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현의 문화톡톡] 이길 저길: 선택의 조각들로 이루어지는 나의 세계

2025-01-13     한기현(문화평론가)

가보지 않은 길을 갈 수 있도록 ‘변화’와 ‘결단’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문정인 작가의 『이길 저길』 (달그림, 2024)입니다.

 

Ⓒ문정인,

책을 찢어보는 낯선 경험

이 책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길을 내야 합니다. 종이의 길입니다. 종이의 원재료인 나무에도 결이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종이에도 결이 있습니다. 종목과 횡목으로 가로, 세로 방향으로 종이를 휘거나 찢어보면 종이의 방향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길 저길』은 페이지를 찢으면서 길을 선택하고 찾아가는 독자 참여형 그림책입니다. 이 책을 구입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나는 책을 찢을 ‘결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종이를 자르는 순간, 온전하고 신비로웠던 한 장의 이미지가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찢어본 것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합니다. 어쩌면 나에게 책을 찢는 행위는 우연히 일어난 실수이거나 마음에 꺼림칙한 금지된 행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장의 이미지를 ‘파괴’하는 과감한 ‘결단’이 있어야만 작가의 의도대로 이 책을 바르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문정인 작가는 프랑스의 동쪽, 스트라스부르의 고등미술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고 한국에서 첫 그림책을 출간했습니다.

 

길을 떠나자.

아주아주 먼 곳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디를 건너갈지.

누구를 만날지는 몰라.

 

Ⓒ문정인,

이 길을 선택해야 할까? 저 길을 선택해야 할까?

주인공은 두 가지 풍경에서 동시에 길을 떠납니다. 나무와 풀이 자라난 ‘숲길’, 파도가 치고 연꽃이 피어난 ‘물길’, 두 갈림길에서 독자에게 선택이 주어집니다. 내지에 있는 절취선을 따라 종이를 잘라 ‘길’을 만듦으로써 우리는 주인공을 다음 장소에 데려다 놓습니다. 우리가 파괴한 한 장의 이미지는 다른 장면들과 재결합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때로는 눈앞에서 폭발이 일어나기도 하고, 거대한 새에게 물려가기도 하며, 미지의 존재로부터 티타임에 초대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선택의 순간마다 독자가 종이를 자르는 과정에서 이미지들은 여러 개의 '파편'이 됩니다. 그리고 파편이 된 작은 조각들이 모여 마침내 완전한 한 장을 이루며 주인공을 둘러싸고 축복하듯 하나의 세계로 재구성됩니다.

 

선택의 조각들로 이루어지는 나의 세계

사람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우리의 세계를 이룹니다. 이사를 하면 새로운 길이 나의 집으로 가는 풍경이 되고,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면 교실 안의 낯선 사람들이 어느새 나의 친구가 되고 라이벌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선택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모여 크고 작은 '나의 세계'를 이룹니다. 커다란 성공이나 누군가와의 만남은 순식간에 나의 세계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선택하여 지나온 길을 뒤 돌아보고 정말 옳은 길이었는지 당신을 후회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정인 작가는 이 책을 읽는 모두가 주어진 삶 속에서 마음껏 길을 잃으며 모험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헤매는 순간조차도 멋진 풍경의 조각이 되어 우리의 삶에 남을 테니 말입니다. 당신이 설령 실패한 선택을 하더라도 언젠가 타인의 실패를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하기도 하며, 자신의 경험으로 그들을 돕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문정인,

일상성의 회복

두 갈래길에서 네 갈래길로, 네 개의 길은 다시 두 개, 한 개의 길로 합쳐지며 주인공은 마침내 커다란 문 앞에 도달합니다. 그림책이라는 시공간에서의 여행을 마친 우리는 마침내 책이라는 ‘문’을 닫으며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해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2024년에 머물러 있는 기분입니다. 해결되지 못한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불안과 염려, 공포와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일상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분열되고 갈라진 관계의 조각들과 누군가의 깨어진 일상의 파편들을 매일 우리의 주변에서 마주하고 매스컴과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시됩니다. 모두에게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단’하여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이토록 불안하고 염려스러운 순간을 이겨내고 회복하는 과정 역시 언젠가 '나의 세계'를 이루는 풍경의 조각이 되어 우리의 삶에 깊이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한기현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