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에서 밀려나는 아르메니아어

2012-11-12     아지즈 오구즈

아르메니아 대학살(1915∼16)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터키에는 6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고 있다.이들 중 이스탄불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공동체 학교 16곳에 통학하는 학생 수는 3천 명 남짓이다. 터키어의 패권에 밀려 아르메니아어는 소외되고, 이들의 문화와 언어를 지키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마리 날즈는 무표정하지만 경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교장실 문은 열어두세요." 25년째 타르만차스 학교를 운영하는 날즈 교장은 어둡고 단정한 옷차림에 '철의 여인' 같은 풍모를 지녔다. 그는 "왜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시나요?"라고 물었다. 원래 터키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신중하지만 특히 학교 문제에 관해서는 더욱 조심스러워했다. 아르메니아 학교연합 대표 가로 파일란이 "흐란트 딘크의 피살사건 이후 교내 보안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었다"고 미리 경고해준 대로였다.

2007년 터키 민족주의자에 의해 아르메니아계 언론인이 피살된 이후 불안감이 고조됐다. 경계심이 커지자 날즈 교장도 교내 곳곳에 감시카메라와 방범창을 설치하고, 교문에는 경비원을 배치했다. 경비원 아틸라 셴은 상냥하고 개방적인 사람이지만 일할 때만큼은 교도관처럼 엄격해 보였다. 그는 미리 약속하지 않으면 학교에 출입할 수 없다고 했다. "문제가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몇몇 주민들이 기분 나쁘게 학교를 쳐다보며 지나가곤 한다. 다행히 그들도 우리를 만나보면 바로 편견을 버린다."

타르만차스 학교는 이스탄불의 두 해협을 잇는 보스포루스 대교에서 가까운 오르타쾨이에 있다. 오르타쾨이는 옛 오스만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에서 번화했던 동네 중 한 곳으로 유대인과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이 어울려 살았다. 여전히 모스크가 2개, 교회는 4개, 유대교 교회도 2개 남아 있다. 현재 아르메니아인은 소수만 남았고 쿠르드족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미니버스가 운행하는 덕분에 150명의 학생이 다른 동네에서 이곳까지 통학한다.

두 개의 장벽, 터키 정부와 과거

터키에는 아르메니아 학교가 총 16개 있는데, 그중 5개 고등학교의 학생 수가 3천 명 정도 된다. 터키에 사는 아르메니아인 6만 명 중 거의 대부분이 이스탄불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 학교도 모두 이곳에 몰려 있다. 아르메니아 학교의 입학 조건은 부모 가운데 한 명이 아르메니아 출신이면 된다. 학교의 역사는 오스만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만제국 때 모든 민족공동체는 각각의 교육제도를 조직할 책임을 지고 수천 개의 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현재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1915∼16년 자행된 아르메니아 대학살(당시 희생된 아르메니아인은 100만∼150만 명으로, 당시 오스만제국 내 아르메니아인의 약 3분의 2에 달한다)과 강제이주로 아이 수가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1923년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수립된 터키공화국은 절충적 체제를 선호하며 공동체 학교들의 존재를 문제 삼지 않았다. 정부는 학교를 공립화하지 않는 대신 감시·감독을 위해 교육부가 임명한 터키인 부교장을 각 학교에 배정했다. 국가에서 급여를 받는 교사는 터키 문화(언어·역사·지리)를 가르치고, 재단을 통해 학교에서 급여를 받는 교사는 아르메니아어로 다른 과목들을 가르친다.

반(反)기독교적 정책이 세워진 것은 터키가 키프로스를 침공한 1974년부터다. 파일란은 "예전에는 로잔조약(1923년 터키와 유럽 강대국 간에 체결됐다)에 의해 미약한 수준이지만 정부가 학교에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1974년 이후부터 지원이 끊겼다. 정부는 우리를 믿지 않는다"고 애석해했다. 이제 학교는 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자산을 보유한 재단이라도 정기적 지출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면 학교는 공동체 기부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름만 사립학교지 학부모들은 학교에 매월 혹은 매년 학비를 내지 않는다. 부모들이 학교에 내는 돈은 가정 소득에 따른 기부금이 전부다.

공동체 학교는 고유의 언어와 문화 보존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하지만 '터키 정부'와 '세월'이라는 두 가지 큰 장벽에 직면해 있다. 공동체 학교 외에 아르메니아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다. 어떤 대학에도 아르메니아 언어와 문화라는 과목은 물론 해당 교수도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교육부의 허가 절차를 거쳐 학교 재단이 임용한 교사들은 다양한 이력을 가졌다. 모든 아르메니아인은 가정에서 모국어를 배운 뒤 이를 독학으로 터득해야만 한다.

마리 칼라야즈도 우연한 기회에 교사가 되었다. 경영학을 전공한 칼라야즈는 졸업 뒤 전공과 관련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다른 일을 찾아보라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교사가 되었다. 그녀는 7년째 아르메니아어를 가르치고 있다. 2년 전부터 오르타쾨이 학교에서 근무하는 칼라야즈는 아르메니아어 선생이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모국어를 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처음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할 때 공부를 무척 많이 했다. 지금도 계속 배워가는 중이다."

학생들도 열심히 배우고 있다. 칼라야즈는 "아르메니아어는 어려운 언어다. 몇몇 학생은 어려워하지 않지만, 많은 학생들이 어려움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오르타쾨이 학생들은 학교에서도 주로 터키어로 대화한다. 교장은 "터키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어보다 터키어를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단순히 아르메니아어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터키의 교육체계가 아르메니아어 학습을 어렵게 한다. 아르메니아 학교를 다녔던 무라트 고졸루는 "고등학교에서 아르메니아어 수업을 듣는 친구가 드물었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실제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입학시험은 모두 터키어로 이뤄진다.

따라서 많은 부모들이 공동체 학교에 자녀를 보내지 않는다. 이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도 끝까지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대부분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 졸업 뒤 전학을 간다. "아르메니아 학교, 특히 고등학교는 그리 유명하지 않다. 때론 '스페어 타이어'에 비유되기도 한다. 부모들은 자녀를 프랑스나 미국, 독일 학교에 입학시키고 싶어 한다." 이렇게 말하는 노라 밀다놀루도 어릴 때 아르메니아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이스탄불의 명문학교 중 한 곳인 로버트 미국 학교로 전학을 갔다.

"우리만의 대중문화가 없잖아요"

이제 소수민족에 대한 터키 내 분위기가 개방적으로 변해 이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훨씬 수월해졌다. 칼라야즈는 "지금은 내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밝히는 것이 두렵지 않다. 어릴 때는 절대 엄마를 '마마'라 부르지 않고 '안네'(터키어)라고 불러 아무도 우리가 기독교인지 모르게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언어와 문화가 터키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어 아르메니아인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파일란은 "사람들이 집에서조차 아르메니아어로 말하지 않는다. 아르메니아 대중문화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녀에게 아르메니아 문화의 기초만 가르치는 것으로 일상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경고했다.

아르메니아 주요 정기간행물 <아고스>의 공동 창립자인 사르키스 세로피안은 "터키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중 모국어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고스> 기사 대부분이 터키어로 작성된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라고 말했다. 총 24쪽 중 단 4쪽만 아르메니아어 기사다. 세로피안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신문을 구독하지 않을 것"이라고 냉정히 덧붙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단순히 학교라는 수단으로 아르메니아어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힘들어진 듯하다. 2012년 봄에 이뤄진 대대적인 교육개혁으로 공립학교에서 아르메니아어 수업이 금지됐다. 또다시 현 체계에 순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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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아지즈 오구즈 Aziz Oguz 프랑수아라블레(투르)대학에서 저널리즘 전공.

번역 배영미 petite0222@hotmail.com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