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까지 마수를 뻗은 '베네수엘라 입찰 사기꾼' 스토리
삼성,지멘스, 미쓰비시, 롤스로이스, 모건스탠리 등 30여 개 기업에 연락해 입찰 사기를 치기 위해 관계자들을 만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에도 이들 기업 중 한 곳이 그의 사기 함정에 걸려든 것으로 알려졌다.
베네수엘라 시민권의 호세 트리니다드 마르케스(70)는 멕시코 국영 석유기업인 페멕스(PEMEX)의 유럽지사장 가짜 명함을 만들어 30년간 스페인 등에서 주로 암약(?)했다고 스페인 언론들이 보도했다.
페멕스는 멕시코 정부 소유 국영기업으로 석유와 가스의 탐사, 생산,유통을 하는 업체다. 지난해 당선된 클라우디아 셰인바움(62) 여성 대통령은 빅터 로드리게스 파딜라를 페멕스의 신임 CEO로 임명하기도 했다.
마르케스는 신사 정장에 넥타이,행커치프,트렌치코트,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스페인 마드리드의 5성급 호텔 로비에서 주로 글로벌 대기업 임직원들을 만났다.
삼성,지멘스,미쓰비시,롤스로이스,모건스탠리 등 30여개 기업에 연락해 입찰 사기를 치기 위해 관계자들을 만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에도 이들 기업중 한곳은 그의 사기 함정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마르케스가 사기꾼임을
화상통화중 우연히 알아
'할리우드 스타일의 사기꾼'으로 불리는 마르케스는 석유업계에서 매우 보기 드물게 입찰 수수료와 보증금만을 노린 수법을 썼다. 일부에서는 30년전 한때 유럽 지역에서 써먹던 고급 사기수법이라는 지적도 있다.
어찌 됐건 마르케스의 이런 사기행각이 다시 발각된 건 지난해 10월27일 개인비서인 호세 마린을 채용했다가 그의 제보로 경찰에 꼬리가 잡혔다.
마르케스는 왓츠앱 메시지를 통해 마린을 처음 만났을 때는 자신을 "페멕스의 자회사인 PMI사장 빅토르 세르반테스의 고문"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당신을 페멕스의 임원으로 월 4천유로(약 600만원)의 월급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섯 자녀를 둔 니카라과의 이민자인 마린은 특별한 기회라고 생각하고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낸 뒤 그의 개인비서로 전직했다. 두 사람은 주로 원격으로 마크케스와 화상통화로 소통하면서 일을 했다. 마르케스는 개인비서인 호세 마린과 통화 화면을 통해 자신의 집이라며 호화스런 아파트 내부를 보여주기도 했다. 벨라스케스 도심 사무실이 있다는 곳에는 그의 말만 들었지 실제로 방문할 수는 없었다.
마르케스가 마린에게 지시한 업무는 페멕스 본사가 일찰 공고(터빈, 엔진, 화물선 등)를 낼 내용을 미리 삼성,지멘스 등 30여개 세계 각 기업에 타진하는 업무였다고 한다. 마르케스는 그에게 각각의 회사 전화번호를 주고 연락을 해서, 그들 회사의 영업관리자들과 만나자는 약속을 잡으라는 지시했다.
그런데 마린은 그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하면 할수록 '무언가 의심스런 징후'가 많았다. 입찰에 관심이 있는 영업관리자들이 페멕스 사무실을 방문하겠다고 하면 마르케스는 "우리 사무실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니, 편하게 마드리드에 있는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만나 회의를 하지"고 말하곤 했다,
지멘스의 경우 거꾸로 자신들의 사무실로 좀 방문해달라는 요청을 한뒤 빌딩 출입을 위해 사전에 오실 분의 신분증 복사본을 보내달라고 하자, 마르케스는 "저놈들은 왜 그런 서류를 요구하느냐"며 짜증을 냈다고 한다.
어떤 때는 상대편 기업이 의심하는 듯한 분위기를 감지하면 먼저 서둘러 약속을 파기하면서 "우리는 멕시코 국영기업인데 지금 대통령께서 심장마비를 겪고 있어. 갑자기 본국으로 문병을 가야하니 회의를 미루자"고 둘러댔다.
더구나 그는 지난해 10월 채용된 이후 이핑계 저핑계로 월급을 2달 넘게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두 사람은 평소처럼 화상 통화로 회의를 했다. 회의중 마르케스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그는 황급히 "마린, 나중에 내가 전화할께요"라며 화상 통화 자리를 떴다. 마르케스는 정신이 없었던지 실수로 화상 전화를 끄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마린은 마르케스의 집안 대화 내용을 본의 아니게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경찰입니다"
"영장이 있어요?"
"..."
"나는 숨지 않아요. 영장을 제시하면 법정에 자진 출두하겠습니다. "
이런 소리를 화상 통화로 우연히 들은 마린은 깜짝 놀랐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척하기 위해 계속 켜져 있던 화상 전화를 서둘러 껐다.
마린은 그간 겪었던 마르케스의 의심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 크리스마스 직전 멕시코 본사 페멕스에 이메일을 보냈다. 결국 그는 "마르케스는 페멕스의 유럽책임자도 아니고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답장을 받았다. 페덱스는 검찰에 허위 유럽지사 운영과 신원 도용과 관련 고소를 했다. 마린도 지난 15일 경찰에 그를 신고했다.
매우 특이한(?) 사기
입찰 보증금을 노려
마르케스의 입찰 범죄 수법은 교묘했다. 우선 페멕스의 실제 입찰 공고 내용을 활용해 자신이 책임자인 양 주요 기업들의 담당자를 사전에 접촉하면서 입찰 보증금과 수수료만을 챙겼던 것이다.
글로벌 비즈니스 세계에서 일부 기업들은 입찰 보증금과 수수료를 받고 있다. 수수료의 경우 입찰자가 서류를 제출할 때 지불해야 되는 비용이다. 입찰 과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부수 비용이기도 하다. 입찰 참가자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정보 및 서비스 비용으로 쓴다. 입찰 참가자들에게는 프로젝트에 관한 상세 정보까지 제공한다. 일찰 서류의 준비,심사,평가,계약체결 등의 비용이 포함된다. 한마디로 대학입학원서 수수료와 같은 개념이다.
마르케스는 이같은 입찰 보증금과 수수료 수법으로 2009년에는 석유시추업체로부터 24만7천유로(약 3억7천만원)을 사기쳐 3년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또 2014년에는 포르투갈 최대은행인 '에스피리토 산토'로부터 450만 유로(약 68억원)을 갈취해 감방생활을 하기도 했다.2017년에는 비슷한 입찰 수수료 사기로 레알 마드리드 전 부회장인 페르난도 페르난데스-타피아스의 회사를 사기친 혐의도 받고 있다.
이에 앞서 그는 30년전에도 페멕스의 가짜 명함을 파서 스페인 최대 기업중 하나인 아스틸로스 에스파뇰레스 조선소에서 수백만 달러를 사기치려다 체포된 적도 있었다.
이번에 발각되기 전 마지막 사기 행각은 부동산업체로부터 입찰 수수료 명목으로 1만2천유로(약 1800만원)를 가로챈 사건이었다. 피해기업은 언론 인터뷰에서 어이없다는 듯 "사기당한 그 돈으로 우리 회사가 망하진 않을 것 같다"며 웃어 넘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