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장기독재 붕괴 후의 시리아는 어디로?
새로운 실세로 부상한 알샤라아의 실용주의 노선
모든 전쟁은 끝이 있기 마련이다. 2011년부터 시리아를 폐허의 수렁으로 몰고 갔던 내전은 1969년부터 이어온 아사드 가문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리면서 일단락되었다. 이번 격변에서 튀르키예가 최대 승자로 부상한 가운데, 러시아와 이란을 중심으로 한 아사드 정권의 국제적 지지 세력들이 보여준 소극적 태도는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특히 시리아에 막대한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해왔던 이들 국가가 아사드 정권의 몰락 과정에 제한적으로만 개입한 것은 국제 정세의 새로운 변화를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신께 찬양을! 폭군이 도망쳤다!”
2024년 12월 7~8일 사이 시리아 당국의 공식 확인도 없이 이 소문이 아랍권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져 나갔다.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목적지도 숨긴 채 나라를 떠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그가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로 망명했다고 한다.
수 시간 동안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도 경계심과 의구심이 교차했다. 시리아국민군(ANS) 병사들이 수도 외곽을 승리의 행진으로 진격하는 영상은 이미 퍼지고 있었고, 이들 ANS는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 레반트 해방기구)과 함께 아사드를 축출한 두 주요 조직 중 하나이다. 불확실성은 곧 사라졌다. 반대파들에 대한 24년 반의 무자비한 통치 끝에, 1971년부터 2000년까지 시리아에서 대통령을 지낸 아버지 하페즈의 후계자가 거의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도주한 것이다.
부패해진 시리아 국가기관들, 아사드 정권 몰락 부채질
혼란스러운 중동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이 정권 붕괴의 여러 원인을 이해하면 현재의 지정학적 상황 속에서 그 결과를 가늠해볼 수 있다. 특히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레바논에서 저지른 대규모 학살과 파괴, 헤즈볼라와 하마스의 패배,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짧은 미사일 교전, 그리고 지난해 11월 국제형사재판소(ICC)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그의 전 국방장관 요아브 갈란트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한 상황에서 말이다.
시리아에서 알 아사드 몰락의 주된 원인 중 하나는 국가기관의 지속적인 부패였다. 2011년 민중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한 이후에도, 시리아의 알 아사드 대통령은 우방국인 러시아, 이란, 헤즈볼라는 물론, 미국, 튀르키예, 이스라엘과 같은 경쟁국과 적대국들의 군사적 개입을 막아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시리아의 국가 주권은 크게 훼손되었다.(1)
여기에 북부의 쿠르드족, 동부의 이슬람 국가(IS), 북서부의 지하디스트 연합(이들립 지역) 등 외부의 세력들의 시리아 영토 장악이 번졌다. 시리아 국가의 이런 와해는 수년에 걸쳐 행정과 군사 조직의 붕괴로 이어졌다.
아이의 학교 등록과 같은 일상적인 일조차 뇌물이 필요했고, 저임금에 시달리는 시리아군 장교들은 군장비와 군수품 연료를 암시장에 팔아넘기는 등 조직적인 밀매까지 벌였다. 이렇게 심각한 주권 침해는 전체 국토 수복이라는 모호한 구호 외에는, 국민 통합을 위한 어떠한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던 아사드 정권의 취약성을 더욱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결국 아사드 정권의 정통성과 통치 기반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았다.
돈독에 눈먼 충성파들, 마약 캡타곤 생산으로 자멸
2011년 봄, 알 아사드는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의 여파로 일어난 평화 시위에 맞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발발한 시리아 내전으로 5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600만 명의 시리아인이 국외로 피난했다. 전체 인구 2,300만 명 중 700만 명이 시리아 내에서 실향민이 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해 3월 30일 의회 연설은 이후 벌어질 폭력과 혼란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질서 교란 세력’을 향한 위협과 외세 음모론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가운데, 권력에 대한 아부성 청원이 쏟아졌고 시리아 의원들과 관료들은 조국이 아닌 “사랑하는 바샤르”를 위해 “피와 영혼”을 바치겠다며 아첨을 일삼았다.
이러한 정실주의와 더불어 아사드 대통령 측근의 국가 재산 약탈, 망명자와 실향민 재산 강탈, 공무원과 보안군의 협박과 밀고 강요는 이 정권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러시아와 이란에 대한 종속으로 약해진 아사드는 동생 마헤르나, 어머니 쪽 친척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마클루프 가문 등 측근들의 탐욕과 타협해야만 했다.
1990년대 초 아사드 부친 치하의 시리아에는 이미 10여 개의 보안기관이 난립했다. 30년이 지난 현재는 그 수가 두 배로 증가했고, 권력의 각 부문과 유력 인사들은 저마다의 비공식 무장 세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들은 마음대로 사람을 납치하고 금전적 이해관계 때문에 다른 조직과 무력 충돌도 불사했다.
중동과 아라비아 반도 전역(2)을 휩쓸고 있는 향정신성 약물 캡타곤의 생산기지가 급증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향정신성 약물은 개인적 치부와 무기 조달을 위해 손쉬운 수단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랫동안 견고한 것으로 여겨졌던 아사드 체제의 결속을 무너뜨린 독이 되고 말았다.
허상이 된 아사드의 오만, 동맹국들의 연이은 이탈
아사드 정권에 충성한다는 세력들이 시리아에서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지난해 11월 27일 고작 300여 명의 지하디스트들이 시리아 북부 핵심지역인 알레포를 장악한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는 아사드의 동맹국들이 시리아를 완전히 버리게 된 붕괴의 전조였다.
하지만 아사드 정권은 국제적 신뢰도를 겨우 회복하면서 최대 위기는 넘긴 것으로 허세를 부렸다. 이에 앞서 2023년 5월, 시리아는 12년 만에 아랍연맹 복귀를 이뤄냈다. 당시 아사드 대통령은 시리아 재건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하며 걸프 군주국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서방 국가들이 유럽 내 시리아 난민 송환 협상 등을 위해 다마스쿠스 주재 대사관 재개설을 발표했다.
시리아 정권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해온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조차 여러 차례 시리아 대통령과의 회담 의지를 표명하며 화해 가능성을 시사했다. 하지만 아사드는 여전한 오만함으로 튀르키예군이 시리아 영토를 점령하고 있는 한 어떤 대화도 불가능하다며 일축했다.
한편 가자지구와 레바논에서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란은 시리아라는 동맹국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수렁에 빠진 러시아 입장에서도 아사드 정권은 시리아의 타르투스 해군 기지를 통한 지중해 진출, 흐메이밈 공군 기지를 통한 군사력 투사 능력을 보장해주는 중요한 존재였다.
러시아의 전략적 후퇴
아사드 정권은 왜 2013년처럼 이란과 헤즈볼라의 구원을 받지 못했을까? 또 푸틴은 왜 2015년과 그 이듬해 알레포를 유혈 진압할 때처럼 러시아 공군의 개입을 명령하지 않았을까? 이는 상황과 의지, 그리고 수단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2022년 2월 이후 우크라이나에서의 소모전으로 러시아군의 재래식 전력과 병력 대부분이 묶여있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협상을 밀어붙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서방과 우크라이나가 협상 전 세력 균형을 바꾸려 안간힘을 쓰는 상황에서, 푸틴이 러시아군의 일부 전력을 시리아로 돌리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러시아는 이미 2년 전부터 아사드가 시리아에서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특히 북부 이들립 지역의 지하디스트 연합군이나 로자바의 쿠르드족과 실질적인 협상을 진전시키지 못하는 것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아사드의 절박한 지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개입을 가로막았다.
대다수 국제 언론이 이를 모스크바의 심각한 타격으로 평가했지만, 러시아는 시리아 반군 세력의 후원국인 튀르키예와의 협상을 통해 손실을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다마스쿠스 ‘해방’ 이후의 혼란 속에서도 이란 외교공관과 달리 러시아 공관은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HTC의 수장이자 시리아의 새로운 실세로 부상한 아흐메드 알샤라아(내전 중 이름 아부 모하마드 알줄라니)는 몰락한 독재자의 후견인을 자극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했고, 푸틴이 보낸 특사들과의 만남도 받아들였다. 시리아의 타르투스와 흐메이밈 군사기지가 앞으로도 러시아의 영향권에 남을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리아 문제에서 러시아가 그 어느 때보다 튀르키예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체제 불안정의 이란, 시리아를 버린 이유
이란의 경우도 비슷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슬람 공화국 역시 아사드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이미 2018년 12월부터 이란이 시리아 지도부 교체를 원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2012년 이후 매년 50억 달러에 달하는 재정 지원을 해온 이란의 압박에 직면한 아사드 대통령은 2010년 이후 처음으로 2019년 2월 이란을 방문해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고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에게 신뢰를 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2024년, 이란은 결국 양보하지 않았다. 시아파와 가까운 알라위파 동맹자를 축출하는 대신 체제 보강을 선호했을 테지만, 결국 아사드에게 지친 이란 지도부는 서둘러 그의 실각을 인정했다.
이스라엘군의 헤즈볼라 타격으로 테헤란은 역내 대리 세력을 가동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설령 인적·물적 자원이 있었다 하더라도 레바논의 이 정파는 시리아 정권을 구원할 수 없었다. 수많은 지도자와 당원들이 목숨을 잃고 레바논 국민이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어떻게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겠는가?
남은 것은 이란의 자원을 동원하는 길뿐이었으나, 테헤란은 시리아 반군 세력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핵심적인 공군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란 보수 언론의 호전적인 사설들이 시사하듯, 이슬람 공화국의 최고위층은 이스라엘이 트럼프를 설득해 핵시설 공격이나 더 큰 규모의 전쟁을 일으켜 테헤란의 정권 교체를 시도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란 최고위층의 체제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샤 정권 붕괴 이후 첫 몇 달부터 나타난 이 공포는 이란의 국방 독트린을 형성해왔다. 그러니 이란이 상황을 개선할 의지조차 없는 동맹국 시리아를 구하기 위해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훨씬 컸다.
무너진 ‘시아파 축선’, 긴장이 고조되는 이란 관계
러시아의 경우처럼 아사드의 몰락은 이란에게도 실패였다. 이란은 그를 지원하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허비했을 뿐 아니라 수천 명의 혁명수비대원과 시아파 민병대원의 목숨도 잃었다.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북부의 시아파 공동체, 지중해 연안과 다마스쿠스의 알라위파 공동체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알라위파는 이제 수니파 계열의 전직 지하디스트들에게 권력을 잃었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을 연결하며 시아파 영향권을 의미하는 ‘시아파 축선’은 이제 무너졌다.
많은 수니파 급진주의자들에게는 이스라엘을 비롯한 다른 적들과 맞서기에 앞서 시아파 이단 척결이 우선이다. 알샤라아가 외신에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동료를 설득해 테헤란과의 갈등을 막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대외 부채 문제(다마스쿠스는 주로 연료와 무기 공급과 관련해 후원국에 500억 달러를 빚지고 있다)뿐만 아니라, 다마스쿠스 수크(시장)의 이란 상인들이 소유한 상점들과 같은 민간 경제 이권도 걸려있다. 새 정권을 지지하는 다마스쿠스 시민은 이미 강한 반(反)이란 정서를 드러냈다. 앞으로 수개월 내에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이 있다.
이라크는 이제 사실상 이란의 지역 방어 전초기지가 되었다. 앞으로 몇 달간 테헤란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른 이라크 내 영향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이다. 미국은 2024년 1월, 친이란, 즉 반미 민병대들이 이라크 내에서 별도의 국가를 만들어가는 현상에 대해 바그다드 중앙정부에 경고한 바 있다.(3)
튀르키예의 영향력 확대, 불투명한 쿠르드족의 운명
테헤란이 이라크에 더욱 집중하면서 새로운 긴장이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IS가 바그다드 진격을 위협하던 시기에 조직된 이들 민병대는 지하디스트들의 잠재적 침투를 차단하기 위해 시리아-이라크 국경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있다.
시리아 정세에서 튀르키예는 가장 큰 승자로 부상했다. 2020년 러시아-튀르키예 협상으로 이들립 거점에 고립된 HTC 부대의 완전한 패배를 막을 수 있었다. 아사드는 시리아 반군의 마지막 세력을 신속히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지만, 현재 이들은 다른 조직들과 연합하여 다마스쿠스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로써 튀르키예는 자신에게 빚진 대화 상대를 얻게 되었다.
튀르키예 내 시리아 난민 문제는 최우선 과제 중 하나다. 300만 명에 달하는 시리아 난민들의 신속한 귀환을 바라는 에르도안에게 이들의 존재는 심각한 국내 정치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9일, 튀르키예 당국은 어떤 합의도 없이 국경 검문소 재개방을 지시했다.
상당수 시리아 난민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되지만, 영토 문제는 알샤라아가 앙카라의 꼭두각시로 낙인찍히지 않는 한 해결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튀르키예군은 이미 시리아 영토 곳곳을 점령했을 뿐 아니라, 쿠르드 인민수비대(YPG, 민주연합당)를 축출하기 위해 준자치 지역 로자바 공격도 준비하고 있다.
자치주의자들과의 평화적 협상을 공언한 다마스쿠스의 새 실세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또 IS 격퇴전에서 쿠르드족과 동맹을 맺었던 미국은 트럼프 취임 후 어떤 입장을 취할까? 첫 임기 때인 2019년 10월, 트럼프는 쿠르드족이 “2차 대전에서 미국을 돕지 않았다”는 그릇된 주장을 하며 아직도 독립 국가를 갖지 못한 이 민족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무시했다.
시리아 북동부에 약 1천 명의 병력을 주둔시킨 미국은 현재로서는 튀르키예의 로자바 공격을 만류하고 있지만, 아사드 정권 붕괴로 인한 불확실성이 에르도안의 군사 행동을 부추기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탈(脫)살라피화’는 했지만, 여전한 정체성 논란
앞서의 여러 전망은 다마스쿠스에 수립된 새 정권의 실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때 칼리프 정권 수립을 위해 국경과 국가 체제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던 지하디스트 성전 투사들이었던 HTC 구성원들은 이제 ‘민족주의적 종교’ 노선을 표방하며 알카에다나 IS 같은 조직들과 결별했다고 주장한다.
이전에는 전 세계 무슬림에게 이슬람법을 적용하려 했던 것과 달리, 이제 알샤라아는 샤리아(이슬람의 종교 율법)를 오직 시리아 내에서만 적용되는 국내법 차원으로 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이념적, 신학적 노선 변화를 둘러싸고 이슬람주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전체 인구가 8%에서 2%로 급감한 시리아 기독교인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HTC 수장의 약속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 전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세력들이 주창하는 국제 지하드와 선을 그었다는 그의 발언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다만 다양한 공동체가 공존하는 이들립 지역을 통치한 경험이 알샤라아를 더욱 실용주의자로 만들었고, 뚜렷한 탈급진화를 이끌어내거나 심지어 ‘탈살라피화’(초기 이슬람 시대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적 교리를 뜻하는 살라피즘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이고 유연한 종교 해석을 받아들이는 변화를 의미)까지 이루게 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4)
새로운 도전, 이슬람주의와 민주주의
이런 실험이 전국적으로 확장될 수 있을지는 시간이 답해줄 것이다. 현재로서는 서방 국가들이 HTC를 신뢰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특히 HTC 지도부가 시리아 영토 일부를 점령하고 주기적으로 폭격을 가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입장을 극도로 모호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이슬람주의 운동이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국가를 이끌어갈 수 있느냐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이런 세력들은 대부분 높은 선거 득표율이 보여주듯 민심을 얻고도 결국 권력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알제리(1992), 이집트(2013), 튀니지(2021)가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과연 누가 알샤라아와 그의 운동을 몰아낼 수 있을까?
아사드 지지에 깊이 연루된 인사들이 숙청된 시리아군은 이제 재편될 것이며, HTC 산하 민병대를 비롯한 여러 무장 세력을 통합하게 될 것이므로 시리아에서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정치적으로도 이슬람주의 진영을 제외하면 HTC와 그 동맹들의 실질적인 경쟁자는 거의 없다.
한때 전능했던 바트당(아랍어로 ‘부흥’을 의미)은 이제 아사드 독재의 상징이자 더는 설득력을 잃은 범아랍주의를 표방하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유일한 위협은 이슬람주의의 극단화뿐이다. 동부에서 IS는 여전히 건재하며, HTC의 실용노선에 등을 돌린 극단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 시리아는 다양한 실험의 무대가 될 것이다. 국가 재건이라는 시급한 과제, 새로운 군대 창설, 그리고 아직도 국제 체포 대상 지하디스트 명단에 올라있는 이슬람주의자들의 권력 장악이 그것이다. 만약 이들이 팔레스타인이나 레바논, 모로코 출신이었다면, 서방은 지금도 이들을 맹비난했을 것이다.
글·아크람 벨카이드 Akram Belkaïd
언론인
번역·아르망
(1) 장 미셸 모렐, 「시리아, 새로운 아틀란티스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3월.
(2) 클레망 지봉, 「캡타곤, 걸프 지역을 휩쓸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7월.
(3) 아델 바카완, 「이라크에서 커지는 민병대의 영향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10월.
(4) 실뱅 시펠, 파트릭 해니, 사라 그리라, 「시리아.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 이념적 변화의 투시」, 2024년 12월 16일, https://orientxxi.info
폐허로 전락한 시리아 경제 시리아 경제의 붕괴가 바샤르 알 아사드의 몰락을 앞당겼다면, 이제 다마스쿠스 새 정권에게 경제 재건은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우리는 산업, 무역, 군대, 행정 등 모든 분야가 산산조각 난 나라를 물려받았습니다”라고 아흐메드 알샤라아는 밝혔다(<프랑스24>, 2024년 12월 17일). 앞으로의 과제는 아찔하기만 하다. 13년의 내전으로 생산 기반이 무너졌고, 시리아 파운드화가 폭락했으며, 멈추지 않는 인플레이션으로 시리아 국민 3분의 2 이상이 빈곤으로 내몰렸다. 국제 제재의 압박과 세계 최악의 부패 정권이 자행한 약탈로 피폐해진 시리아의 경제는 이제 대부분 비공식 부문에 의존하고 있다. 올봄 세계은행은 2010년에서 2023년 사이 84%나 감소한 시리아 국내총생산이 고작 62억 달러에 불과하다고 추산했다. 전문가들은 시리아 재건에 최소 수천억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1) 시리아의 이런 빈약한 경제 규모를 생각하면, 몰락한 아사드 정권이 캡타곤 밀매로 매년 벌어들인 20억 달러의 불법 수익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아흐메드 알샤라아는 이 합성 마약의 생산을 근절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하나의 도전 과제는 석유 산업의 재건이다. 테헤란이 그동안 시리아의 생명줄 역할을 해온 공급선을 끊어버렸다. 석유 지대를 안전하게 확보하고 산업을 재건하는 데는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큰 수익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시리아 내전 발발 전인 2010년, 시리아의 하루 평균 원유 생산량은 38만 5천 배럴―현재는 8만 배럴―이었지만 이는 세계 총생산량의 0.5%에 불과했고, 확인된 매장량도 세계 전체의 0.2%를 넘지 않았다.(2)
글·앙젤리크 무니에-쿤 Angelique Mounier-Kuhn 번역·아르망 (1) Syria Economic Monitor, 「2024년 봄: 갈등, 위기, 그리고 가계 복지의 붕괴」, 세계은행, 워싱턴 DC, 2024년 5월 2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