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미의 문화톡톡] 아픈 몸에 필요한 세 가지
한 개인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릴 만한 이슈를 꼽자면 그건 아마도 질병일 것이다. 예상에 없던 질병을 얻게 되는 순간 개인이 겪어야 하는 신체적 통증, 정신적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경험이며, 건강한 사람에서 아픈 사람으로, 정상인에서 비정상인으로 개인의 사회적 위치를 조정 당한다. 그러나 이것만큼이나 환자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건 질병을 신체적 변화, 또는 현상으로 이해하기보다 그 질병을 앓는 사람이 살아온 삶의 결과물로 취급하고 평가하려는 태도다. 이를테면 질병을 두고 처벌이나 응징으로 해석하거나, 질병을 앓는 사람을 두고 관리하지 않은 사람, 함부로 몸을 ‘굴린’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질병에 걸리는 이유는 수백 가지가 있음에도(어쩌면 이유나 원인조차 찾을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많음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대개 비슷하다. 착한 사람이 어쩌다 병에 걸렸냐며 안타까움을 동반하는 동정론, 위로랍시고 운이 나빠서 또는 재수가 없어 걸린 것이라는 불운론, ‘잘못’이든 ‘잘 못’이든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해 병에 걸린 것이라는 인과응보론만 보더라도 질병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탐탁지 않다는 것 짐작할 수 있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누구나 할 법한 위로와 격려를 하고 때때로 용기를 준답시고 여러 말을 던진다. 모든 말이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야 하겠지만 문제는 때때로 선을 넘는 위로나 지나친 참견이 아픈 몸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완치되기까지는 일상을 포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당위, 몸에 해로운 것은 일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따라 해야만 병이 낫는다는 정상인들의 조언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아픈 사람을 질병이라는 국가에 밀어 넣고 치료와 완치를 명분으로 컨트롤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환자가 된 개인의 욕망, 일상탈출에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자유는 ‘건강과 정상의 국가’라는 거름망을 통과할 수 없는 불순물일 뿐이다. 정상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말한다. 이 찌꺼기들을 과감히 버려야 살 수 있다고, 정상의 세계로 재진입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고통은 감수하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그러나 우리는 더 본질적인 것을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픈 몸을 가진 사람들의 최종적 욕망이 정말로 정상 세계로의 진입인지. 물론 이걸 원하는 개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면? 아픈 몸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면? 아픈 몸은 비정상이 아니라 또 다른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질병에 관해, 그리고 질병을 앓은 주체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수잔 손택의 언어를 빌리자면 건강이라는 국가에서 질병의 국가로 이주한 작가 김도미는 『사랑과 맥주 한잔의 자유』를 통해 질병이라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의 욕망을 가감 없이 그리고 솔직하게 드러낸다. 사랑, 맥주, 그리고 자유. 아픈 몸의 세계에서 사는 환자라고 해도 이 세 가지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슬픔이자 기쁨이다.
사랑: 아픈 사람이 사랑하는 법
보통의 정상인이라면 생애 주기에 맞춰 미래를 계획하곤 한다. 성인이 되고 직업을 가지며 적절한 시기에 이성을 만나 결혼을 해 가족을 꾸리는 동시에 자기계발을 도모하는 것.
건강한 몸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의 상상은 누구나 예상 가능한 미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안에서도 불확실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불확실하다고 해서 이것들을 금기시하거나 외부로부터 차단당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건강한 몸의 세계에서 불확실성은 의지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해소할 수 있다는 막연하지만 강력한 믿음이 주문처럼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픈 몸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이 세계에서는 불확실성이 곳곳에 있다. 무엇보다 언제 어떻게 나빠질지 모르는 몸, 종료를 기약할 수 없는 치료 앞에서 당사자는 물론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미래를 준비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개인은 취약해지고 불안해진다.
그런 이유로 아픈 몸을 가진 당사자는 함부로 미래를 욕망해서는 안 된다(고들 사람들은 말한다). 그 욕망이 혹 건강한 몸의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픈 몸을 가진 사람이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건 건강한 몸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에 볼 때 생각이 없거나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심각하게 우려한다. 그러면서 아픈 몸을 가진 사람에게 치료가 끝나기 전까지, 완치될 때까지 욕망을 미루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조언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우려나 조언이 아니라 명령으로 들린다면 오해일까.
정상 세계에서 사랑은 오로지 이성 간의 사랑을 의미하며, 사랑의 완성이란 이들의 결혼과 육체적 결합이라는 행위로 결정되고 그 결실은 임신과 출산이란 이름으로 가시화된다. 그중에서도 이성 간의 육체적 결함은 사랑의 결과이자 임신과 출산과 직결되기 때문에 ‘아무’에게 허락되는 안 되는 것으로 신성화되어 있다. 정상인들의 섹스, 정상적인 섹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염된 것, 불경하거나 불쾌한 것 비윤리인 것으로 표현되는 것도 모두 이러한 배경이 놓여 있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염된 것, 불결한 것이 위험한 것이라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환자들은 으레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금지하도록 권유받는다. 완치를 위해, 건강을 되찾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인간으로서의 본능과 욕망을 제거하도록 명령받는다. 질병을 앓은 사람들의 사랑에 관해서는 더 엄격하다. 아픈 몸을 위한 사랑 설명서는 어디에도 없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은 지워진 언어이자 원래 없었던 값이다.
김도미는 아픈 몸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과정과 결과를 두고 포기가 아닌 선택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몸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선택했고, 임신 가능한 여자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여자의 삶을 선택했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건강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단어일 뿐이기 때문이다.
맥주: 좋고 나쁜 건 누가 정하는 것인가
환자든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든 으레 의사나 간호사들에게 ‘무엇을 먹어야 좋은가요?’와 ‘무엇을 먹으면 안 되나요?’와 같은 질문을 곧잘 한다. 이 질문에 전문가들은 몸에 좋다는 것도, 몸에 좋지 않은 것도 먹지 말라고 대답한다. 애매하고도 어려운 대답에 적잖이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잘 먹어야 병이 빨리 낫는다는 말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건강한 몸을 지녔을 때보다 좀 더 조심하고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아픈 몸을 갖기 이전과 완전히 다른 식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건강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 허상에 가깝다.
몸에 좋은 음식은 아픈 사람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에게도 좋고, 반대로 몸에 나쁜 음식은 건강한 사람에게도 나쁘다. 무엇이든 지나치게 먹지 않는다면 특정인에게 더 좋거나 더 나쁘거나 한 음식은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아픈 몸을 지닌 사람들에게 음식은 먹는 즐거움을 주는 수단이 아니라 치료의 연장 수단으로 여겨지고, 주변 사람들의 ‘이 음식이 암에 좋다더라’, ‘그 음식은 그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로 표현되는 우려는 먹는 즐거움을 빼앗아 가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탄산음료를 하루에 2리터씩 먹고도 날씬하고, 어떤 사람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소주 한 병씩 먹고도 건강한 몸을 자랑한다. 어떤 사람은 철저하게 절제된 식단을 지키지만, 각종 건강 수치는 늘 정상과 비정상을 위태롭게 오가고, 어떤 사람은 몸에 좋다는 음식이란 음식은 찾아다니며 먹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질병 앞에서 특별히 좋은 음식, 특별히 나쁜 음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몸에 들어왔을 때 어떤 반응을 일으켜 가시화되지 않는 이상 예측할 수 없다. 누구에게는 0%의 확률이 누구에게는 100%의 확률이 될지는 모든 일이 발생하고 나고서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픈 몸이라는 결과물 앞에서 종종 환자 당사자는 ‘아무거나 먹은 대가’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환자의 보호자나 돌봄 당사자들은 ‘좋은 음식을 제공하지 못한 대가’라며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김도미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보신주의와 넘쳐나는 의료 정보가 만든 ‘보양식’, ‘건강식’이란 이름으로 환자와 돌봄 노동자가 압박받지 않길 바란다. 음식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식이 우리의 건강을 좌우한다는 믿음 역시 지나친 허상에 가까울 뿐이다.
자유: 쪼대로 선택할 자유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무엇인지 정작 환자 자신만 알지 못하는 시절이 있었다. 불과 이삼십여 년 전의 시절의 이야기다. 이유는 그럴듯했다. 환자가 정신적 충격을 받는 건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의사를 비롯한 환자의 보호자는 기꺼이 이 비밀을 지켰고 주변 사람들 역시 암묵적으로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 말이 맞았다면 지금은 틀렸다. 병을 앓는 것도, 치료를 받는(또는 거부하는) 것도 오로지 주체에 달렸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과거에 비하면 질병을 이해하는 태도도, 바라보는 시선도 환자 당사자를 중심으로 하여 존중하는 방식으로,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으로 진료의 흐름이 변화한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누구든지, 얼마든지 전문적인 의학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상에 살게 된 덕분에 환자는 자신의 질병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환자가 자신의 몸 상태, 상황, 환경, 조건을 선택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환자에게 가해지는 각종 제재는 여전히 산재한다. 질병마다 해당 전문가가 정해져 있다는 근거로, 돌봄의 효율성을 이유로, 저마다 가진 비용의 한계로 치료 방식, 사는 공간, 돌봄의 범위까지 어디 하나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자 사실이다.
우리가 특수 시설이라 부르는 곳이 존재하는 명분은 신체적, 사회적 약자의 보호다. 장애인은 신체적 결함을 가졌다는 이유로 장애인 시설에, 청소년 자립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청소년 보호 시설에, 병들거나 늙은 사람은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요양 시설에 맡겨진다. 시설을 선택하는 건 개인에게 달린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완전히 자율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장애인이 장애인 시설에 들어가지 않는 것, 청소년들이 시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는 것, 아픈 사람이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을 두고 좋게 보는 시선은 없다.
모든 인간이 건강하게 사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질병을 갖고 태어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건강을 잃기도 한다. 대부분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수십 개의 질병을 경험하고 또 얻는다. 건강한 몸의 세계와 아픈 몸의 세계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세계와 세계를 단절하기 위해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 개인이, 공동체가, 세계가 진심을 ‘애’를 쓰는 것일 테다.
나는 나의 상태와 치료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자유,
근거 없고 위험한 치료법 콘텐츠에 노출되지 않을 자유,
가고 싶은 곳에 갈 자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자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자유,
에로틱한 사랑을 할 자유,
일할 자유,
쉴 자유,
치료하거나 하지 않을 자유,
그 모든 것을 선택하는 기준과 한계를 자신의 합리성에 근거하여 정할 자유
에 대해서 마구 떠들고 싶다
-김도미, 『사랑과 맥주 한 잔의 자유』, 96쪽.
글·장윤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