적 사회적 질서를 허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 질서는 소유권에 집착하고 노동자 봉기를 짓누를 예비군으로 동원될 수 있는 미신에 사로잡힌 농민 대중에 기대고 있는 구질서이며,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와 파리코뮌의 예에서 증명된다.
구레비치가 연구한 모든 국가들은 1879년 이후 영국을 제외하고 모두 보호무역주의 조치를 취하였다. 이 국가들은 값싼 수입품으로부터 자국의 생산자를 보호했으며 구조조정의 폭력을 제동하고 사회적 대혼란의 충격으로부터 기존의 정치질서를 보존하였다.
영국의 선택은 우리가 어떤 변수를 취하더라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우선 경제적 변수를 들자면, 영국의 제철과 섬유산업은 당시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런던 금융가는 수출산업을 지원하고 해외투자를 확대해 나갔다. 또한 해운업과 보험업도 영국 경제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농업은 완숙의 단계에 들어섰으며 어떤 나라도 영국처럼 인구 대비 노동자의 비율이 높지 않았다.
영국 노동자들은 자유무역으로 자신들의 일자리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자유무역이 식료품 지출을 낮출 수 있다고 기대했다.
■ 각국의 보호무역제도 독일 |
심지어 다른 나라들이 영국 상품에 대한 관세를 붙이더라도 영국은 자유무역에 대한 재고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에 대해 일부 영국인들은 '제국적 선호'를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자유주의 무역 이념의 사회적 토대가 될 수 있는 토지 귀족세력은 이미 이전 40년간의 농산물 수입에 의해 약화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들 대다수가 광산업, 제조업, 상업에 투자하면서 이들의 입장은 모호해졌다.
"이들의 자녀들이 신분상승기의 산업 부르주아지 자녀와 결혼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두 집단 간의 경계가 더욱 흐려졌다고"고 구레비치는 주목하면서 "이들의 투자 및 결혼 전략이 수출지향적인 첨단 산업의 이익과 현대화 과정속의 농업의 이익 간에 이미 존재하였던 유착을 더욱 공고화하였다."고 정의했다.
독일·미국, 보호무역으로 산업보호
독일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경우였다. 제국 체제, 프러시아, 군대의 버팀목 역할을 맡고 있었던 대지주 계급인 융커는 원칙적으로는 전문화·기계화되어 고수익을 창출하는 농업으로 발전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시에는 대륙 세력인 독일이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다른 한편, 당시 독일의 내수 시장은 만족할 만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 농민들은 건장하고 건전하며 질서정연했다. 이들은 급진적 사상에도 둔감했으며 땅에 대한 애착을 갖고 민족주의적 부름에 즉각 부응하는 훌륭한 병사가 되어주었다. 또한 덴마크식 농법(소단위 고급 농작물 생산)은 광대한 곡물 평야와 자유소작제에 기초한 기존의 사회조직을 해체할 수도 있었다. 융커는 변화에 대항해서 싸웠으며 보호무역주의는 그들의 도구였다.
20년간 독일제국의 수상으로 재임했던 모토 폰 비스마르크도 융커였으며 그는 이러한 정책을 옹호할 수 있는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은 과거 그다지 상호 협조적이지 않았던 귀족계급과 상층 부르주아지간의 보수주의 동맹을 구축하는 접착제가 되어 주었다. 당시 융커계급은 자유무역이 공산품에만 적용되기를 원했다(당시 수입 농기구가 더욱 저렴했다). 반대로 산업 부르주아 계급은 저렴한 농산물의 수입을 원했다(이는 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결국 각자가 희생을 분담하여야 했다. 비스마르크는 타협안을 도출했다. 독일사회에서 자유무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더 이상 정치에 기대할 것이 없어져 버렸다.
미국에서는 공산품만이 관세 대상이었다. 소농들은 대외경쟁으로부터 보호받는 시장에서 공산품을 비싼 값에 구입해야하는 한편, 자유경쟁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자신의 농산품을 팔아야 했다. 이들은 따라서 정치적으로 패배자인 셈이었다. 원래 이들의 경제적 지위는 견고했었다. 그러나 이들을 대표하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후보는 18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적·지역적 기반을 넓히는데 실패하였다. 그의 포퓰리즘, 반지성주의 그리고 종교적 근본주의로 인해 산업 생산자, 도시민, 그리고 가톨릭계 이주민들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노동자들은 이 대중 연설가를 기업가와 은행가들에 맞서기 위한 동맹자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생계 기반이 되는 업종에 대한 하나의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비보호무역, 자본주의 부정 아니다
구레비치는 "어떤 선진국에서도 농민, 노동자, 소비자를 모두 규합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며 "미국의 경우에는 인종적·지리적·종교적 분리로 인해 더욱 어렵다"고 설명했다. 영국의 자유무역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산업 부르주아 계층은 양대 정당을 통제하고 있었다.
보호무역주의 옵션이 세계화에 제동을 걸지라도 이것이 자본주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수 위주의 생산자와 수출 위주의 생산자를 대립시키는 보호무역주의 옵션은 계급 관계를 횡단하며 자본의 권력이나 기업 내의 권력 관계를 문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가 오면 이것은 지배계급을 분리시키고 상반된 이해관계의 대결을 부추긴다. 이 대립의 결말은 종종 노동세력의 결속된 힘에 의존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이 서로 대립하여야 하는 상황이 와야 한다. 그러나 위기의 시대에는 거의 항상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자유무역, 누구를 위한 자유? 칼 마르크스 * 영국에서 곡물법이 철폐된 것은 자유무역이 19세기에 거둔 가장 큰 승리이다. 제조업자들이 자유무역을 논하는 국가들을 보면 모두 곡물 및 원료의 자유무역을 대체로 염두에 두고 있다. 외국 곡물에 보호관세를 부과하는 건 비열한 짓이다. 그것은 민중들의 굶주림을 이용한 투기이다. "민중은 존 보우링, 존 브라이트와 그 일당처럼 헌신적인 사람들을 자신의 가장 큰 적이자, 가장 파렴치한 위선자로 여기고 있다. * 1848년 1월 7일 브뤼셀 민주주의 협회에서 행한 연설 발췌. 퀘벡대학교 사회과학도서관 출간. 번역 | 최서연 |
* 2008년 이후 이나시오 라모네를 이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음. 미국 전문가로서 <새로운 감시자>(1997), <여론, 그것이 움직인다>(2000) 등의 저서가 있다.
1) Peter Gourevitch, Politics in Hard Times :Com-parative Responses to International Economic Crises,Cornell UniversityPress,Ithaca,NY,1986.
2) 이 이론에 따르면, 각국은 뛰어난 분야에 전문화되고 외국에서 자국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생산하는 생산품을 수입하게 되면 모든 국가의 부가 증대한다는 것이다.
3) 1892년 해외 농산물로부터 프랑스 농업을 보호하기 위한 '멜린 관세'를 발의한 프랑스 온건 우파 국회의원으로 1896년에서 1898년까지 수상을 역임했다.
4) Barrington Moore Jr. : Social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 :Lordand Peasant in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Beacon Press, Boston,1966.참조.
5) 영국 노동당은 20세기 초부터 영국 정치에서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