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반(反)민주적인가?

시장 민주주의의 불가능성

2025-01-31     낸시 프레이저 | 철학자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이는 제도, 소셜 네트워크, 개인주의 탓으로 돌려지곤 한다. 때로는 ‘극단주의의 급진성’이나 경제적 폭력 앞에서의 무력함, 이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경제와 정치의 분리를 기반으로 하며, 이는 본질적으로 반(反)민주적이다.

 

우리가 직면한 이 민주주의 위기는 단지 정치적 영역에서만 기원한 것이 아니다. 시민 의식을 새로 다지고, 양당제를 키우고, ‘민주주의적 정신’을 강화하고, ‘제헌 권력’을 되살리고, 아고니즘(agonisme, 대립적 다원주의)의 힘을 끌어내는 것만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지금 민주주의가 겪는 문제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단순히 부분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 질서 전체를 삼키고 있는 전반적인 위기의 정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치적 위기를 겪기 쉬운 자본주의

이러한 문제들은 이 질서의 근본, 즉 제도적 구조와 그것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에서 기인한다. 많은 관찰자가 이를 신자유주의라고 보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는 정치적 위기에 취약하고 민주주의와 충돌하기 쉽다. 그 안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위기는 우연히 발생한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된 모순이 필연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자본주의를 단순히 경제 체제로만 보고, 자본주의의 위기를 경제적 문제로만 보면 다른 모순들과 그로 인한 위기들을 놓치게 된다. 이윤 극대화, 효율성, 비용 절감 등 일련의 경제적인 요구가 비경제적인 배경 조건들과 부딪칠 때가 있는데, 이러한 배경 조건들이 건강해야 자본 축적이 계속될 수 있다.

이런 조건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지금의 민주주의 위기를 일으킨 가장 큰 모순은—물론 다른 문제들과도 얽혀있지만—공권력과 관련이 있다. 공권력의 유지는 자본의 지속적 축적의 조건이지만, 자본은 자신이 의존하는 바로 그 공권력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자본 축적은 사기업과 시장 거래를 보호하는 법적 틀이 없으면 생각할 수도 없다. 재산권을 보장하고 계약을 이행하며, 분쟁 해결을 위해 반란을 진압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불화를 관리하고 통화 체제를 지원하며, 위기의 예방과 관리를 위한 조치를 취하고, 마지막으로 시민과 ‘외국인’을 구분하는 차등적 지위를 법제화하고 적용하기 위해 자본 축적은 공권력에 크게 의존한다.

법적 체계는 겉으로 탈정치화된 공간을 만들어냈고, 이 안에서 사적 행위자들은 정치적 간섭 없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추구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영토 국가들은 정당한 폭력을 동원하여 자본주의적 소유 체계를 확립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했으며(특히 식민지적 방식으로 이루어진), 수탈에 대한 저항을 진압했다.

정치권력은 이렇게 자본주의 경제를 구성한 후 자본의 이윤 축적 능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기반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했으며, ‘시장 실패’를 보완하고, 발전을 이끌며, 사회적 재생산을 촉진하고, 경제 위기를 완화하며, 관련된 정치적 여파를 관리했다.

이러한 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 질서는 자본의 순환이 원활하게 작동되도록 조직되었다. 이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제법 및 초국가적 체제 그리고 자연 상태로 여겨지는 세계 공간, 즉 국가들 사이의 관계가 마치 자연 상태처럼 무질서하고 규제되지 않은 상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늘 자본의 이익을 위해 다양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강대국들간의 협정과 같은 초국적 장치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정치권력은 제도화된 사회 질서인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정치권력의 유지는 자본 축적의 요구와 지속적인 긴장 관계에 있다. 이러한 긴장은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분리하는 자본주의 고유의 제도적 구조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반민주적

생산을 조직하는 권력은 사유화되어 자본에 위임된다. ‘비경제적’ 질서들—축적의 외부 조건들을 제공하는 것들을 포함하여—을 통치하는 과제는 ‘정치적’ 수단, 즉 법을 사용해야 하는 공권력에 맡겨진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경제적인 것은 비정치적이며, 정치적인 것은 비경제적이다.

이러한 분리는 사회생활의 광범위한 측면들을 ‘시장의 법칙’(즉, 대기업들)에 종속시킴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지, 어떤 에너지 원칙에 따라, 어떤 종류의 사회관계 속에서 생산할 것인지를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는다.

또한 집단적으로 생산된 ‘사회적 잉여’(생산 활동의 결과로 생성되는 초과 자원이나 부가가치-역주)의 사용, 자연 및 미래 세대와 맺고자 하는 관계, ‘사회적 재생산 노동’(단순히 경제적 생산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유지하고 다음 세대를 양육하며, 사회를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노동-역주)의 조직과 그것의 생산과의 관계를 결정할 수단도 빼앗는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반민주적 속성을 갖는다. 또한 자본은 공권력과 관련하여 양면적인 태도를 보인다. 법적 체제, 억압적 힘, 기반 시설, 규제 기관 등 공권력에 의존하고 기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윤 추구의 본성으로 인해 자본가 계급 일부가 정기적으로 국가에 저항하거나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들은 시장이 국가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국가를 약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단기적 이익 추구가 장기적 생존을 압도하게 되면, 자본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정치적 조건들조차 파괴할 위험에 처한다. 이러한 모순은 경제 ‘내부’가 아니라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고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에서 위기를 초래한다. 이러한 ‘통치체제 간’ 모순은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것으로,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를 정치적 위기로 몰아넣는다.

분명히 할 것은 ‘그 자체로서의’ 자본주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특정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기반해 다양한 축적의 방식이나 체제로만 존재해왔다. 그리고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논쟁과 수정을 통해 변화한다. 위기 상황에서는 이 경계가 사회적 갈등의 중심이 되며, 사회적 행위자들이 투쟁을 통해 경계를 변경하기도 한다.

따라서 20세기에 ‘자유방임’ 체제를 이어받은 국가 관리 자본주의는 위기를 억제하거나 늦추기 위해 공권력을 활용했다. 1945년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미국 헤게모니 하에 자본 통제 시스템이 수립되면서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자본을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규율했다. 동시에,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계층들의 시민권을 재평가하고 그들을 체제에 참여시키는 조치를 통해 정치적 행동의 영역을 확장하면서도 동시에 길들였다. 

이로써 수십 년간 안정성이 회복되었으나, 중심부 제조업에서 임금 상승과 생산성 향상이 일반화되자 자본은 시장을 정치적 규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새로운 좌파는 전체 구조를 지탱하는 억압, 배제, 약탈을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고발했다. 이어진 긴 위기 속에서 조용히 현재의 금융화된 자본주의 체제가 도래했다. 자본주의 체제는 다시 한번 관계를 재구성했다. 중앙은행들과 세계 금융기관들이 점점 더 세계화되는 경제의 중재자로서 국가들을 대체했다. 이제 그들이 노동과 자본, 시민과 국가, 중심부와 주변부, 그리고, 무엇보다도,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주요 규칙 대부분을 결정한다. 과거에는 국가들이 지속적인 축적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위해 사기업의 단기적 이익 추구를 허용했다.

 

금융화된 세계 금융기관이 국가를 대체

반대로, 현재의 체제는 금융자본이 사적 투자자들의 즉각적인 이해관계(이익추구)를 위해 국가와 시민들을 구속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는 이중의 타격이다.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던 국가 기관들이 그들의 요구에 점점 더 응하지 못하게 되었고, 중앙은행들과 세계 금융기관들은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지만, 투자자들과 채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뿐이다.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정부 없는 거버넌스’의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수준에서 국가 권력의 실질적 내용을 비우는 주요한 효과를 가져왔다. 한때 민주적 정치 행동의 영역으로 간주 되었던 문제들이 이제는 ‘시장’에 맡겨진 ‘보호 영역들’이 되었다.

자본의 조력자들은 2015년 그리스에서 긴축을 거부하는 선거나 국민투표를 무효화하는 것처럼, 국가 권력이나 이에 도전하는 정치적 힘들을 공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른바 ‘민주주의의 결핍’은 사실 금융화된 자본주의 전반에 걸친 본질적인 위기의 일부이다. 하지만 축적 회로의 정체나 통치 체계의 막힘 자체는 엄밀히 말해 ‘위기’로 간주될 수 없다.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겪는 심각한 어려움이 기존 질서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질서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결정적 다수가 이 질서는 집단적 행동으로 변화될 수 있고 또 변화되어야 한다고 결정할 때, 객관적 교착상태가 주관적 목소리를 얻을 때, 우리는 비로소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주요한 역사적 전환점’이라는 의미에서 ‘위기’라고 부를 수 있다.

 

‘헤게모니’의 전환 가능성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상황이다.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정치적 기능장애는 이제 더 이상 주관적 상관물, 즉 단순히 객관적인 상태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자각과 반응으로 이어졌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불만을 겪는 노동자 계급에게 이민자, 인종적·종교적 소수자, 그리고 글로벌 자본 등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나라를 ‘되찾겠다’는 메시지를 던져, 그들의 지지를 성공적으로 얻어냈다.

좌파 대응 세력은 ‘99%’를 대변하며, ‘억만장자 계급’을 편애하는 ‘조작된’ 체제에 맞서 싸우며 시민사회에서 중요한 돌파구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좌우 양측의 포퓰리스트 물결의 등장은 주요한 사회적 격변을 나타낸다.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상식의 환상이 손상되면서 정치적 성찰의 가능성과 논의의 영역이 더욱 확장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이는 단순한 체계적 교착 상태를 넘어, 경제와 통치 사이의 경계를 둘러싼 공개적 갈등이 촉발한 진정한 ‘헤게모니 위기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계획이 경쟁적 시장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이러한 흐름은 공권력의 필요성을 명확히 보여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만약 우리가 합리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면, 신자유주의는 이제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해방의 외피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 즉 정의상 비합리성으로 물든 세계에 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가 신속히, 또는 충돌 없이 해결될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지지자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무대 위에 선 그들은 이러한 문제를 만든 배후 세력의 허수아비일 뿐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의 사기행각를 폭로하기 위해 커튼을 걷어내지 않는 한, 이 상황은 지속될 수 있다. 이는 바로 진보적 반대파가 해내지 못한 점이기도 하다. 커튼 뒤의 권력을 폭로하기는커녕, ‘저항’의 주류 흐름은 오래전부터 그러한 권력과 타협해 왔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여성주의, 반(反)인종차별, LGBTQ(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퀴어) 권리, 환경 보호를 지지하는 사회운동의 자유주의-능력주의적 진영이 그 예이다. 자유주의적 헤게모니 아래에서 이들은 세계 자본주의의 ‘비전 있는’ 일부 지점(정보기술, 금융, 미디어, 엔터테인먼트)도 포함된 진보적 신자유주의 블록에서 오랫동안 2선의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들 역시 다른 방식으로 허수아비 역할을 했는데, 신자유주의라는 약탈적 정치경제에 해방적 카리스마의 외피를 씌우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동맹은 여성주의, 반인종차별 운동 등이 신자유주의와 깊이 결합되도록 만들어, 많은 이들이 결국 신자유주의와 함께 이들 운동까지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지금까지 주요 수혜자는 반동적인 우파 포퓰리즘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퇴행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적인 두 허수아비 집단 간의 가짜 논쟁이며, 커튼 뒤에서는 권력자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사회생활의 형태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손에 닿을 듯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누가 사회 변혁의 과정을 이끌었고, 누구의 이익을 위해, 또 어떤 목적을 위해서였는가? 이런 과정은 과거에 여러 번 시작되었었다—하지만 주로 자본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갔었다.

이것이 다시 일어날까?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가볍게 건너뛰고 도덕적 교훈만을 고수하고, 그들의 정당한 불만(비록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더라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헤게모니 구축을 위한 투쟁을 놓치게 된다. 이는 진정한 범인을 찾아내고, 자본주의라는 기능 장애적이고 반민주적인 질서를 해체해야 하는 도전 과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글·낸시 프레이저 Nancy Fraser
『자본주의는 식인주의다』의 저자(2025년 1월 15일 아곤 출판사 출간 예정, 이 글은 해당 책을 바탕으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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