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무역주의 위협론'은 완전한 허구다

2009-03-02     프레데리크 로르동 | 경제학자

 

 

 

 

 

 

 

 보호무역주의 망령의 부활인가? 도처에서'보호무역주의의 유혹'에 경종을 울리는 선언이 이어져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을 이끄는 스토로스 칸 총재가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를 두려워한다."1)거나,  "보호무역주의의 위협이 시작된다."2)는 우려와 함께 "보호무역주의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자."3)거나  "보호무역주의, 사회혼란의 주범!"4)이라는 외침도 연이어 터져나오고 있다.

 

 특집 '보호무역주의'의 새로운 가치Ⅲ

 

 

 

그런데 여기서 언급되는 '보호무역주의'는 과연 무엇일까? 국제교역을 논하는 데에는 여러 방식이 있다. 거시경제학에서는 국제교역의 다양한 모델을 상정하여 여러 측면에서 장단점을 분석한다. 그러나 현재 언론에서 언급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거시경제학이 '보호무역주의'를 다루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먼저 해결해야 할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것은 '보호무역주의'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의 문제다.

 

 '보호무역주의' 실제 있기나 하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작금의 접근 방식이 얼마나 허술하고 심지어 아무런 의미도 없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가장 명백해 보이는(실제로는 허위이지만) 범주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보호무역주의와 이에 대비된 '비(非)왜곡 경쟁'((non-distorted competition) 개념은 종종 어처구니 없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여기에서 '비왜곡 경쟁'은 부정직한 경쟁침해가 전혀 없는 '공정경쟁'을 의미하며, '자유무역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세간의 지적대로,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가 위협적으로 생각된다면 우선 우리가 '비(非)보호무역주의'의 환경에 처해 있어야 타당하다. 그런데 이 '비보호무역주의'에 부응하는 경제학적 개념은 '공평한 경쟁의 장(level playing field)'으로서, 이는 경쟁에 돌입한 행위자들이 동등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함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보호무역주의'는 과연 현실에 존재라도 하는 것일까? 이것은 환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유럽에서는 약간의 부정직한 경쟁 침해의 사례도 유럽집행위원회의 친절한 권위에 의해 끊임없이 교정되어 '비왜곡 경쟁'이 유럽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유럽의 국가들은 법인세가 전혀 없는 에스토니아5)와 진정으로 '비왜곡 경쟁'관계에 있단 말인가? 르노-다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월급 300 유로를 받고 일하는 직원이 엘리트로 취급되는 루마니아와도 '비왜곡 경쟁'관계에 있는 건가? 환경 규제가 전혀 없어서 환경 비용 자체가 들지 않는 폴란드하고도 그러한가? 유로 대비 자국 화폐를 갑자기 30% 평가 절하하여 하룻밤 사이에 그 만큼 수출품 가격을 인하한 영국하고도 그러한가? 폐유 웅덩이보다 더 불투명한 금융 시스템으로 유명한 룩셈부르크하고도?
 이런 사례들이 모두 '비왜곡 경쟁관계'에 포함된다면 아마도 노동권이 아예 없는 것으로 소문난 중국이나 베트남과도, 또, 심지어 강제노역이 하나의 전설이라고 BK 컨설팅이 확인해 준 버마하고도 '비왜곡 경쟁관계'일 것이다.
 
 경제구조의 국가간 차이 '숙명적'
 이것이 바로 애초부터 불평등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구조적 보호 체계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시장의 형식적인 조건만 창조하려 드는 자유무역주의의 허구다.

 '비보호무역주의'가 의미를 가지려면 자유 교역의 규칙 이전에 경쟁 관계에 놓인 사회·생산적 시스템의 완벽한 구조적 일체성이라는 가정이 있어야 한다.
 조세 체계, 사회 보장, 삶의 수준, 환경 규제, 환율, 노동권, 불평등에 관한 사회적 관용, 공공서비스의 집단적 지출에 대한 정치적 선호 등등. 그런데 각국의 경제는 이 모든 부분에서 판이하게 다르다.
오로지 시장의 규칙만 바라보던 실명상태에서 깨어나는 순간, 사회·생산적 구조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이기 때문에 '획득된' 왜곡으로 보이기 시작하며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공평한 경쟁의 장'의 실현 계획 자체가 허황된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비보호무역주의'는 환상 속에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완전히 동질화된 경제 단일 세계의 환각에서 깨어나면 모든 차이는 바로 모든 왜곡으로 보이며 이는 실제적인 보호무역 상황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법인세를 감면해주는 국가, 사회보장 비용도 환경 비용도 요구하지 않는 국가, 환율을 조작하는 국가, 노동권이 임금에 압력을 행사하는 나라 등, 이 모든 상황이 관세·비관세 장벽의 보호 없이도 자유화된 국제교역에서 당당하게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다양한 세상이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다양할 것이다. 따라서 다양성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그 자체로 보호무역주의적이다. 결국 원래 보호무역주의적인 세상에서 '보호무역주의의 위협'에 놀라 소리치는 것은 어이없는 행동은 아닐까? 일부 눈에 띄는 보호무역조치를 대상으로 히스테리적인 시선을 모으는 것은 다른 수많은 보호무역주의 상황 앞에 눈을 감기 위한 것은 아닐까?
 비왜곡 경쟁, 그것이 바로 보호무역주의다 !

 

 

 국가간 차이 무시, 허위적 '공정경쟁'의 탈쓴 자유무역주의
'비보호무역주의'는 환상, 국제무역 구조적 왜곡 교정돼야

 '자유경쟁'의 위선과 허위의식
 자유 경쟁과 '비왜곡 경쟁'의 열광자들 중에는 알고 보면 국제교역체제로 자본과 노동 간의 세력관계를 덮기 위한 수사학적이고 실용적인 도구로 '공평한 경쟁의 장'을 이용하는 교활한 자들이 있다. 이들은 최소한 자신의 내심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으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런데 열광자 중의 상당수는 자기확신에 빠진 나머지, '비왜곡 경쟁'에 열광하는 행동 자체가 구조적으로 매우 왜곡된 경쟁 상태를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유지시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모든 종류의 시장지상주의자들은 '비왜곡 경쟁'이 구조적 보호무역주의와 완벽하게 보완관계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고 상이한 사회구조에 기인한 보호(혹은 취약) 효과를 무시하면서 오직 시장의 규칙에만 입각하여 경쟁의 틀을 만들게 되면 이 사회구조들이 더욱 폭력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 '비왜곡 경쟁'은 보호무역주의와 동의어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상이한 구조적 환경에 속한 사회를 완전히 개방된 시장의 허위적인 '공평한 경쟁의 장'에 내몰리게 하는 것보다, 경쟁적 조우의 잔인함을 극대화하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보호무역주의의 공포에 사로잡힌 자들이 체계적으로 은폐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상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소한 문제를 '위협'으로 느끼고 소리치는 모습은 삼위일체의 본질에 대해 논쟁하는 신학자들의 모습과 비견된다.
 왜냐 하면 '비왜곡 경쟁'과 보호무역주의간의 양자택일의 문제는 천상 존재의 단일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삼위일체성을 주장하는 입장 간의 논쟁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보호무역주의가 모든 종류의 왜곡으로부터 해방된 어떤 상태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상정된다면, 이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일 따름이다. 우리는 차이의 세계, 즉 사실상의 왜곡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보호무역주의적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고백하기는 어렵지만 동의하여야 한다.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개체간의 경쟁은 바로 그들의 차이로 인하여 즉시 왜곡된다. 때문에 '비왜곡 경쟁'이라는 개념은 보호무역주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허구의 개념에 불과하다.
 
 보호무역 '왜곡 교정'의 수단
 따라서 동질화된 하나의 세상에 대한 환상을 깨고 우리는 사실상의 보호무역주의 세상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보호무역주의를 '자유시장'과 대립시키기를 고집하는 공허한 논쟁에서 빠져 나와, 사안 자체가 보호무역주의적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정작 보호무역주의의 상이한 수준과 형태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 논의의 테이블 위에 모든 종류의 이질성, 차이, 보호 및 불평등을 올려놓고 그들 가운데 일종의 타협안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왜곡의 상태를 역(逆)왜곡 조치로 교정하여 보상하는 정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기존의 사고방식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요구한다. 냉소주의자들이나 무조건적 시장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이유를 대면서 이를 거부할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의 활동이 '자유무역주의의 진흥' 역할 그 이상의 긍정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국제 무역이 일방적인 제재와 이에 대한 보복 조치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기보다는 교섭을 통한 안정된 기반위에 구조적 왜곡 상황에 대한 교정을 제도화할 수 있도록 국제 무역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목표 자체는 그다지 도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과연 여기에 어떠한 원칙적 혹은 실용적 반대 의견이 제기될 수 있을까? 자유 교역으로 싹쓸이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협상의 여지도 없다고 확신하는 '반(反)보호무역주의자'에게도 반대의 명분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반대로 현재 세계무역기구가 하는 일은 결국 특정한 왜곡 상태, 즉 '공평한 경쟁의 장'의 외피를 쓴 구조적 왜곡 상태를 안정화시키는 것 이외의 다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호무역주의가 국제경제의 '규범'
선진국 경제사 '주류 정책'… 보호무역에 대한 잘못된 인식 깨야

폴 배로슈 | 경제사학자*

 

 보호무역주의가 1929년의 위기와 30년대의 대공황을 야기하였다는 허황된 주장에 대해  우리는 무역 정책의 긴 역사에서 더욱 널리 유포된 이 같은 잘못된 신화를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 신화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자유무역은 규범이고, 보호무역은 예외이다'. 그런데 이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도그마에 불과하다.  20년대와 30년대의 보호무역주의 시대와 대조되는 자유무역의 황금기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귀가 따갑게 이야기를 들었던가? 그러나 자유무역이 예외였고 보호무역이 규범이었다는 점이 역사적 진실이다.
 16세기와 17세기는 중상주의의 황금기였다. 귀금속의 보유는 국력과 국부의 필요조건으로 인정되었다. 금광이나 은광에 접근이 불가능한 국가는 해외무역에서 흑자를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또한 식민지 소유는 무엇보다도 본국의 수출을 위한 독점적 시장의 역할을 하였다.
 18세기는 일종의 과도기로 간주된다. 18세기 전반기에는 무역정책이 여전히 중상주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1760년부터 여러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중농주의, 그리고 이후에는 아담 스미스의 저작, 특히 그가 1786년에 쓴 <영-불 무역론>과 함께 유럽에서 자유무역주의는 자유방임 경제정책의 통합된 일부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790~1815년 기간의 전쟁들, 특히 1806년 영국이 실시한 프랑스 봉쇄정책으로 인해 보호무역주의를 국가의 전형적인 무역정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경제사상의 측면에서 자유주의는 계속 발전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럽에서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우위가 중상주의적 보호무역주의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았으며, 특히 보호무역주의의 새로운 형태의 출현을 막지도 못했다. 이 새로운 보호무역주의는 19세기 초에 시작된 민족주의의 부흥, 산업혁명이 초래한 경제발전의 동력, 그리고 영국의 선진 산업경제에 대한 후발 국가들의 각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산업혁명으로부터 출발한 유럽 지역의 무역 확대는 다른 지역의 관세정책에 매우 상이한 영향을 끼쳤다. 이를 단순화해서 두개의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선진 산업국을 따라 잡으려는 국가에서는 보호무역주의가 우세하였다. 특히 "현대 보호무역주의의 조국이며 요새"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미국의 경우는 두드러졌다. 오늘날 제3세계(특히 구 식민지 지역)라고 칭하는 지역에 속한 국가에서는 자유주의가 우세하였다. 그러나 이들 국가의 자유무역주의는 의도적인 선택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제된 것이었다.
 보호무역주의는 시기적으로 항상 산업화 및 경제발전과 일치한다. 자유무역주의를 실행한 4개국의 예에서 세 나라는 자유무역의 부정적인 효과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1846년에 자유무역주의로 전환한 영국만 예외였다. 영국의 자유무역 정책은 거의 완전한 관세철폐 조치 이후 20년~30년 동안 경제발전의 가속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는 '산업혁명의 요람'이라는 영국만의 특수한 입지 덕분에 경제발전의 단계에서 1846년에 이미 다른 나라와 상당한 격차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자유무역주의로 전환하기 이전에, 영국이 무려 150년간의 보호무역주의 시대를 보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번역 | 김태수

 


 

*장기적 관점에서 세계경제를 분석한 <경제사에 있어서 어떤 신화와 역설>(1999)을 저술했다. 이 글은 그 책의 발췌문이다.

 

 

 


 

1) http://www.Nouvelobs.com,2009년 2월 13일.
2)
http://Leparisien.fr,2009년 2월 11일. 
3) <Courrier International>, 2009년 2월 2일.
4) 크리스틴 라가르드의 연설문. 다보스 포럼, 2009년 1월 31일.
5) 투자이익에 대한 세율이 0%이며 분배이익에 대한 세율은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