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간 지속된 알제리 동족상잔의 그늘

독립운동가 메살리 하지의 뒤늦은 복권(復權)

2025-01-31     셀림 데르카위 | 저널리스트

프랑스는 최근 1957년 3월 알제 전투 당시 독립운동 지도자 라르비 벤 음히디의 암살에 대한 자국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러한 인정이 알제리 전쟁의 수많은 미확인 사실들에 대한 베일을 벗기고 있지만, 민족해방전선(FLN)과 알제리민족운동(MNA) 사이의 동족상잔 분쟁과 같은 다른 사건들도 여전히 조명될 필요가 있다.

 

역사는 항상 승자에 의해 쓰인다. 이 유명한 격언은 알제리 독립투쟁의 주역들도 예외가 아니다. 1962년 에비앙 협정(프랑스 정부와 알제리 임시정부 사이에 체결한 알제리 전쟁 정전협정-역주) 이후, 알제리는 민족해방전선(FLN)의 주도로 프랑스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잊힌 혁명가, 알제리민족운동(MNA)의 지도자 메살리 하지

독립 직후, FLN은 알제리 전쟁(1954~ 1962) 중에 대립했던 경쟁 세력인 알제리민족운동(MNA)을 금지했다. 1927년부터 독립을 위해 싸웠던 혁명적 인물 메살리 하지는 1974년 망명지에서 사망할 때까지 MNA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였다.(1)

알제리 독립전쟁 동안 소외되고, 이후 아메드 벤 벨라(알제리의 독립운동가이자 독립 후 초대 대통령)와 후아리 부메디엔(독립 후 2대 대통령) 정권에 의해 고국으로의 귀환을 금지당한 메살리 하지의 이름은 여전히 격렬한 긴장의 원인이며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언제든 되살릴 수 있는 도화선이다.

MNA 지지자의 손자이자 역사학자인 네집 시디 무사는 메살리 하지에 대한 중요 저서(2)의 저자로서 “왜 MNA의 기억을 은폐하는가?”라고 묻는다. “알제리 민족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에 기여한 MNA의 긍정적 가치는 고려하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FLN의 폭력적 경쟁 대상으로만 언급되고 있다. 많은 알제리인에게 메살리 지지자들은 프랑스 부역자인 ‘하르키’로 인식되었다. 이는 명백한 오류다.”

 

메살리 지지자들의 이중적 정체성

93세인 이디르 부제밀은 메살리의 옛 충신이다. 1953년 프랑스에 도착한 그는 MNA의 전신인 ‘민주적 자유의 승리를 위한 운동(Movement for the Triumph of Democratic Liberties, MTDL)’에 회비를 냈고, 이 정당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파리 지역과 프랑스 북부에 있는 공장에서 일했다.

당시 많은 알제리 노동자들은 프랑스 북부, 동부, 리옹 분지에 위치한 르노나 시트로엥 같은 공장에서 일했다. 그들은 노동총동맹(CGT)이나 공산당(PC)과 유대를 맺었고, 이는 그들의 활동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이처럼 알제리 노동자들은 프랑스에서 일하면서 오히려 독립의식이 강화되었다.

“메살리 하지 지지자들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알제리계 프랑스인들의 노동자이자 이민자로서의 궤적을 추적하는 것이다. MNA는 프랑스의 노동 현장의 분포도이자 이민 역사의 한 장이다”라고 시디 무사는 주장했다.

“과거 MNA 활동가들은 프랑스를 적대했다기보다는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고 증언한다. 특히 FLN과 달리, MNA는 유럽계 민간인을 테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큰 차이가 있다. MNA 지도부가 프랑스와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중요하게 여긴 반면, FLN 지도부는 이러한 고려 없이 행동했다.”

 

내부 반란 속에 FLN으로 권력 이동

1954년 메살리 하지는 MTDL 중앙위원회의 주요 인물들이 주도하는 내부 반란에 직면했다. 양측 모두를 거부한 젊은 활동가들은 FLN을 창설하고 무장투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방심했던 메살리 하지는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봉기를 막지 못했다.

그가 이 봉기를 주도하지 않았고 FLN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당국은 메살리 하지를 공격했다. 그는 연이어 가택연금 되었고 그의 지지자들은 수십 명씩 체포되었다.

프랑스 대부분 지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무작위 검문, 학대, 강제 추방, 주민 이주, 고문 등의 행위를 수반했다. 이처럼 ‘타우라’(혁명)는 알제리인들의 눈에 점점 더 정당화되는 경향이 보였다.

FLN이 마키(저항군)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동안, 메살리 진영은 MNA를 창설했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많은 알제리인들, 특히 학생들이 FLN에 합류했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와 같은 국제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은 FLN은 군사 조직인 민족해방군(ALN)을 창설하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패권을 장악한 FLN은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았고 다른 모든 정치 세력이 자신들의 깃발 아래 모이기를 요구했다.

 

두 조직 간의 동족상잔, 파리 카페에서 시작된 비극

바로 이런 맥락에서 FLN과 MNA는 동족상잔의 투쟁을 벌이게 된다. 알제리에서는 FLN이 매우 빠르게 우세를 점했고, 1957년 5월 믈루자 마을 주민 학살과 같이 친MNA로 알려진 민간인들에 대한 만행까지 벌였다.(3)

본토 프랑스에서는 메살리 하지가 알제리 노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매우 인기가 있었지만, FLN은 자신들을 인민의 유일한 대표자로 주장하면서, 회비를 독점하기 위해 프랑스 전역에서 메살리 지지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총격전, 보복 살인, 간부와 지도자 살해, 메살리 지지자들 간의 배신 등이 이어졌다. 많은 알제리인들이 소유한 카페들 또한 주요 표적이 되었다.

식민지 시기, 카페 등의 시설들은 프랑스 내에서 사회적, 정치적 장소의 역할을 했다.(4) 전략적으로, 이 카페들은 회원 모집, 회비 수금, 회의 개최를 가능하게 했다. 오늘날 일부 카페들은 여전히 알제리계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지만,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된 라탱 지구의 MNA 본부처럼 대부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MNA의 최후와 잊혀진 희생

‘카페 전쟁’에서 오랫동안 열세였던 FLN은 결국 승리를 거두었고, 프랑스 내 알제리 인구에 대한 지배권을 점진적으로 확보했다. 파리의 구트도르 지구를 비롯해 파리와 마르세유에서 소수파였던 MNA는 완전히 제거되었다. 사회당 지자체들이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프랑스 북부, 동부, 서부 지역에서는 MNA가 더 오래 저항했다.

이 동족상잔의 투쟁은 1956년 1월 1일부터 1962년 1월 23일 사이에 3,957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10만 223명의 희생자를 낳았다.(5) 오늘날 거의 모두가 사망했고, 아직 생존해 있는 마지막 메살리 지지자들은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그들 중 85세의 알리 아구니는 2020년 <아르테 TV>의 다큐멘터리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활동가 경력을 이야기했다.(6) 그는 아메드 벤 벨라가 독립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이 부분적으로 메살리 하지의 헌신과 노력 덕분이었다고 인정했다는 점을 회고했다. 벤 벨라는 메살리 하지의 묘소를 찾아가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1954년 MNA에 가입하였던 부제밀은 여전히 ‘북아프리카인들의 아버지’인 메살리 하지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으로 인해 FLN을 ‘배신자’로 규정하며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그는 1959년 두 운동 단체 간의 전쟁에 참여했고, 서독에서 FLN에 합류하기 위해 MNA를 떠난 탈주자를 살해했다. 벨기에 경찰에 체포된 그는 독일로 송환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모범수로 8년 후 석방된 그는 죄몽-슈나이더 공장에서의 일과 가족 사이에서 삶을 보냈다.

하지만 메살리 지지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결코 공개적으로 증언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글을 쓸 줄 모르는 프롤레타리아들이다. 또한 FLN이든 MNA든 이 식민지 역사는 선악의 이분법적 관점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자기검열도 매우 강하다”라고 시디 무사는 설명했다.

“일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선택했거나 침묵하라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은 파괴되고, 수용되거나 제거되었다. 그들은 독립을 위해 희생했지만, 협력자나 살인자로 몰려 독립에서 배제되었다. 그들은 평생 그로 인해 고통받았다. 독립을 앞두고 일부 활동가들은 마지막 메살리 지지자들을 추적하는 데 참여하고 자신들의 형제를 고발했는데, 이는 끔찍한 일이다.”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침묵과 고통

MNA가 알제리에서는 악마화되었지만, 프랑스에서는 특히 극좌파를 중심으로 정치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1970년대 젊은 연구자였던 역사학자 벤자민 스토라는 메살리 지지 활동가들에 관심을 가졌고 1978년 메살리 하지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나는 국제공산주의조직(OCI)의 트로츠키주의 활동가였기 때문에 MNA의 역사를 알게 되었는데, 독립전쟁 당시 혁명공산주의연맹(LCR)에 해당하는 트로츠키주의의 다른 분파가 FLN을 지지할 때 OCI는 MNA를 지지했다. 메살리 하지가 사망했을 때, 나는 피에르 랑베르(7)를 통해 그의 딸 자니나를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아버지의 문서들을 전해주었다.”

메살리 지지자들의 자녀들은 부모의 기억을 수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부제밀 씨의 35세 아들 카림이 이를 확인해주었다. “집에 그의 초상화가 너무 많아서 나는 메살리 하지가 내 할아버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보복이 두려워 그 시기에 대해 말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레니아 아우아덴 여사는 마르세유 출신으로 메살리 지지자의 딸이다. 그녀가 생후 6개월 된 아기였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비밀리에 살해되었다. “나는 7살 때 이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스페인인 이웃과 놀고 있을 때, 그가 ‘네 아버지는 펠라가(게릴라)들에게 죽었어, 잘됐지!’라고 말했다. 그는 부모에게서 이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이는 내 안에서 많은 것을 일깨웠다. 반항심과 고등학생 운동가로서의 열정,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싶은 욕구를. 아버지는 우리와 같은, 우리가 알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라고 그녀는 여전히 쓰라림과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회상했다.

이를 계기로 그녀의 글쓰기 욕구가 꿈틀거렸다. 그녀의 첫 소설 『네지마와 기욤』(Marsa, 2009)에서 자니나라는 인물은 메살리 하지의 딸의 이름을 따왔다. “취재를 통해 나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고통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다. 우리의 역사는 알제리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억압되었다.”

 

메살리를 기념한 알제리 공항, 마침내 역사적 복권

라흐다르 벨라이드는 <라 부아 뒤 노르(La Voix du Nord)>의 기자이자 추리소설 작가이며, 메살리스트 운동가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북부 광산에서 일하던 노동자로, 알제리 노동자 연합의 일원이었다. 그의 눈에 메살리 하지는 독립된 알제리의 대통령이 되었어야 할 진정한 ‘정신적 아버지’였다. 파리에서의 ‘카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라흐다르의 아버지는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벌이며 수감 생활을 겪었다.

“어렸을 적 루베에서 나는 메살리스트 비밀회의에 참석하곤 했어요. ‘운동의 순교자들’의 초상화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 운동가들이 프랑스 식민지 주민들에게가 아니라 FLN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죠. 그곳에서 노조 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FLN의 손에 들어간 알제리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알제리에 처음 여행 갔을 때, 아버지는 우리에게 절대로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역사를 통해 후회와 절망에 시달리며 트라우마를 겪었어요.”

다른 메살리스트의 자녀들처럼, 그도 아버지의 정치적 여정을 단편적으로밖에 알지 못했다. 라흐다르의 아버지는 대부분 말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의 도움으로 그는 『내 아버지, 그 테러리스트(Mon père, ce terroriste)』(세유 출판사, 2018)를 출간했다.

“그 후 나는 추리소설 작가가 되었고, 내 모든 책에는 이 갈등에 대한 언급이 들어갑니다. 하르키(프랑스 협력자)의 아들인 경찰관, 메살리스트의 아들인 기자 같은 이야기요. ‘카페 전쟁’은 서툰 악당들과 엉성하게 조직된 암살 사건들로 이루어진 장면들이죠.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한 장면 같아요!”

알제리에서 FLN은 메살리 하지의 이미지를 일정 부분 지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2011년,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틀렘센(Tlemcen) 공항에 메살리 하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승인하면서, 그는 암묵적으로 복권이 되었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형제간 전쟁의 유령이 여전히 메살리스트 후손들을 괴롭히고 있다.

 

 

글·셀림 데르카위 Selim Derkaoui 
저널리스트

번역·강은영


(1) 알랭 뤼시오, 「메살리 하지, 잊힌 알제리 민족주의의 아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2년 6월.
(2) 네지브 시디 무사, 「알제리, 독립의 또 다른 역사-메살리 하지 지지자들의 혁명적 궤적」, PUF, 파리, 2019년.
(3) 필리프 에르만, 「알제리 문제, 유엔 총회의 의제로 상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57년 10월.
(4) 마리-조엘 뤼프와 아레즈키 메트레프, 「이민에서 알제리 카페의 역할」, <옴므 에 미그라시옹>, 제1308호, 2014년.
(5) 프랑스 당국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6) 라파엘 브랑슈와 라파엘 르반도프스키, 「알제리를 위한 전쟁」, <아르테>, 2022년.
(7) 피에르 부셀(피에르 랑베르)로 더 잘 알려진 그는 1953년부터 국제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