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견고한 제약을 무너뜨리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적 도전

2025-01-06     김희경(영화평론가)

세상엔 헐겁고 느슨해 보이는 제약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제약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때론 알면서도 외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무엇보다 불가항력적이며 견고한 장벽으로 작동한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제약의 헐거움과 견고함을 함께 보여주는 인물이다. 시아마 감독의 작품에선 대체로 큰 갈등이 일어나거나 커다란 충돌이 일어나진 않는다. 그러나 제약 안에 갇혀 버린 존재, 그 존재의 생동하는 본질을 보여줌으로써 그 이중성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그 제약 가운데 시아마 감독이 천착하는 것은 타고난 신체 구조로 인해 성별이 나눠지는 데 따른 제약이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이분법적으로 남과 여로 구분되어 살아가게 되고, 이후 사회적으로도 성별에 따라 규범 지어진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는 얼핏 헐겁고 느슨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 견고하고 높은 장벽으로 작용하게 된다.

시아마 감독의 영화는 여성의 육체를 통해 그 제약을 드러낸다. 그의 영화 <톰보이> (2020),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두 영화는 각각 아이들, 성인 여성의 시선과 생각으로 몸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제약을 드러냄과 동시에 뛰어넘는다.

 

양분하는 움직임, 연결하는 움직임

<톰보이>의 오프닝은 이런 제약의 특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카메라는 짧은 머리를 한 아이(조 허란)의 뒷모습과 바람을 느끼는 손을 클로즈업한다. 그리고 아이의 얼굴을 비춘다. 달리는 차 위에 앉아 빛과 바람을 온전히 느끼려는 아이는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아이를 아래서 붙잡고 있던 아버지는 “안 무서워?”라며 두려움에 대해 질문한다. 아이는 “네”라며 짧고 명쾌하게 대답하고,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운전을 함께해본다. 자유와 평온함에 불쑥 들어온 두려움에 대한 질문은 영화에서 앞으로 이 열 살짜리 아이가 지속해서 받게 될 질문이 된다.

영화는 제약의 헐거움을 단숨에 견고함으로 바꾼다. 짧은 머리를 보고 당연히 이 아이가 남자아이일 것이라 여겼던 관객의 편견은 어머니의 첫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수면 위로 올라온다. 아이를 보고 “우리 딸 왔구나” 하는 어머니의 대사 한마디로 영화는 아이에게 주어진 제약의 실체를 끌어올린다.

아이의 이름은 ‘미카엘’이자 동시에 ‘로레’이다. 미카엘은 아이가 스스로 명명한 것이며, 로레는 부모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즉 아이는 남성이고 싶어 하지만, 아이에게 주어진 신체 조건은 여성이라는 의미다. 타고난 신체 구조로 인해 주어진 성별과 원하는 성별이 다른 아이의 운명. 이는 결국 다른 사람들에겐 무의미한, 그러나 아이에겐 오랜 시간 자신을 가두고 짓누르는 제약이 된다.

로레는 새로 만난 친구 리사(진 디슨)에게 자신을 미카엘로 소개한다. 그리고 미카엘로서 동네 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어울리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스포츠는 신체적 조건을 기준으로 아이들을 양분시킨다. 축구를 할 수 있는 남자아이들과 축구에서 제외된 여자아이 리사이다. 로레는 자신의 신체적 조건이 제약이 되는 것에 대해 처음엔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곧 남자아이들이 웃통을 벗고 축구를 하는 모습을 닮고 싶어 하며, 이를 거울 앞에서 흉내 낸다. 그리고 다음엔 용기를 내어 축구를 한다. 축구를 꽤 잘하는 로레는 그 신체적 조건이 실질적인 제약이 아닌 그저 편견이 만든 허울뿐임을 보여준다.

시아마 감독은 영화에서 축구, 춤 등을 통해 움직임을 적극 활용한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극명하게 구분하는 축구는 신체적 차이를 인지하게 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반면 로레와 리사가 함께 추는 춤은 성별을 넘어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감정을 표출하고 연결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두 아이는 춤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고 펄떡이는 생명의 본질을 보여준다.

영화는 로레의 본질을 숲이라는 자연을 통해서도 강렬하게 표출시킨다. 오프닝에서 로레가 빛과 바람을 느끼고 있을 때, 카메라는 푸르른 나무를 함께 비춘다. 그리고 영화 전반에 숲이라는 공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이 안에서 나타나는 로레의 본질 그 자체를 비춘다.

 

제약을 뛰어넘는 강인한 미소

시아마 감독이 <톰보이>를 통해 어린아이에게 주어진 신체적 제약을 드러냈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선 두 성인 여성을 통해 사회적 제도와 관습을 뛰어넘은 뜨거운 감정과 갈망의 진폭을 파노라마처럼 담아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세기 말 어느 작은 섬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다. 여성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원치 않는 결혼을 위해 먼 곳으로 보내질 귀족 여인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이 섬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마리안느는 엘로이즈 몰래 그를 지켜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의 대상을 포착하는 순간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희열과 치열한 고민으로 침전되어 있던 감정의 선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마리안느의 시선은 지극히 남성적 시각에 해당한다. 마리안느가 몰래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그리는 그림은 엘로이즈를 결혼이라는 목적만을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그림을 보고 엘로이즈를 최종적으로 아내로 받아들일 남성의 시각으로 온전히 시작되고 완성된다.

이 그림은 결국 마리안느 스스로에 의해 폐기된다. 엘로이즈는 자신과 초상화가 닮지 않았다며 그림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마리안느는 그 말을 듣고 그림을 자발적으로 폐기한다. 해당 그림은 엘로이즈 어머니의 초상화가 그랬듯 지극히 남성에게 거부되지 않기 위한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림은 마리안느의 일방적인 시선이 아닌 두 여인의 시선 교환으로 탄생한다. 마리안느는 자신이 엘로이즈를 전부 간파했다는 듯이 엘로이즈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얘기한다. 그러나 영화는 마리안느를 엘로이즈의 자리에 서게 하는 장면으로 이전의 일방적 시선 자체를 단숨에 전복시킨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자신의 위치에 오게 한 후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라고 말하며 그림이 두 여인의 감정과 시선이 뒤섞여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여인들 사이엔 하나의 긴장감이 지속해서 맴돈다. 상대의 죽음에 대한 공포다. 영화 속 이 죽음에 대한 불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여성들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시선을 표상하는 것이다. 엘로이즈의 언니는 자살로 추정되는데, 그 자살의 원인은 엘로이즈처럼 얼굴도 모르는 남성과 무작정 결혼해야 하는 관습에 의한 것이다. 수녀원에서 지내던 엘로이즈는 언니의 죽음으로 그 운명을 대신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드러내더라도, 죽음 자체로 끝맺지는 않는다. 각 인물의 강인함은 타인의 시선을 뛰어넘는다. 서로 사랑하는 상대를 발견하고, 감정을 직시하는 법을 배워가며 스스로를 지켜 간다.

<톰보이>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선 카메라가 클로징에 이르러 공통적으로 주인공의 미소를 비추는 것을 알 수 있다. 환한 미소가 아닌, 옅은 미소가 깔리는 정도이다. <톰보이>에선 로레가 알듯 말듯 한 표정으로 옅은 미소를 짓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선 엘로이즈가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끝내 옅은 미소를 띤다.

이 미소엔 시아마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담겨 있다. <톰보이>에서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신체적, 제도적 제약은 끝내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다. 각 인물이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거나 이들의 삶이 극적으로 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미소를 통해 이들의 내면에선 생각과 시선의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견고한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강인함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시아마 감독의 영화는 이전과는 달라진 이들의 새로운 한 걸음이 더 큰 의미를 가질 것을 암시한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글·김희경
인제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상물등급위원회 자체등급분류 사후관리위원,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사무총장, 은평문화재단 이사, 영화평론가, 만화평론가로 활동. 前 한국경제신문 기자, 前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경영 겸임교수, 前 한국영화학회 대외협력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