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최소한의 선의> - 파열음 다음에 오는 화음의 희망

2025-01-07     이승민(영화평론가)

인간은 누구나 자리와 역할 갖는다.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고정적인 자리가 있는가 하면, 노력해 획득하는 자리가 있고, 혹은 일시적이고 임의적인 자리가 있다. 태어나보니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성장하면서는 꿈이나 직업이라는 명명 하에 이런 저런 직업명을 획득하거나 주어졌다. 장소나 상황에 따라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고, 배우는 사람이기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 글을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 때때로 거리의 무수한 사람 속에서 그 무엇도 아닌 익명의 존재이기도 하다. 상황과 위치와 역할에 따라 부여된 자리에는 책임과 권한이 부여된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할 수 있는 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 지 그 “선”이 주어지고 그리고 그 선에는 조그마한 여지라는 최소한의 틈이 존재한다.

영화는 두 여자의 이야기이다. 교사인 희연은 아이를 갖기 위해 애를 쓰고, 고등학교 1학년 유미는 아이를 가져 지우기 위해 애쓴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사와 학생, 기혼의 난임과 미성년의 임신이라는 자리와 역할 속에 서로의 삶이 교차하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다 마침내 연대하며 성장한다. 간명해 보이는 줄거리와 달리, 영화는 표면 아래 여러 겹의 “선”과 “선의”들이 요동친다.

 

영화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차하는 두 사람의 보여주며 시작한다. 졸업식 날 희연은 선물을 들고 온 학생들에게 자신이 공무원이라며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입학식 날 유미는 화장실에서 나오며 주운 꽃을 주는 동생의 선물을 거절하며 시작한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고무실과 운동장, 졸업식과 입학식, 받을 수 없는 선물과 받지 않는 꽃으로 교차하는 독립적인 두 사람은 다른 위치와 자리에 놓은 사람들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교실에서 잠을 쫓으며 졸고 있는 유미와 휴게실에서 임신 촉진 보약을 먹고 졸고 있는 희연이다. 영화는 교차하던 두 사람을 “잠”으로 연결시킨다. 희연과 유미는 둘 다 “임신”이라는 여성 신체의 미션을 두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아이를 가지기 위해 약을 먹는 희연과 아이를 가져서 허기를 느끼는 유미는 둘 다 잠으로 표출되는 어떤 무력한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그 무력함은 주위의 압박과 무관심 속에서 예민해지지만 쉬이 표출할 수조차 없다. 여성의 신체는 가정이라는 제도, 학교라는 제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닮았지만 다른 자리에서 선 둘은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방어벽을 높이고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그러던 그들에게 영화는 어떤 순간을 만들어낸다. 유미가 만삭의 몸으로 희연의 집을 찾을 때, 다시 말해 마침내 임신한 희연이 만삭인 유미의 출산을 도와야 할 때, 그동안 대치하듯 보였던 둘은 겹쳐지고 이어진다. 가장 “영화적 순간”이다. 지금까지의 현실적 리얼리티에 틈을 벌여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상황을 창출한 것이다. 그렇게 희연은 유미를 유미의 자리에서 살피기 시작하고, 유미도 희연에게 감사하며 그녀를 따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는 다른 영역이다. 영화는 아이를 두고 희연의 (교사)책임과 유미의 (엄마)책임을 열린 시각으로 나란히 펼쳐낸다. 각자의 책임과 선택이 “선의” 속에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자리와 역할과 책임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해석과 운신의 폭이 달라진다. 자리에 책임이 붙으면 자리보전에 책임을 운용하게 되고, 역할에 책임을 붙이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책임의 무게를 지게 된다. 희연이 전반부에 보여준 공무원으로 자리 보존의 책임과 후반부에 학생을 챙기는 선생이자 어른으로서 책임은 사실 한 동전의 이면이다.영화 전반부에서 희연은 “어떤 상황에서도 교사는 중절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 “시간 끌다가 우리가 다 덮어쓴다.” “교사에겐 학생 한명만 있는 게 아니다.” “임신한 학생이 학교 오는 건 허용할 수 없어.” 는 학교 질서 유지에 복무하는 책임을 보여준다. 그러다 유미의 출산을 기해, 아니 어쩌면 본인의 임신에 기해, 희연은 점차 학생이자 같은 여성 유미의 삶을 고민하고 함께 방향을 모색하는 교사로서 책임성을 가진다. 선의(善意)이기도 하지만 책임의 선(線)이 이동하고 확장한 것이다. 영화는 한편으로는 두 여성의 연대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 자리에서 운용가능한 선의에 대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자리 보존 사회냐 역할 수행 사회냐 혹은 책임 추궁 사회냐 책임 실행 사회냐에서 보여주는 선의의 선이 얼마나 다른 지 일깨우는 작품이다.

영화에서 남자들도 “책임”을 말한다. 표면적으로 책임을 공유하는 듯 아버지도, 남자친구도, 심지어 남편도 그렇고 주인선생과 교장 모두 원리원칙의 책임을 “말”한다. 이들의 책임은 질서 유지의 책임이자 자기 자리 보존의 책임이고 책임지지 않는 책임이다. 매달 돈을 주고 있는 남자 친구는 “책임이 나에게만 있진 않잖아. 어느 정도는 나눴으면 좋겠어.” “이번에 학교에 꼭 합격해야 해”라며 임신과 자퇴와 출산을 경험하고 있는 여자 친구 유미에게 말한다. 그러나 영화는 성별을 나눠, 직업을 나눠, 선과 악, 피해와 가해, 옳고 그름의 평가를 하지 않는다. 다만 이 사회에 공존하는 이들의 존재 자체를 나란히 포섭해 드러낼 뿐이다. 관습(banality)의 실체로서 이들의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이들을 비난하기 보다는 거울처럼 보게 된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대치와 충돌 이후 아름답게 연대하는 착한 영화 같지만, 그 보다는 자리와 책임에 묻혀 배척되는 타자에 자리에 대한 최소한의 선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영화는 두 여성이 좌충우돌하며 자기 자신과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굴곡과 과정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는 관객의 선의를 요청한다. 무엇보다 영화는 후반부에 사라져버린 엄마나 아버지가 아니라 여동생을 비롯해 학교 친구들의 연대를 통해 “희망”을 말한다. 여기서 희망은 막연히 잘될 거라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어떻게 되든 의미가 있다는 현실에 대한 확신이다. 그렇게 현실을 믿고 지금 현실이 미래가 되게 하는 그런 현재적 희망이다. 영화는 자신의 이익에만 선명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최소한의 선의를 질문하고 실천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제목 <최소한의 선의>는 다의적이다. 최소한의 선의는 인간이 베풀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혹은 근본적인 선의를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리와 역할에서 내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 영역인 선에 대해 논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소는 최대의 반대이기도 하지만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마지노선인 그 핵심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선의는 베푸는 선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서로를 지켜주고 지켜내고 영역이자 경계선이기도 하다. 영화는 희연과 유미가 보여주는 “최소한의 선의”를 통해 성장하는 영화이자 질문하는 영화이다. 최소한의 선의(善意)는 무엇이고, 최소한의 선(線)의는 어디까지 일까? 요즘같은 어먹한 시간에 베풀고 지켜내는 선의가 최소한만 있어도 우리 삶은 조금 더 나아가지 않을까. My Best, Your Least!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최소한의 선의>
 

글·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