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장르에 대한 오해 그리고 와해 – 부성으로 오컬트를 벗어난 <사흘>
*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악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통해 인간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어느 신상(神像)에 숨겨졌던 것이든, 누군가의 몸을 빌려 태어난 것이든, 괴물처럼 달려드는 것이든 간에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 악은 적어도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악은 반대편의, 역시 보이지 않는 선과의 대결을 통해 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갓 태어난 아기이든 어린 소녀이든, 잠시 그 모습을 감추고 몰래 파괴를 실행하던 악은 신을 상징하는 선한 이들을 만나면서 악랄한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선이 악을 알아챌 때, 악은 선한 이의 약점을 잡거나 자신이 제물로 삼은 이들을 괴롭히면서 거대한 저의를 드러내고 그것 자체로 선이 승리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 준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선과 악의 대결 속에서 각각의 속성을 불안과 해소로 바라보게 하는 것, 바로 이 과정 속에 오컬트의 공포가 탄생한다.
그러니까 오컬트의 감각은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는 무엇에 대한 막연한 불안, 그리고 이를 선과의 대결로 가시화시키며 해소시키는 쾌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오컬트 장르의 대결이 신으로 상징되는 종교가 중심에 서서 해결하는 것은 이러한 오컬트의 속성에 기댄 바 크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그 근원부터 처리해줄 수 있는 이로 적어도 인간보다 결함이 없을 것이라 믿는 궁극의 선, 즉 신의 존재가 호명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이는 종교적 의미에서의 엑소시즘이 실존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허구 세계의 합리성에 기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기반으로 한 오컬트 장르의 구성은 그리 어려울 것 없어 보인다. 보이지 않는 절대 악, 이것의 침입으로 인해 고통받는 작고 연약한 제물, 그리고 이를 구원할 신을 대신할 존재라는 명확한 캐릭터가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오컬트는 그 모습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컬트의 장르적 전환을 꾀할 때에 오컬트를 성립케 하는 이 성격에 손을 대면서 종종 문제가 발생한다. 선으로 대표되는 신성(神性)을 인간으로 옮길 때의 위험, 그것을 간과했을 때 오컬트의 성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다. 영화 <사흘>이 공감받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흘>은 흉부외과 의사이면서도 딸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승도(박신양)를 영화의 중심에 세운다. 소미는 심장을 이식받은 후 기이한 일을 겪으면서 구마의식을 진행하던 중 사망하고, 승도는 소미가 이식받은 심장으로 인해 이 모든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미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알게 된 반신부(이민기)는 악마의 심장을 이식받은 소미의 소생을 막고, 딸을 살리고 싶어하는 승도의 집착이 부딪히면서 갈등이 격화된다. 이와 같은 <사흘>의 내용은 오컬트의 인물상을 모두 갖추는 듯 하다. 이식으로 인해 악마의 존재가 소미에게 틈입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신부는 엑소시즘을 통해 종교적 해결을 시도한다. 이처럼 익숙해 보임에도 이 작품에서 그려내는 불가해한 세계에 도무지 진입할 수 없다면 문제는 바로 승도라는 인물, 그러니까 악의 존재에 대해 부성이라는 감정으로 움직여야하는 잉여에 있다.
<사흘>에서 소미에게 들이닥친 악은 인간 세계의 것으로 내려왔다. 단순히 인간에게 빙의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전파까지도 인간계의 행위로 규정된 것이다. 물론 이것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식받은 심장이라는 악의 원인 그리고 그것에서 발현된 악성(惡性)까지도 인간 세상에서 수용될 수 있을 정도로 조절됐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사흘>에서 승도가 소미를 살리려 사건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리얼리티를 잃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승도는 부성으로 소미를 살리겠다 밀어붙이지만, 이식된 심장의 정체에 다가갈 때 주술을 부리듯 기묘한 이를 등장시켜 악을 표현하고 갑작스레 철창에 가두는 것은 악성의 수위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흘>은 부성을 엑소시즘 사이에 끼워 넣으려 했지만 그로 인해 대결해야 하는 주체들은 그 속성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했고 선도 그리고 악도 위치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악의 범주를 인간 세상으로 내려놨을 때 그것의 악성이 곧 인간의 악한 마음을 꾀어내어 범죄로 이어지도록 하는 좋은 예가 있었고(가령 OCN드라마 <손 더 게스트>와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인간 세계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본질적인 의심을 드러내기 위해 기괴한 분위기를 작품 전반에서 조절해 가며 그 의도를 달성한 예 역시 있었다(가령 <사바하>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사흘>은 드러나지 않는 오컬트의 속성을 그 어느 방향에서도 달성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딸의 이름만 부르는 아버지를 남겼고, 결국 희생자로 다시 아버지를 택했다. 장르적 쾌감의 달성도 그렇다고 분투하는 인물도 부각시키지 못한 채 애매한 장르 속에 부유했던 것이다. 이 사이에서 반신부는 성령을 통해 악을 처단하는 선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물리력으로 승도를 구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고 오컬트와는 점차 멀어져 갔다.
장르영화에서 장르적 컨벤션의 전회는 늘 매력적인 화두이다. 그러나 그 방향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그리 진지하게 논해지지 않는다. 특히 부성과 같이 어느 방식으로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으른 믿음이 존재한다면 더욱 그렇다. 어떤 장르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한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코어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흘>은 오컬트를 통해 아버지의 이야기를 남기려 했고, 그것은 불혐화음을 낼 뿐 어떠한 매력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부성은 여러 장르를 기웃거리면서 부성을 달성하기 위해 고통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과연 이것들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인가?
<사흘>(2024)
사진출처: 네이버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