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외교의 내막
라데크 시코르스키가 벌써 5년째 바르샤바의 외교를 지휘하고 있다. 그는 외교정책을 카친스키 형제의 신보수주의적 범대서양주의에서 중도파 총리인 도날드 투스크의 전투적 유럽주의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180도 확 바뀐 이런 전환이, 그가 자랑하는 것처럼 과연 '성공 스토리'가 될 수 있을까.
농담 하나 때문에 바르샤바 시민들이 웃고 있다. "라데크 시코르스키(폴란드 외교부 장관)와 하느님 사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대답은 "하느님은 자신을 시코르스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이다. 사실 외교부 장관은 매우 오만하다. 지난 3월 29일 하원 연설에서 그는 망설이지 않고 "오늘의 폴란드는 그 어느 때보다 대단하다"고 선언했다. 유럽연합(EU)의 직무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면서 그는 "적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리스본조약이 발효된 이래, 폴란드가 리더십을 가장 멋지게 발휘한 것이 자랑스럽다"라는 말을 덧붙였다.(1)
시코르스키는 자신의 야망을 감추지 않는다. 그의 한 측근은 "시코르스키가 폴란드공화국 대통령이 될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유럽위원회 의장이 될 것으로, 최악의 경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사무총장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50대가 다 된 이 남자는 자신의 경력을 저돌적으로 쌓아왔다. 시코르스키는 19살에 영국으로 망명을 가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고,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옆에서 처음으로 기자 경력을 쌓았다. 그 후 보수적 재단 '아메리칸 엔터프라이즈 인스티튜트'(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에서 일하고, 오스트레일리아 미디어계 거물 루퍼트 머독의 자문가로 일했다. 폴란드로 돌아온 그는 2005년 레흐 카친스키와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형제가 이끄는 우파 정부의 국방부 장관이 되고, 이후 2007년 중도파인 도날트 투스크 정부에 합류해 외교부 장관이 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용어는 바로 '성공 스토리'다. 그는 폴란드가 유럽 무대와 국제 무대에서 격이 높아진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지만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이 표현은 사실상 현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아직도 생생한 전쟁 수용소의 고통
외교부의 중요 보직인 '비전 정책 국장'을 40살이 안 되는 젊은 사람이 맡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똑똑한 야쿠브 비스니에프스키가 영어로- 그는 프랑스어에도 능통하다- 자신이 만드는 데 기여한 외교정책을 '연속성과 현실성'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해 설명한다. 폴란드 동쪽의 이웃 국가들을 유럽 통합에 끌어들이려는 의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럽 통합에 호의적으로 참여하고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연속성과 현실성'을 설명한다. 그러면 미국과 맺은 특수한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는 "우리가 '유럽에 존재하는 미국의 트로이 목마'라는 평가는 잘못됐다. 우리의 안전이 미국과 맺은 관계의 질에 의존한다면, 우리의 경제적·문화적·문명적 미래는 미국 정부의 부속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EU의 심장부에 있는 지리적 위치에 달려 있다"고 대답한다. 유로존 내에서도 그런 역할을 할 것인가? "그렇다. 나라(폴란드)의 경제가 준비되는 대로 그렇게 할 것이다."
야쿠브 비스니에프스키의 구상에 혁명적 발상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폴란드의 고통스런 역사를 잊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폴란드 출신인 바르샤바의 프랑스문화센터 원장 필리프 뤼쟁은 감정을 섞어가며 말한다. "중부 유럽에서 강력했던 폴란드가 러시아와 독일의 분할 점령에 의해 123년 동안(1795∼1918) 사라져버렸다. 다시 나라가 세워졌지만 1939년 프랑스와 영국이 배신하며 히틀러가 침공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600만 명이 사망했다. 1944년 8∼9월 발생한 바르샤바 봉기도 잊을 수 없다. 소련군이 비스툴강의 건너편 연안에 도착했으면서도 독일군이 폴란드를 짓밟게 내버려둠으로써 20만 명이 사망했다."(2) '봉기박물관'에 보관된 사진은 1945년 4월 비행기로 촬영된 수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파괴된 모습은 핵폭탄이 터진 뒤의 히로시마 모습과 비슷하다.
'국가적 편집증'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이 용어에 대해 브로츠와프대학 철학교수 아담 흐미엘레프스키는 전혀 놀라지 않는다. "우리가 이웃 국가에 수백 년 동안 박해받은 공동체라는 느낌은 여러 세대를 걸쳐 내재화됐기 때문에, 우리 정신의 중요 인자로 남아 있다. 우리는 메시아적이고 로맨틱한 민족주의를 바라는 경향이 있으며, 또 한편 내면에는 이웃 국가에 개방되고 느긋한 사회를 만들고 싶은 열망도 있는데, 두 성향이 부닥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 상태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까? 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소장인 조르주 민크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 폴란드 사람들은 그들과 닮았다. 영웅적이며 희생자적 기질이 똑같다. 카틴 대학살(3)을 논외로 쳐도, 폴란드의 모든 가정은 나치 수용소와 옛 소련 수용소에서 죽은 가족들로 인해 슬퍼한다. 이런 외상증후군은 정부 대표자들의 머릿속에 끈질기게 남아 있다.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은 전임자인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대통령이 잊으려고 했던 그 드라마 같은 사건을 생생히 부활시켰다."
사건은 리스본조약 예비정상회담이 열린 2007년 6월 21일 전개된다. 유럽장관위원회에서 베를린이 인구에 근거해 바르샤바보다 두 배의 영향력을 갖는다는 사실에 거부반응을 드러내면서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총리는 자신의 쌍둥이 동생인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1939∼45년의 학살이 없었다면 폴란드 인구는 현재 6600만 명이 됐을 것이다"(4)라는 말을 내던졌다. 현재 폴란드 인구는 3300만 명이다. 이런 돌출 발언은 쌍둥이 형제의 독일 혐오증을 잘 드러내준다. 러시아 혐오증도 당연히 갖고 있다. 두 국가에 대한 혐오증은 독일과 러시아의 공동 통치를 통해 폴란드를 다시 종속시키려 한다는 강박관념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났다. '우리 꿈의 폴란드'란 기사에서 야로스와프 카친스키는 계속 물고 늘어진다. "앙겔라 메르켈은 독일을 제국주의 열강으로 재건하려는 독일 정치 책임자들의 현 세대를 대표한다. 모스크바와 맺은 전략적 축이 그 한 요소로서 폴란드는 그것을 저지할 능력이 없다. 결과적으로 폴란드는 종속될 수밖에 없다."(5) 바로 여기에서 도를 넘는 범대서양주의가 생겨났다. 연방주의적 유럽이 당연히 경제적 도약을 보장해주겠지만 폴란드의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폴란드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열쇠를 당연히 워싱턴에서 찾아야 한다.
'법과 정의당'(Pis)이 2005년 9월 입법선거에서 승리해, 정당의 지도자인 레흐 카친스키를 대통령직에 올려놓았다. 쌍둥이 형 야로스와프 카친스키는 곧바로 총리 직무를 맡았다. 전 바르샤바 주재 프랑스 문정관인 장 이브 포텔이 요약해 표현한 '모든 우파를 연합한 가톨릭을 믿는 민족적 벙커'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2007년 10월의 입법선거에서 '시민 플랫폼'(PO)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총리가 된 투스크와 공동정부를 꾸리게 된다. 그는 2010년 4월 10일 카친 대학살 70주년을 기리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 스몰렌스크로 가다가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한다. 2010년 7월 공화국 대통령 후보가 된 쌍둥이 형 야로스와프 카친스키는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에게 패한다.
카친스키 시대가 지나가자, 과연 시코르스키는 더 현실적인 정책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때의 정책으로 되돌아가야 했을까? 일간지 <가제타 비보르차>의 국제판 팀장 로만 이미엘스키는 정직하게 말한다. "선출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폴란드의 '부시 추종자들'과 정반대 입장을 취했다. 특히 미국 대통령은 부시 추종자들이 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철석같이 믿고 있던 미사일방어체계를 포기해버렸다. 게다가 2009년 9월 17일, 독일군이 폴란드에 침입한 지 16일 뒤 폴란드에 입성한 소련군을 축하하는 70주년 기념식이 폴란드에서 벌어졌다." 범대서양주의자들이 홀연히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다. "워싱턴은 멀고 베를린은 지척에 있다는 지리적 요인이 다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넣어서는 안 된다
폴란드의 유명한 싱크탱크 '스테판 바토리 재단'을 이끌고 있는 알렉산데르 스몰라르는 "미국의 무관심 때문에 시코르스키가 유럽으로 쏜살같이 도망간 것"이라고 설명한다. 독일에 '제4제국'이 생길 것을 두려워한 이전 정부에서 고위 관료를 지낸 시코르스키 장관이 2011년 11월 28일 '역사상 최초의 폴란드 외교부 장관'으로 독일 하원에 참석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강한 독일보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독일이 더 두렵다. 독일은 유럽에서 꼭 필요한 국가가 되었다. 독일은 유럽을 지휘해야 한다.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지휘해야 한다."
외교 수장이 연방주의를 강조할지라도 "그가 주권이양을 다시 받아들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면 안 된다. 그는 단지 통합이 좀더 추진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유럽전략센터(Demos Europa) 소장 파베우 스비보다는 말한다. 그는 폴란드 하원에서 자신이 한 말을 옹호했다. "우리는 이상주의자도 순진한 유럽 찬양주의자도 아니다. 현재의 유럽 상황에서 우리는 국가 이익을 위해 싸워야만 한다." 특히 EU에서 인구상으로 6번째 국가이고 국민총생산에서 7번째 국가를 차지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스비보다는 "베를린과 바르샤바가 프랑스를 제쳐놓은 것이기 때문에, 독일·프랑스의 행동과 바르샤바의 행동을 통합해 표현한 '바이마르 삼각형'이란 외교 용어는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2012∼2016년 외교정책의 우선 사항'이라는 명칭이 붙은 공식 서류에는 독일이 '폴란드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격상돼 있고, 그다음은 프랑스가 언급되고 있다. 프랑스 외교부와 바르샤바 주재 대사관의 외교관들이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프랑스가 폴란드의 관심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폴란드 외교관들도 그 사실을 확인해준다. 한 외교관은 "독일과 우리는 열정보다 이성을 가진 노련한 커플이 될 것이다. 그런데 독일과 맺은 관계가 프랑스의 질투를 자아냈다"고 고백한다.
레흐 바웬사의 야당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시치' 출신의 주요 인물인 콘스탄틴 게베르트가 다음을 상기시킨다.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면서 '침묵할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우리를 가혹하게 비난한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의 후임자 니콜라 사르코지는 유로 위기를 독단적으로 관리하면서 자신이 주장하는 범대서양주의만큼 본인에게 가치가 있던 공감이라는 자산을 다 탕진해버렸다. 독일 총리 메르켈은 적어도 폴란드 총리에게 정보를 알려줬다." 에고(Ego)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돈의 역사다. 독일은 폴란드의 주요 고객으로, 폴란드 수출의 26%를 차지하여 6.8%를 차지하는 2위의 프랑스보다 월등하게 많은 수입을 한다. 또한 독일은 공급자로서도 1위를 기록해 폴란드 수입의 21.7%를 차지하고, 5위인 프랑스는 4.3%를 차지한다.
미국에 실망하고, 독일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프랑스와는 냉랭한 관계를 맺고 있는 폴란드가 과연 동부 국가들과 성공적인 파트너십을 맺었는가? 폴란드가 동부 국가들에 대해 리더십을 진정 갖고 있었다면, 폴란드는 EU에서 자신의 위치를 당당히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폴란드를 존중해줬을 것이다. '동양연구센터' 소장 올라프 오시카는 다음과 같이 솔직히 말한다. "우리는 동쪽으로 민주주의를 확대하려는 야망을 달성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벨라루스·몰다비아 중 어느 나라도 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소수 폴란드인의 문제가 관계를 맺는 데 방해되고 있다.(6) 모스크바는 우리의 노력을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폴란드는 자신의 행동반경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 그대로 러시아와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프랑스가 마그레브 국가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 유사하게, 되도록 안정적이고 순조로운 이웃 관계를 맺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는 유감스러워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동부 국가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의 외교자문관이던 로만 쿠즈니아르는 우리에게 장엄한 브리스톨호텔 정면에 위치한 게슬러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1989∼90년 이 영향력 있는 전문가는 당시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총리가 추진한 국제 외교 활동에 공헌했다.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는 '미국의 헤게모니주의'와 '마조비에츠키의 미국화'를 동시에 비판하며 마조비에츠키와 거리를 유지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새로운 흐름을 기뻐하고 즐기기까지 한다. "시코르스키는 내가 고안한 정책으로 입장을 전환했다. 그처럼 워싱턴을 기대했던 그가 이제는 '유럽의 애국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는 외교부 장관의 '명쾌한 말솜씨'를 끊임없이 칭찬하면서도 과거의 교훈을 강조한다. "우리는 본래 모습보다 폴란드가 더 중요한 국가라고 상상했다. 상당수 지도자들은 미국과 가까워질수록 그만큼 더 폴란드가 유럽과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워싱턴과 가깝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함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우리는 미국의 군사 우월성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주는 미사일방어체계를 지지했다. 그런데 미사일방어체계는 우리를 보호해주기는커녕 새로운 무기 경쟁을 촉발할 우려가 있었다. 무분별한 행동을 저지르며 반유럽적 수사학을 선택했는데, 이것이 우리를 소외시켰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리스본조약(카친스키 대통령이 당시 리스본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함)의 난관을 경험하고서야 이성을 다시 찾았다. 폴란드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한 과거를 미련 없이 잊어버려야 할 순간이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여기서 이 질문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시코르스키의 정책이 합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플랫폼'(PO)당이 이 정책을 지지한다. 심지어 '민주주의좌파연합'(SLD)은 자신이 이 정책의 원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SLD의 지도자 레셰크 밀레르는 자신이 총리였을 때 폴란드 비밀경찰 학교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감옥을 설치해줄 정도로 워싱턴을 추종했다. SLD 의원인 타데우시 이빈스키는 "우리는 거기서 고문이 행해진 줄 몰랐다"고 간단히 논평하면서도, '시코르스키의 미국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편애', 그의 '유럽 연방주의적 성향', 폴란드의 동부 이웃 국가들에 대한 '오만', 세계적 측면에서 볼 때 '비전이 별로 없는 유럽 중심주의' 등을 장황하게 뒤죽박죽 섞어 이야기하며 시코르스키를 비난했다.
체제 전환의 피해자는 노동자와 지식인
'폴란드 국제문제 연구소' 소장 마르친 자보로프스키는 "우리는 모든 달걀을 같은 바구니에 넣어서는 안 된다. 아랍 세계를 포함한 신흥국가들에 베팅해야 할 때다"라고 평가를 내렸다. 이어 그는 폴란드가 가진 '으뜸패들'을 열거한다. "우리는 식민주의 역사를 갖고 있지 않고, 옹호해야 할 신식민주의적 이익도 없다. 민주주의로 이양한 경험이 있고, 종교적 측면에서 가톨릭 사상에 젖어 살기 때문에 다른 종교인 이슬람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르샤바가 친이스라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태도는 폴란드 역사의 어두운 장을 닫고, 공산주의 체제의 정책을 다시 균형 있게 바로잡고, 동시에 워싱턴을 만족시키려는 의지로 보면 된다. 그러나 그 태도는 우리가 미국의 이란 공격에 적대감을 표현한 것처럼 바뀔 수 있다."
팔리코트(Palikot)당의 의원이자 하원의 부의장, 페미니스트 여성 전사인 반다 노비츠카는 바르샤바가 자아비판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코르스키를 포함한 정치가들이 미국과의 동맹으로 얻게 된 '국가 이성'이란 이름으로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비밀감옥을 정당화했던 사실은, 우리가 이런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무조건 미국의 전쟁을 지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워싱턴이 없으면 구원(救援)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전직 외교부 차관 비톨트 바스치코프스키의 관점은 이와 다르다. 그는 경제위기로 '무장해제된 유럽', '헤게모니를 잡은 독일', '공격적인 러시아', '동부의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이웃들'이라는 여러 위협 요소를 외교 수장의 자기만족에 대비시킨다. 그는 확실히 카친스키의 '비전'을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카친스키의 비전은 폴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완전한 회원이 되고, 동부 지역에서 리더가 되며, 서구에 중요 국가로 인정받고, 러시아의 존중을 받으며, 전세계를 매료하는 국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정부를 구성하는 PO와 '폴란드농민당'(PSL)은 2011년 10월의 입법선거에서 간신히 과반수를 얻었다. 특히 연금개혁(7)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 때문에 공동정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음에도,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Pis가 특히 쌍둥이 형제 중 살아남은 생존자를 지도자로 선택할 경우 권력을 다시 잡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레크 지오코프스키는 이런 판단이 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 상원의원인 이 사회학자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불공정하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이 많다. 폴란드 혁명은 혁명의 자식들까지 삼켜버렸다.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시치와 더불어 구체제를 전복한 사람들이 여전히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와 지식인이 체제 전환의 패배자로 자주 등장한다. 이전 체제의 특권층이 신흥자본계급과 권력을 나눠먹으며 여전히 권력에 남아 있다"고 말한다. '웃음거리가 된 이 사람들'- 쇠퇴하는 SLD와 암중모색 중인 팔리코트당 사이에서 제대로 힘을 못 쓰는 좌파로, 정권을 다시 바꿀 수 있는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이 카친스키 지지 세력의 근간을 이뤘던, 반동적이고 성직자 지상주의를 추구하는 폴란드 민족주의자의 3분의 1에 불과한 이 세력을 과반수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스몰렌스크의 시민'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대통령 카친스키가 블라디미르 푸틴과 투스크가 꾸민 공모에 의해 죽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1918∼22년 대통령이었고, 그 뒤 1926∼28년 총리를 지낸 유제프 피우수드스키가 구체화한 운동은 독재정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인 프로메테우스를 상기시킨다. 그 운동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바르샤바가 교두보 역할을 하면서 발틱해 연안과 카스피해 연안의 모든 비소련 국가들을 결집해 소련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파리에 근거를 둔, 예지 기에드로이치와 율리우스 미에로체프스키가 주도한 <문화>라는 잡지에 의해 구상된 이 전략은, 바르샤바의 범대서양주의와 '동쪽과의 파트너십'을 동시에 정당화하면서 1990년대에 다시 등장했다. 그런데 현실정치로의 회귀는 피곤에 지친 폴란드의 프로메테우스가 미련 없이 과거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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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도미니크 비달 Dominique Vidal 역사가이자 기자. 베르트랑 바디와 함께 <레타 뒤 몽드>(L'Etat du monde·라데쿠베르트 출판사·파리)의 올해 출간을 이끌고 있다.
번역 고광식 kokos27@ilemonde.com
(1) 다른 언급이 없는 한 모든 인용은 폴란드 외교부 사이트나 인터뷰에서 발췌한 것이다.
(2) 많은 역사가들은 소련군의 도착을 앞당기기 위해 봉기가 너무 일찍 터진 것도 학살에 일조했다고 이야기한다.
(3) 독일군(베어마흐트)을 비난하면서 오랫동안 학살 사실을 부인해온 소비에트연합은 1990년에 와서, 당시의 정치경찰 ‘NKVD’가 1940년 4∼5월 폴란드 장교 수천 명을 학살한 사실을 인정했다.
(4) ‘바르샤바의 외국인 혐오증’, http://tempsreel.nouvelobs.com, 2007년 6월 22일.
(5) <AFP>, 2011년 10월 4일.
(6) 리투아니아에는 25만 명의 폴란드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전체 인구의 7%에 해당한다. 이들은 옛 소련 시절에 몰수당한 재산을 환수하고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할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7) 연금개혁이 이뤄지면 현재 남성 65살, 여성 60살로 정해진 은퇴 연령이 점차 67살로 연장된다.
메달의 이면
‘프랑스 영광의 30년’과 ‘독일의 경제 기적’(같은 기간에 이룬) 이후에 과연 사람들은 ‘폴란드의 기적’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폴란드의 기적에 대해 의심하려면 바르샤바를 떠나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비스툴강을 넘어 흔들거리는 전차를 15분 정도 타고 가면, 노비스비아트의 화려한 쇼윈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행성에 도착할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닳은 의복, 누렇게 변한 책, 대충 수선한 인형을 인도에서 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라고? 통계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해준다.(1)
-3800만 명 중 1300만 명의 폴란드인이 빈곤에 빠져 있거나 빈곤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런데 160만 명만이 사회보조금을 받고 있다.
-빈곤의 경계선상에 살고 있는 어린이의 백분율이 30%에 달하고, 초등학생의 60%가 급식비를 낼 돈이 없다.
-66%의 가정이 바캉스를 가지 못하는데, 이 중 70%는 재정적 이유 때문에 그렇다.
-40%의 폴란드인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고 있다.
-다섯 중 한 가구가 집에 난방을 할 수 없다.
-다섯 중 한 아파트는 욕실이나 화장실이 없다.
지금의 경제위기 상황에서조차 폴란드가 급속한 경제성장을 하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2008년 5.1%, 2009년 1.7%, 2010년 3.8%, 2011년 4.3% 성장했고, 2012년의 예상 성장률은 3% 언저리다.(2) 폴란드 당국은 국민총생산이 7년 동안 유럽연합(EU) 27개국 평균치의 54%에서 63%로 증가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성장은 많은 부분이 EU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2007∼2013년 672억 유로의 보조금을 받게 되고, 2014∼2020년 800억 유로가 추가될 것이다. 폴란드는 20년 동안 약 1300억 유로의 외부 투자금을 유치했다. 이 멋진 메달에는 어두운 이면이 존재한다. 비록 ‘기적’이 존재한다 해도 대부분의 폴란드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15년 동안 폴란드는 200만 개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거의 500만 개 일자리를 잃었다. 그 결과 경제활동인구 비율이 80%에서 52%로 추락했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이 추락한 것이다.
-신고된 실업자 비율이 경제활동인구의 13%를 넘었다(실업자는 4명 중 1명만 약 150유로의 실업수당을 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2004년부터 약 200만 명의 폴란드인이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렇지 않아도 반쪽 난 인구(30년 전 여성 1인당 2.4명의 어린이를 출산했는데, 현재는 여성 1인당 1.4명 출산함)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었다.
-노동자 1600만 명 중 1100만 명이 주당 40시간 이상 일한다. 폴란드는 대한민국·러시아와 더불어 주당 노동시간이 가장 많은 국가다.
-노동자의 27%가 비정규직인데, 이는 EU 국가 중 가장 나쁜 성적이다.
-시간당 노동임금이 7유로인데, 독일은 29유로다.
-연금과 최소 노동력 상실 수당이 한 달에 177유로인데, 이는 1인당 196유로로 추정되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친다. 반면 은퇴요양소에 입소하려면 적어도 한 달에 625유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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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gata Nosal & Piotr Ikonowicz, <폴란드의 빈곤> (사회정의사무국·바르샤바·2011)에서 발췌.
(2) OECD와 EU의 통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