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LGBT), 다양한 사회운동과 연대하라

2012-11-12     가브리엘 지라르 외

   

* 미국과 멕시코에서는 몇 개의 주가 동성혼을 합법화 하고 있다. -자료: 국제 LGBT협회, 엠네스티 인터네셔널(2012)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공약을 지켰다. 내년 1월 프랑스 국회에서는 동성 간 결혼의 합법화 여부가 가려질 것이다. 점점 많은 나라- 특히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가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려고 나서는 반면, 동성애자들을 감옥에 보내거나 사형에 처하는 국가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프랑스에서는 동성애자 결혼 합법화 논의가 진행 중이고, 아르헨티나에서는 성전환이 합법화되는 등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1)(LGBT)의 존재 조건이 날로 향상되고 있다. 이들이 '위험과 사회적 복권에 관한 법률'(스페인)에 의해 통제받거나, '파리 경시청 동성애자 관리팀'(프랑스)에 의해 감시받던 시대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된 것 같다. 전자는 1979년, 후자는 1981년에 철폐됐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성적 지향으로 인한 불평등과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전세계 80여 개국에서 LGBT들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결합된 국가 탄압과 폭력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고 있다.

1980년대 초,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 LGBT의 요구는 사회적·법적 인정 문제에 초점이 맞춰 있었다. 에이즈의 유행으로 사망자 수가 증가하면서 생존한 동성 파트너가 아무런 법적 권리를 누릴 수 없다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다. 게이와 레즈비언 커플 관련 법률이 처음으로 도입된 곳은 1990년대 북유럽(덴마크·노르웨이·아이슬란드·스웨덴)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999년부터 시민연대협약(PACS) 제도가 시행되는 등 LGBT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률이 속속 도입되었다. LGBT에 대한 사회적 재인식과 관용이 확산된 결과였지만( 사민주의 정당들의 지원도 한몫했다), 초반에는 구별짓기의 논리에 따라 정책이 결정됐다. 가령 동성 커플은 부모로서의 권리, 입양 등과 관련해 이성 부부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2) 어쨌든 이때부터 새로운 차원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부터 LGBT 운동은 동성 커플과 이성 커플 간 동등한 권리 보장 요구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런 요구는 가장 먼저 네덜란드(2001)에서 제기됐고, 다음으로 북유럽 국가에서 법제화됐다. 이어서 스페인(2005), 포르투갈(2010)에서 동성결혼과 입양이 합법화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캐나다(2005), 아르헨티나(2010), 브라질의 알라고아스주,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와 킨타나로오주, 미국의 코네티컷·아이오와·매사추세츠·뉴햄프셔·뉴욕·메릴랜드·워싱턴 주와 워싱턴DC도 동성 커플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률을 도입했다. 현재 20여 개국에서 동성애 혐오(Homophobia)는 범죄 처벌시 가중 요소가 된다.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적 의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이러한 법적 성취를 이뤄냈다고 볼 수는 없다. 변화에 저항하는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스페인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동성결혼에 반대하고,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밋 롬니는 이성 커플에게만 결혼을 허가하는 연방결혼법안(FMA) 도입을 지지한다. 많은 수의 LGBT들은 여전히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일상에서 겪고 있다.

이들의 권리는 아직 당연하거나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동성 관계는 78개국에서 불법이며, 동성애자들은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 사형당한다. 또한 법적 처벌의 경중과 무관하게, 동성애는 도덕적 규율을 강요하는 정권이나 종교단체의 주요 표적이 되어왔다. 지난 10년간 상당수의 아프리카, 근동 국가(발칸반도·아나톨리아·레반트 등)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다.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소행인 경우가 많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예멘, 나이지리아, 수단, 아프가니스탄, 모리타니 등에서는 동성애 행위가 발각되면 최고 사형까지 처벌이 가능하다. 실제로 200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3명의 남성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란은 2005년 7월 청소년 2명을 사형했다. 2010년 사형 선고를 받은 또 한 명의 젊은이는 국제사회의 구명운동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라크에서 동성애는 불법이 아니지만, 2004년부터 이슬람주의 무장단체들이 동성애자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3) 다른 종교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간다의 복음교회(특히 'Born Again') 목사들은 동성애자를 종신형에 처하도록 한 법률이 너무 관대하다며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LGBT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족이 나서서 이들을 직접 처벌하거나 고발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지역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활동가들은 박해와 폭력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살해당하기도 한다.(4)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연대 네트워크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동성애에 대한 탄압과 고발이 이른바 '서구적'이라고 간주되는 가치에 대항하는 길로 여기기도 한다.

공적 억압과 사회적 지탄

2011년 초, 카메룬 정부가 성적 소수자 권리 지원 프로그램을 지원하겠다는 유럽연합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최근 우간다에서는 몇몇 국제 비정부기구(NGO)가 우간다 젊은이들 사이에 동성애자들을 모집한다는 이유로 입국을 금지당했다.

특정 집단에 '경멸받는 섹슈얼리티'(5) 낙인을 찍는 법적 차별에 덧붙여 보건과 관련된 문제도 존재한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 통계를 살펴보면 LGBT들이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에 대한 세계보건기구(WHO)의 분석이다. "이 지역 대부분의 국가에서 HIV 이환율(환자수/인구수)은 1% 미만이지만,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남성들(MSM·Men who have sex with men)(6)은 그 비율이 5~20배 더 높게 나타난다. 동성애혐오로 인한 낙인찍기와 차별 때문에 전염이 더욱 확산되는 것이다."(7) 전세계적으로 MSM의 대부분이 에이즈 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8) 이들은 낙인찍기, 폭력, 동성애 금지법이 온존하는 상황에서 가족, 지역 공동체, 당국에 자신의 성 정체성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 각종 치료나 혜택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MSM의 감염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며, 러시아처럼 실상을 부인하는 국가들은 불명확한 통계 수치 때문에 제대로 된 예방이나 치료 대책을 세우는 게 불가능하다.

보건 시스템이 잘 갖춰 있고 LGBT의 접근권이 보장된 경우도 의료진의 무지, 편견과 싸워야 한다. 어떤 의사들은 환자가 "동성애자처럼 안 보여서" 혹은 "결혼한 것 같아서" HIV 테스트를 생략하기도 하고, "호모들" 같은 말을 써가며 모욕적인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어떤 치과의사들은 에이즈바이러스 보균자들을 대기실에서 한없이 기다리게 만들거나 노골적으로 안전 조치를 취하는 등의 방법으로 차별한다. 실질적인 차별을 겪거나 사전에 두려움을 느껴 제대로 진료받지 못할 경우, 인간유두종바이러스(HPV)처럼 성 접촉을 통해 전염되는 질병과 일부 암에 대한 진단과 치료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정체성 전환(Trans-identity)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여전히 정신병의 일종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DSM) 등과 같은 국제적 의료 편람에도 정신병으로 규정되어 있다.

1990년대 말, 미국에서 시작된 '게이 보건'(혹은 'LGBT 보건') 운동은 이들의 건강 문제를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했다.(9) 아직 도시 거주 백인 남성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운동은 집단적·공동체적 활동의 역사와 접합 지점을 찾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1968년 이후, 게이·레즈비언 해방운동은 페미니즘운동의 뒤를 이어 사적 영역의 가시화와 정치화를 통한 새로운 투쟁 형태를 제공했으며, 좌파 전체에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미국을 필두로 유럽 전역에 동성애자 해방운동 단체들이 속속 등장했다. 영국의 '게이해방전선'(Gay Liberation Front), 프랑스의 '동성애혁명운동전선'(FHAR)등이 대표적이다.(10) 1980년대 들어 이 그룹들은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점차 제도화되었다.

서유럽 각국의 변화는 다양한 양상을 띠었다. 프랑스의 경우 1981년 집권한 좌파가 동성애자 처벌 법조항들을 철폐하면서 동성애자 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지만, 다른 보수적 국가들에서는 반동성애 법들이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영국에서 1988년 도입된 한 법률(section 28)은 학교에서 동성애와 관련된 발언을 금지했다. 미국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집권 기간(1980~88)에 동성애자에 대한 윤리적·정치적 대우 방식이 에이즈 예방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기도 했다.

시대를 거치면서 요구사항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이성애적·가부장적 표현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해 대안적 표현을 현실화하기 위한 권리와 개혁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HIV/AIDS의 확산은 우연한 방식으로 동성애자 해방 운동의 방향 전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초부터 에이즈 퇴치운동은 게이운동의 재편 과정에서 구심점 역할을 했다. 영국의 테렌스 히긴스 트러스트(1982), 미국의 게이 멘 헬스 크라이시스(1982), 프랑스의 AIDES(1984) 같은 단체들이 대표적이다.

액트업(Act Up)과 같은 단체는- 1987년 뉴욕, 1989년 파리에 등장- 게이 공동체 내부의 HIV 보균자들의 분노를 상징한다. 동성애운동이 발전해가면서 스포츠클럽(유럽게이레즈비언스포츠연맹), 직종 단체(전국게이기업협회), 대도시의 커뮤니티 센터, 청년·학생 단체 등 차별 반대와 친목을 위한 다양한 단체가 등장했다. 이 단체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성적 억압에 대한 싸움보다 차별화된 정체성이었다.

   
엘리 카간(Elie Kagan), 동성애혁명행동전선(FHAR)의 시위. 파리, 1971년 5월 1일.

45년간의 전투적 해방운동

현시대 LGBT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국제적 연대다. 물론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이미 1970년대부터 동성애운동 내부에서 이론과 활동의 교류가 활발했다. 1969년 뉴욕의 스턴월 봉기는 전세계 다양한 해방운동의 모델이 되었으며, 매년 곳곳에서 개최되는 '프라이드 퍼레이드'(게이 퍼레이드)는 지금도 이 사건을 기념한다. 최근 10년간, 동성애 혐오 피해자들에 대한 국제 연대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LGBT 정체성 공개가 금지된 국가에서도 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연대는 특히 국가 차원의 동성애자 억압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가령 세네갈 정부는 2009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에이즈 단체 활동가를 석방했다. 이런 활동의 결과로 LGBT들이 처한 가혹한 상황, 가령 벨그라드와 모스크바의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벌어졌던 폭력과 탄압, 우크라이나의 동성애 혐오 법률 등이 여론의 조명을 받게 되었으며, 망명이나 이민을 신청하는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연대 네트워크도 구축되었다.

때로 동성애혐오에 대항한 싸움은 최근의 '호모내셔널리즘'(Homonationalism)(11)을 둘러싼 논쟁에서 보듯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도 있다. 이 비판적 개념은 2000년대 들어 일부 LGBT운동 조류가 이민자들, 특히 무슬림들을 자신의 게이·레즈비언적 삶을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지칭한다. 동성애를 혐오하고 탄압하는 이슬람 단체와 정부들에 대한 정당한 경멸심이 '문명 간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2002년 살해당한 네덜란드의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극우파 정치인 리에스트 핌 포르퇴인은 당시 분위기를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런데 서구사회가 비서구사회에서 탄압받는 성적 소수자들의 망명 신청을 거절하는 순간, 전자의 '진보주의'와 후자의 '반계몽주의' 사이의 경계는 의미를 잃고 만다.

LGBT의 상황에 대한 높은 국제적 관심은 2007년 인도네시아에서 요기아카르타 원칙(12)을 선언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권 전문가들이 작성한 이 원칙은 국제기구들이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는 데 앞장서도록 촉구한다. 2007년 3월 26일 유엔에서 발표한 이 선언문은 54개국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현재는 인권,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 선언을 유엔이 채택하도록 추진 중이다.

LGBT운동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도적 차원에서는 인권문제에 집중하는 압력단체들, 가령 국제LGBT연합(ILGA) 등이 각종 기관과 정부에서 활발한 로비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단체들은 연대활동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지향하는 목적이 모호하다는 한계가 있다. 이들의 정체성 인정 전략은 LGBT 공동체 내부를 가르는 계급·젠더·인종의 분리선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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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가브리엘 지라르 Gabriel Girard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캐나다 콩코디아대학 다니엘라 로자스 카스트로 Daniela Roja Castro 사회심리학 연구그룹

번역 정기헌 guyheony@gmail.com


   
<해방되기 위해 힘을 합쳐라!>, 1973-프랑스조형예술가연맹(FAP) 홍보포스터
권리 운동과 변혁 전략 나란히 가야

성적 소수자들이 내세우는 정체성은 상당 부분 서구의 기준과 시장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영화·잡지·인터넷 사이트·관광 산업은 특정 정체성과 관련된 성적 이상형을 전파한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지역에서 성적 지향과 젠더는 매우 다양하고 유동적 방식으로 경험된다. 가령, 스스로를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인도의 히즈라(Hijra)들은 이성애-동성애의 이분법적 관점으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를 탄압하는 환경에서는 해방운동의 필수 단계로 여기는 커밍아웃(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의 공식적 확인)보다는 지역 상황을 고려한 저항 전략이 더 유효할 수도 있다.

'퀴어'(Queer) 이론은 지난 20년간 이런 정체성의 긍정 전략과 반대 방향에서 성과 젠더의 '자연성'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 앞장서왔다.(1) 이들은 성과 젠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정체성의 다양하고 유동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같은 지적 경향은 퀴어(미국의 퀴어 네이션, 이스라엘 상품 불매운동에 참여한 BDS 퀴어 등) 혹은 트랑스-페데-구인(트랜스·게이·레즈비언을 일컫는 속어의 조합으로, 핑크펜더 그룹 활동가들이 스스로를 지칭한 말) 등, 대안세계화주의와 가까운 급진적 정치운동의 부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활동가들은 1970년대와 비슷하게 다양한 투쟁(페미니즘·반인종주의·반자본주의)을 하나로 모아내는 전략에 관심이 많다. 그-그녀들은 게이와 레즈비언 정체성이 제도화·상업화되는 현상을 비판한다. 그들은 강한 조직을 만드는 데 별 관심이 없다. 가령 핑크펜더는 2000년대 캐나다 퀘벡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와 포르투갈로 확산됐지만, 굳이 서로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있다. 영어권 지역의 퀴어럽션(Queeruption), 프랑스어권의 동성애 여름대학 같은 주요 국제 조직들도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가장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결집의 형태다. 북반구 지역에서는 1970년대부터 레즈비언 활동가들이 게이들과 함께 만든 그룹 내에서 여성 차별을 겪으면서 독립적 행보를 시작했다. 페미니즘과 연결된 이 단체들은 레즈비언운동의 한 경향을 이루었으며, 때로는 전략적 필요를 위해 양성 단체들과 연대하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는 트랜스들 역시 독립적 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남성 게이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겉으로는 보편성을 표방하는 LGBT운동 형식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남성 게이들이 대중적 표상 공간을 점령하면서 그 외 운동들은 그늘에 가려 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다른 한편, 권리쟁취를 위한 투쟁이 중심을 이루면서 LGBT 해방의 근본 차원인 사회적 평등이라는 문제가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들은 가족의 지원으로부터 자주 소외될 뿐 아니라 공공서비스 혹은 지역 연대 시스템의 혜택에서도 배제된다. 지난 몇 년간 이들이 체감하는 어려움은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남반구 국가에서는 경제위기의 여파로 생활이 불안정해지면서 전통적인 연대 구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개인적·집단적 해방 전략을 실천에 옮기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북반구 국가의 대도시에서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하는 일부 동성애자들은 별다른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 트랜스, 젊은이,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게이·레즈비언 비즈니스가 제공하는 일자리는 한계가 있을뿐더러, 일반적으로 실업과 고용불안이 증가하고 가족에 대한 의존도가 상승하는 상황에서 정체성 공개 자체가 쉽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전통적 동성애운동 방식으로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포괄할 수 없다. 그 대안으로 핑크블록스 같은 단체들은 여러 나라에서 공공서비스 수호나 인종주의, 제국주의 반대집회 등에 참가해 LGBT에 대한 관심과 연대 투쟁을 촉구하고 있다. 노동조합 내부에 위원회 형태로 조직을 구성하거나 영국의 '삭감에 반대하는 퀴어들'(Queers Against the Cuts) 같은 단체와 협력하는 이들도 있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LGBT의 세계는 공동의 투쟁을 전개하기보다 다양한 정치적 분파로 분열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법적 권리 쟁취와 사회질서 변혁 전략은 함께 갈 수 있다. 정치적 분파들 사이의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LGBT운동이 좀더 포괄적 정체성 전략을 수립하고 다른 사회운동과 연대할 필요성이 증대하고 있다. 최근의 호모내셔널리즘 논쟁은 매우 제한적이긴 해도 새로운 전략과 정치적 전망을 모색하는 데 영감을 제공해줄 뿐 아니라,(2) 동성애 운동 속에서 북반구 출신의 백인 게이 남성이 헤게모니를 행사해온 역사적 과정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다양한 그룹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들 사이의 '공동 이해'라는 개념적 한계를 생산적으로 극복하고, 진정한 연대가 가능한 새로운 공간을 모색해야 한다. 지나친 분열로 협소해진 정체성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행동이다. 만약 남반구 지역에서 억압에 대항한 투쟁, 권리 쟁취, 불평등한 사회제도 개혁 등을 하나로 모아내는 노력이 성공한다면 새로운 정치적 전략의 탄생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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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udith Butler, <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Découverte·파리·2004), 주디트 버틀러 저, 조현준 역, 문학동네, 2008. Elsa Dorlin,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페미니즘 이론 입문>, PUF, 파리, 2008.
(2) Alexandre Jaunais, ‘성적 내셔널리즘으로의 회귀’, <Genre, Sexualité et Société>, n°5, 파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