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수감 여성들의 꺾이지 않는 저항

이스라엘 교도소안의 차별과 성폭력에 맞서

2025-01-31     엘렌 세르벨 외

2024년 12월, 이스라엘이 난민 캠프에 대한 폭격을 이어가던 가운데, 가자지구에 억류된 이스라엘인들과 이스라엘이 수감한 팔레스타인인들 간의 교환 문제가 휴전을 위한 논의의 핵심에 있었다. 비록 수는 적었지만, 여성들은 미성년자들과 함께 가장 먼저 석방되는 경우가 많았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전개한 운동은 특히 교육 활동을 기반으로 한 독특한 단결을 이루어냈으며, 이는 여전히 심각하게 분열된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과 뚜렷이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쁨의 환호성이 거실에 울려 퍼지고, 기다림에 지친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르며, 이웃들이 찾아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2023년 11월 말,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수년간의 이별을 끝내고 마침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소셜 미디어에는 이스라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팔레스타인 여성 156명이 석방되는 장면이 거의 실시간으로 공개됐다. 이들은 2023년 10월 7일 공격 때 납치되어 가자지구에 억류됐던 이스라엘인 110명과 맞교환된 것이다.

이 여성들 중에는 불과 몇 주 전에 체포된 이들도 있었고, 무려 10년 전부터 수감 되었던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 체포 이유도 모호했으며, 미성년자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감옥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핵심 수단이 되어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식민 정부는 두 개의 법체계를 병행 운용하며 민족에 따른 ‘법적 차별’을 만들어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차별이 있다. 팔레스타인인은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반면, 유대인 정착민은 일반 민사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식이다.(1)

 

‘법 앞의 불평등’, 이스라엘 식민 체제의 민낯

이러한 차별적인 원칙은 서안지구나 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인은 물론, 이스라엘 내에 거주하며 공식적으로 시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인들이나 해외 거주자에게까지 적용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집단 전체가 의심 대상으로 여겨져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되며, 이에 따라 ‘안보 구금자’ 신분으로 분류된다.

이를 근거로 이들은 ‘행정 구금’ 제도의 대상이 되는데, 이는 정식 기소나 재판 절차 없이 비공개된 사유를 근거로 무기한 구금할 수 있는 제도다. 심지어 변호인조차 구금 사유를 알 수 없다. 군사 판사의 단독 결정으로 6개월마다 무기한 연장될 수 있는 이러한 구금은 현재 3,4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남녀가 겪고 있다.(2)

1948년 이후 약 백만 명이 수감된 경험이 있으며, 이는 팔레스타인 남성 인구의 약 40%에 달하는 숫자다.(3) 이로 인해 모든 팔레스타인 가정에는 최소 한 명 이상의 수감자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시작된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의 투쟁

수감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직화했고, 이는 체계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최초의 투쟁은 1970년대에 시작됐다. 수감 환경 개선과 정치범 지위 인정이 주요 요구사항이었다(남성은 ‘아스라’, 여성은 ‘아시라트’라고 하며, 이 용어들은 전쟁 포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에는 감옥 안에서 문화적, 정치적 활동이 꽃을 피웠고, 이는 오히려 바깥세상의 투쟁에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제1차 인티파다(1987~1993년에 일어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반이스라엘 독립투쟁-역주)는 주로 전직 수감자들이 이끌었다.

오슬로 협정(1994~1995)으로 여성 수감자들은 전원이, 남성 수감자들은 대부분이 석방됐다. 350명의 남성만이 철창 안에 남아있었으나,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의 첫 테러 물결(1993~1998) 와중에 이슬람 정당 활동가들이 대거 수감되면서 그 수가 다시 늘어났다. 제2차 인티파다(2000~2005) 때는 정당 활동 경험이 부족한 새로운 세대의 수감자들이 등장했다.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경험 많은 지도부가 부족한 상황에서 수감자 운동은 힘을 잃어갔다.(4) 이러한 전반적인 흐름은 여성 수감자들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났지만, 이들의 운동은 와해를 더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여성 수감자들의 수는 적었다. 한 번에 수감된 인원이 100명을 넘은 적이 없으며, 이는 팔레스타인 수감자 전체의 3%도 되지 않는다.(5) 그러나 모두가 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점이 이들의 조직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뤄낸 성과는 대부분 주목받지 못했다.

 

주목받지 못한,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초기 수감 투쟁

1970년대 초기 여성 수감자들은 텔아비브 남부의 네베 티르자 교도소(아랍어로는 람레)에 수감되었다. 대부분 팔레스타인 좌파나 파타(1959년에 설립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조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무장투쟁과 정치적 외교를 병행하는 전략을 취함) 소속 활동가였던 이들은 남성 교도소에서 시작된 단식 투쟁에 동참하면서도, 자신들만의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교도소 당국이 강요하는 노역을 거부하고 이스라엘 일반 수감자들과의 분리 수용을 요구하는 불복종 운동을 조직했는데, 이는 자신들의 정치범 지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아이샤 오데가 있다. 나크바 당시 가족과 함께 라말라 근교의 작은 마을 데이르 지리르로 피난했던 그녀는, 어린 시절에 1948년 4월 9일의 ‘데이르 야신 학살’(이스라엘 독립 전쟁 당시 이스라엘 무장 단체인 이르군과 슈테른 갱단이 팔레스타인 마을을 공격하여 약 100명 이상의 주민을 학살-역주) 이야기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여학교 수학 교사였던 그녀는 처음에는 아랍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이 운동이 해체된 후에는 팔레스타인 해방 민주전선(FDLP)에 합류했다. 예루살렘의 한 슈퍼마켓에 폭탄을 설치한 혐의로 기소되어 1969년 두 번의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녀는 1979년 첫 포로 교환 때 석방되었다.

1980년대 초, 수감자 운동은 라우다 바시르와 같이 경험이 부족한 새로운 세대를 중심으로 재조직되었다. 오데와 같은 마을 출신인 바시르는 나중에 여성 수감자 대표가 될 이 선배를 롤모델로 삼으며 성장했다. 1985년, 두 번째 협정으로 감방은 다시 한 번 비워졌다. 1,150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석방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수감되어 있던 여성들 대다수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제1차 인티파다가 시작되면서 감옥은 다시 수감자들로 채워졌다. 1987년부터 1993년 사이에 약 3,000명의 여성이 수감 생활을 겪었다. 이때는 처음으로 정치 조직과 무관한 일반 시위 참가자들이나 운동가의 가족들까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사회적 배경과 정치 활동 경험을 가졌음에도 놀라울 정도의 결속력을 보여주었다. 1995년 오슬로 협정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텔아비브 북동쪽에 있는 하샤론 교도소장은 당시 약 30명 정도의 모든 여성 수감자들을 석방하겠다고 발표했다.(6)

 

 

여성 수감자들의 단결이 일궈낸 승리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군인의 피를 손에 묻혔다”는 혐의를 받은 7명만 제외하고 모두 석방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여성 수감자들은 단결된 모습으로 두 개의 감방에 모두 들어가 나오기를 거부했다. 16개월간의 저항 끝에 그들은 결국 승리를 쟁취했다. 1988년 25년형을 선고받았던 베들레헴 출신의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FPLP) 활동가 룰라 아부 다호는 “역사적인 승리였고,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놀랐죠. 점령군은 물론이고 팔레스타인 사회도 말입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제2차 인티파다 때는 체포가 급증해 2004~2005년에는 여성 수감자가 115명까지 늘었다.(7) 이 중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소속이 늘어나면서 운동 내부의 정치적 지형이 바뀌었다. 수감자들 간의 갈등도 잦아졌다. 교도소 당국은 이를 기회로 삼아 하샤론과 다몬 두 교도소에 정치적 성향별로 수감자들을 나눠 수용했다. 정파 간 갈등을 부추기고 정파를 뛰어넘는 연대를 무너뜨리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2008년 석방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이타프 알라얀 같은 인물들은 여전히 저항 운동을 통합해나갔다. 그녀의 행적은 현재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처음에는 파타 활동가였던 그녀는 1989년부터 19년에 걸친 여러 차례의 수감 생활 동안 이슬람 지하드 쪽으로 기울었고, 지금도 그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여성 수감자들이 점차 다몬 교도소로 수감되면서, 이들 중 단독 행동으로 체포된 사례가 증가했다. 체포 이유는 칼부림 시도(미수 포함), 면회 시 휴대전화 반입 시도, SNS 게시물 작성, 단순 시위 참가 등이었다. 정치적 의식이 부족한 수감자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은 투쟁의 경험과 노하우를 효과적으로 전수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팔레스타인 좌파 시민단체 출신인 샤자 오데와 키탐 사아핀, 이슬람 지하드의 모나 카단, 그리고 젊은 세대인 루바 아시, 엘야 아부 히즐레, 라얀 나세르, 라얀 카예드 등이 있다.
특히 뒤쪽의 네 명은 비르 자이트 대학(라말라) 학생들로, FPLP 계열 좌파 학생조직인 민주진보학생연대(쿠툽 알-툴라비) 활동으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2020년부터 2021년 사이 수개월간의 수감 생활 동안 여성 수감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재개를 주도했고, 수감자 운동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8)

 

교도소에서 글을 깨우치고 토론까지

교육 전통은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고학력 수감자들이 동료들에게 문맹 퇴치 수업을 했고, 책을 돌려 읽었다. 라디오는 감방에서 늘 켜져 있었고 정기적 토론도 이어졌다. 교도소 당국이 이런 비밀 활동을 발견할 때마다 통제는 더욱 강화됐다.

1994년 베들레헴 근교 마을에서 태어난 아말 알은 정착민을 공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군인들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은 뒤 2014년부터 2021년까지 수감됐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이런 제한을 피하고자 궁리했던 갖가지 방법들을 기억한다. 남편이 커피와 과자를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가족들이 직접 인쇄소에 가서 소설책 안에 교과서를 숨겼어요. 책 표지도 바꿔가면서요. 당국이 알아채기 전까지 이렇게 꽤 많은 책을 들여올 수 있었죠.”

수감자들이 칠판을 쓸 수 없게 되자 대신 플렉시글라스 창문을 썼고, 감방에서 수업이 금지되자 산책 시간을 이용해 교육을 이어갔다.

지난 10년간 정치 활동으로 체포된 수감자들이 이러한 교육과정을 비밀리에 조직해왔고, 팔레스타인 좌파의 대표적 인물인 칼리다 자라르가 그 중심에 있었다. 비르 자이트 대학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석사 학위를 받은 그녀는 1994년부터 2006년까지 팔레스타인 수감자 지원단체인 아다미르를 이끌었고,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의회인 팔레스타인 입법위원회(CLP) 의원이 됐다. FPLP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1989년 이래 여섯 번이나 수감된 그녀는 가장 최근에는 2023년 12월 26일에 체포되어 이 글이 쓰이는 지금까지도 독방에 갇혀 있다.

2015년부터 그녀는 이스라엘 하샤론 교도소에서 교육 체계를 새로 세우는 데 힘썼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 지하드 소속으로 여성 수감자 대표가 된 이스라엘 국적 팔레스타인인 리나 자르부니와 협력했다. 이렇게 이념이 다른 정파들이 협력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가끔 긴장이나 대립이 있고 교도소 당국이 이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교도소는 여전히 다양한 정파가 만나고 협력하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특히 수가 적고 한 시설에 모여 있는 여성 수감자들 사이에서 더욱 그렇다.

 

자유가 없는 공간에서 키운 해방교육

이런 흐름 속에서 2015년 수감 중이던 자라르와 다른 수감자들은 교육부, 수감자 업무부와 협력하여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타우지히 준비를 조직했고, 처음으로 30명이 넘는 여성들이 교도소 안에서 몰래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2017년부터 2020년 사이에는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국제법 교육과정을 만들고, 특히 장기 수감자들을 위해 요르단강 서안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알-쿠드스 대학(라말라 소재)이 인정하는 사회복지 학위과정도 개설했다. 교육은 이제 단순히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수단을 넘어서 비판적 무기가 되었다.

“자유가 없는 공간에서 오히려 우리다운 교육, 해방의 교육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게 아이러니해요. 이곳의 교육이 오히려 바깥세상보다 더 강력했죠. 우리는 파울로 프레이리의 책들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그는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교육을 주창한 브라질의 교육학자로 『피억압자들의 교육학』(1970)을 썼죠. 우리가 만드는 교육은 투사로서 우리의 역할을 보여주어야 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권력 관계를 해체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카예드는 설명했다. 툴카렘 근처 마을의 평범한 가정 출신인 하닌 비(9)는 자라르와 같은 감방을 쓴 동료로, SNS 게시물 때문에 체포됐다. 처음 교육을 받을 때는 무척 지루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동료들 사이의 토론 내용이나 쟁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칼리다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밤 9시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서 네스카페를 마시고 그 내용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죠. 다른 사람들이 하나하나 설명해주면서 점점 이해가 깊어졌고, 저도 토론에 참여할 수 있게 됐어요.”

 

막심 고리키 소설을 읽고 마르크스와 레닌도 공부

교육 프로그램을 이끈 이들의 정치적 배경과 경험은 비밀 수업의 내용과 교재 선택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주로 팔레스타인 좌파나 파타 출신이었던 첫 세대 수감자들은 소련 문학을 읽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글을 공부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슬람 정당 활동가들, 특히 이슬람 지하드 소속 활동가들은 종교 문헌과 코란의 사례를 통해 여성의 무장투쟁 참여가 정당한지, 또 가정생활과 운동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토론했다. 같은 시기에 자라르와 다른 좌파 수감자들은 막심 고리키, 안젤라 데이비스, 볼리비아 운동가 도미틸라 바리오스 데 충가라의 저작을 읽고 분석하는 수업을 진행했다.

이는 감옥 생활이 지닌 역설이다. 식민 체제가 팔레스타인 영토를 서로 단절된 조각들로 쪼개놓았지만,(10) 역설적으로 감옥은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 되었다. 서로 다른 정당 출신의 활동가들이 만나고, 난민캠프와 도시, 농촌 출신의 여성들이 어울리며, 이스라엘인 전용 검문소와 고속도로로 갈라진 가자지구, 이스라엘,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한데 모였다. 전혀 다른 계층의 여성들도 이곳에서 만났다.

“감옥에서는 의사, 정치인, 농부,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집 밖을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노인과 젊은 여성들도 여기서 만나죠. 전국 각지에서 온 여성들이 모여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겁니다”라고 카예드는 강조했다. 서로 만나면서 이들은 각자의 풍습을 배우고 비교하며,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식민 점령의 폭력 양상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식민화와 팔레스타인 운동의 정치적 분열로 인해 감옥 밖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단결을 직접 경험한다.

팔레스타인 운동의 정치적 분열은 감옥 밖에서의 저항까지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저항에도 불구하고, 수감 환경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으며, 특히 여성 수감자들은 성별로 인해 겪는 폭력과 굴욕에 시달리고 있다. 이에 따라 자기방어 기술은 세대를 거쳐 전수되며, 때로는 수감되자마자 배우기도 한다.

한 전직 수감자는 예루살렘 출신의 한 독실한 노파 이야기를 전한다. 그녀는 아들을 투항시키기 위해 체포되었다. 취조 장소로 이동하던 지프차 안에서, 그녀 옆에 앉은 또 다른 수감자가 병사들이 성폭행이나 신체 접촉으로 위협할 경우 두려움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옷을 풀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세요. 그들이 뭐라 하든 충격받은 모습을 보이면 안 돼요.”

실제로 한 장교가 위협적인 말을 하자, 그 노파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아바야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그래, 와봐. 네가 정말 남자라면 해보라고!”

 

 

아이샤 오데의 『자유의 꿈』, 이스라엘 교도소의 성폭행 실태 세상에 알려

이런 이야기는 글로도 전해진다. 2004년, 아이샤 오데(Aïsha Odeh) 여사는 수감 중 자신이 겪은 성폭행 경험을 『자유의 꿈(Dreams of Freedom)』(아흘람 빌 후리예)이라는 책에 담아냈다.(11) 이 책은 널리 알려졌으며, 2015년에는 아랍 문학상인 이븐 루시드(Ibn Rochd) 문학상을 수상했다.

많은 여성 수감자에게 감옥은 젠더 관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이는 감옥 내부뿐 아니라 가정, 직장, 학교 등 삶의 여러 영역에서 영향을 미친다. “감옥에서 만난 많은 여성들은 어려운 가정환경이나 조혼으로 인해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어요.” 카예드는 이렇게 말하며 이어 설명했다. “하지만 수감 생활 동안 그들은 비판적 의식을 키우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며, 책임을 맡는 법을 배웠습니다.”

출소 후, 일부 여성들은 가족들에게 투쟁 경력을 인정받으며 환영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족들의 압박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족들은 그들이 다시 감옥에 갈까 봐 가장 두려워해요. 그래서 집에 가두기도 하죠.” 아말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가끔은 가족들이 강요하는 이런 고립을 깨뜨릴 수 있었지만, 항상 성공한 건 아니었어요…”라며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023년 10월 7일 이후, 수감자들의 상황에 대한 희소한 정보들은 그들이 생존의 경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CNN의 한 조사에서는 이스라엘 스데 테이만(Sde Teiman) 교도소에서 이루어진 전기 고문과 성폭행에 관한 증언들이 상세히 다뤄졌다.(12)

수감자들에 대한 압박은 여성 수감자 구역을 포함해 전반적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지난 12월 1일, 아다미르(Addameer) 협회는 성명을 통해 47명의 수감자가 사망했다고 전하며, “다른 주요 봉기나 저항 운동과 비교해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숫자”라며 깊은 우려를 표했다.(13)

치료와 음식 부족으로 인한 질병 발생이 급증하고, 부상자들의 구금 사례도 크게 늘었다. 12월 중순 기준, 아다미르 협회는 여성 수감자가 90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이는 10월 7일 이전의 33명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로, 비밀 구금 장소에 억류된 여성들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다.

수감자 문제는 여전히 정치적 협상의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다. 12월 8일, 하마스는 10월 7일 공격 당시 납치된 이스라엘 인질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환과 휴전을 논의하기 위해 여러 팔레스타인 단체에 협력을 요청했다.(14)

 

여성 수감자들, 성폭행 등 다양한 폭력에 여전히 노출돼

전쟁 발발 이후 처음이자 유일했던 일주일간의 휴전이 2023년 11월에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 인질 105명이 석방되고 팔레스타인 여성과 미성년자 156명이 교환되어 풀려났다. 석방된 이들 중에는 2015년, 18세의 나이에 정착민을 찔렀다는 혐의로 16년형을 선고받았던 슈루크 드와얏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새로운 세대의 팔레스타인 활동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진 아헤드 타미미가 있다. 22세의 그녀는 이스라엘 병사의 뺨을 때린 사건으로 유명하며, 2023년 11월 6일 고향인 나비 살레 마을에서 ‘테러 선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교환 이후 약 150명의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다시 이스라엘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이들 중 4명은 10월 7일 이전부터 이미 수감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15)

가자지구 침공 당시, 이스라엘 군인들이 방금 불태우거나 폭격하고 약탈한 집에서 발견한 여성 속옷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사진들이 소셜 미디어에 확산되었다. 나아가 여러 증언은 성폭력 사건이 급증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교도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16)

2023년 12월, 다시 체포되기 직전 자랄은 갓 석방된 여성 수감자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이들은 모두 구금 조건이 극도로 악화되었음을 호소했다. 성희롱, 모욕적인 신체 수색, 가족 앞에서의 성폭행 위협, 실제 성폭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폭력이 있었다. 이러한 폭력은 10월 7일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지금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17)

 

 

글·엘렌 세르벨 Hélène Servel & 아샤 자이노 Asja Zaino
프랑스 국립동양언어문화대학교(INALCO) 박사과정 연구원이자 언론인. 『철창 속의 사람들: 감옥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바꾸다』(아곤 출판사, 마르세유, 2016) 저자.

번역·아르망


(1) 아비르 바키르와 아나트 마타르 편집, 『위협: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정치범들(Threat. Palestinian Political Prisoners in Israel)』, 런던, Pluto Press, 2011.
(2) 2024년 12월 13일 기준 아다미르(Addameer) 협회가 발표한 통계, 예루살렘, https://www.addameer.org/statistics.
(3) 스테파니 라테 압달라(Stéphanie Latte Abdallah), 『감옥의 그물: 팔레스타인 수감의 역사(La toile carcérale. Une histoire de l’enfermement en Palestine)』, 파리, Bayard Press, 2021.
(4) 같은 자료(Ibid.).
(5) 스테파니 라테 압달라(Stéphanie Latte Abdallah), 「팔레스타인 여성의 수감과 참여 (1967~2009)」, <르 무브망 소시알>, 제231호, 2010.
(6)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설립 이전 시기의 정확한 통계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당시 자료가 이스라엘에 의해 체계적으로 분산되거나 압수되거나 파괴되었기 때문임.
(7) 같은 자료(Ibid.).
(8) 2024년 4월, 요르단강 서안에서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나세르(Nasser)와 카예드(Kayed)가 노동조합 활동으로 다시 체포되었다가 2024년 12월 8일 석방됨. 참고: 「8개월 후, 학생 활동가 라이안 나시르와 라이안 카예드가 드디어 자유를 찾다」, 프랑스 팔레스타인 협회, 2024년 12월 11일.
(9) 두 이름은 변경되었음.
(10) 세실 마랭(Cécile Marin)의 지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얽혀 있는 영토들」, <마니에르 드 부아르> 프랑스어판, 제193호, 2024년 2~3월호 참고.
(11) 아이샤 오데(Aisha Odeh), 『자유의 꿈(Ahlam bil Huriyeh)』, 라말라, Muwatin, 2004.
(12) CNN 국제 조사 및 시각 팀, 「묶이고, 눈 가려지고, 기저귀를 찬 채: 이스라엘 내부고발자들이 비밀 구금소에서 팔레스타인 학대 사례를 폭로하다」, <CNN>, 2024년 5월 11일.
(13) 「이스라엘 교도소에 수감된 9,500명」, <아다미르(Addameer)>, 예루살렘, 2024년 4월 17일, https://www.addameer.org/media/5320.
(14) 「가자 휴전을 위한 노력: 하마스, 팔레스타인 단체들에게 인질 명단 작성을 요청하다」, <Le Figaro>, 2024년 12월 8일.
(15) 「가자 상황의 맥락 - 집단 학살 시기의 교도소와 수감」, <Jadaliyya>, 2023년 12월 27일. 
(16) 사라 이흐무드(Sarah Ihmoud),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여성에 대한 전쟁에서 젠더 폭력의 교묘함」, <Jadaliyya>, 2024년 4월 3일.
(17) 칼리다 자랄(Khalida Jarrar), 「가자에서의 집단 학살 전쟁 중 팔레스타인 남성과 여성 수감자들에 대한 인권 침해」, Muwatin(팔레스타인 민주주의 및 인권 연구소, 비르제이트에 위치), 2023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