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건을 재구성하는 ‘제3의 눈’:<추락의 해부>

2025-02-03     이승희(영화평론가)

 

최근 무안 공항에서 추락한 제주항공기의 엔진에서 가창오리 깃털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사고 현장을 재구성하는 데에 유일한 증거가 될 비행기의 블랙박스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이동 중이던 가창오리 떼들이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인 상황에서 새들이 목격한 것들이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쓰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동물의 눈으로 무언가를 목격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 동물이 영화에 등장한다고 하자. 그 사실이 현실에서는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전혀 무용하다고 해도 영화에서는 혹여 무언가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동물 중에서도 인간과 가장 가까우며,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인 ‘개’는 영화에서 인간이 보지 못하는 뭔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재미있는 생각을 해보았다. 영화 <추락의 해부>를 새롭게 본 계기는 ‘개의 눈’이라는 관점을 통해서다.

<추락의 해부> 개봉과 비슷한 시기에 소개된 영화들 중에는 공교롭게도 개가 출연하는 영화가 많다. <나의 올드 오크>, <사랑은 낙엽을 타고>, <갓 랜드>, <이니셰린의 벤시>, <레드 로켓>에는 개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영화들에서 개의 역할은 한 가지, ‘등장’하는 것, 영화 속 거기에 ‘있는’ 것이다. 뭔가를 연기하거나 캐릭터가 되기 위해 등장하는 게 아니라 그저 영화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등장한다.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뭔가를 봤을 수 있다. ‘봤다’가 아니라, ‘보았을 수 있다’. 이 진술은 영화의 성격을 바꿔놓을 만큼 중요하다. 이 영화들에 개의 존재가 없었다면 분명 이들은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 속 개의 존재, 그리고 개의 눈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보는 존재’로서 눈의 권위

<추락의 해부>에서 사건을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개 스눕이다. 그리고 스눕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주인공인 다니엘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다. 이 두 가지 전제를 두고 영화에는 복잡한 게임이 펼쳐진다. 사건을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개 스눕이지만 개는 증언할 수 없으므로 스눕은 증인의 지위를 부여 받지 못한다. 영화에는 항상 +α가 찍힌다. 이 때 α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영화에 미장센을 제공할 것이고, 때로 그 자체로 미학이 되거나 쇼트 속 잉여 혹은 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다. 영화적인 어떤 것. 그런데 이 α에 눈이 있다고 해보자. 말하지 않고 보기만 하는 눈. 영화의 플롯은 개의 등장 이후로부터 달라진다. 이 때부터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보기 때문에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기 때문에 복잡해진다. 이 복잡함을 다루자는 것이 아니라, 달라지는 것의 본질에 대해 말 할 필요가 있다. 영화 속에 개가 등장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을 가능하게 한다. “영화 속에 눈이라는 존재가 존재한다.” 이 때 영화 속 개의 눈을 제 3의 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인물(범인과 증인)의 눈, 카메라라는 눈, 관객의 눈은 모두 인간의 눈이다. 제3의 눈인 개의 눈은 인간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개의 눈은 영묘한 눈이자 영적인 눈이다. 동물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인간을 응시하는 존재로 드러난다. 인간의 오래된 타자이자, 여전히 존재하는 생성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개라는 타자는 곧 인간이라는 주체를 바라보는 절대적 ‘눈’이 된다. 이때 개는 어떤 의지나 능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므로 그 개가 봤을 수 있다는 ‘사실’로만 ‘존재한다. 영화 속 개의 존재는 영화 속에 어떤 절대적인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때 인간은 보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는 존재’가 된다. 그에 따라 인간들 간의 위계가 없어진다. 카메라와, 관객과, 영화 속 인물들의 위계가 무화된다. 이 영화가 미스터리하지만 동시에 진실성을 띄는 이유다. 자크 데리다는 그의 논문 <동물, 그러므로 나인 동물>에서 샤워를 하고 나온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는 고양이로 인해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타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인간이 영원한 주체가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 이것이 영화가 진실성을 획득하는 또 다른 지점이다.

 

우월한 인간 주체로서 증‘인’의 권위

다니엘은 목격자가 아닌 증인이다. 그리고 사뮈엘의 아들이자 산드라의 아들이다. 증인이자 아들로서, 다니엘은 무엇을 증언해야 하는 것일까. 다니엘은 눈이 보이지 않으므로 목격자가 아닌 증인이다. 이 진술은 좀 이상하다. 목격한 것이 없는데 증인의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므로 무언가 증언할 수 있다. 무엇을 증언한다는 말인가. 이때 다니엘이 목격한 것이 없음에도 증인의 지위를 놓치지 않는 이유는 다니엘의 증언이 재판 받는 산드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니엘이 산드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엄마의 운명을 판가름할 재판의 증인의 지위를 얻었다. 지금 다니엘이 획득한 것은 목격자의 지위가 아니라 증인의 지위이므로 여기에서 ‘증언’은 ‘목격담’이 아니다. 다니엘이 증언할 내용은 목격한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니엘은 산드라의 운명을 쥐고 있고 그가 다름 아닌 엄마이기 때문에 증언을 엄마의 무죄 판결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엄마가 유죄판결을 받으면 어린 아이인 다니엘은 엄마마저 잃게 된다. 다니엘은 스눕이 보았다고 생각되는 것, 자기가 들었다고 할 이야기로 증언을 구성해야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스눕이 무엇을 보았어도, 무엇을 보았는지, 보았다는 사실조차 다니엘에게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스눕이 겪을 것을 다니엘은 볼 수 없다. 다니엘은 전략을 수정한다. 스눕이 본 것이 아니라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다른 감각기관으로 겪었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다니엘이 보지 않고 겪은 것, 그러니까 다른 감각기관으로 겪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해야 한다. 다니엘의 증언에는 맛, 후각, 청각의 요소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영화에서 다니엘이 증인의 권위를 지닌다는 사실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만 주어진 천부적 능력이어서 그렇다. 보았(다고 여겨지)지만 말을 할 수 없는 개에 비해서, 보지 못했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우월하다. 법이란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인간의 법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아빠 사뮈엘과 대화하면서 사뮈엘에게 들은 이야기를 증언으로 구성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증언 내용의 진실성은 중요하지 않다. 증언의 권위를 활용하는 일만이 중요하다. 다니엘은 사뮈엘에게 무엇을 들었다고 할 것인가. 이 영화는 증인의 우월한 지위를 부여받은 다니엘이 개 스눕이 겪은 일과 자신이 들은 일을 허구적으로 구성하는 이야기다. 우리가 법정 장면에서 내내 다니엘에게 듣는 것은 허구로 구성된 인간주체의 상상력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영화 <추락의 해부>는 개의 존재에 환상적인 권위를 부여하거나 증인 다니엘의 게임에 무작정 끌려다니지는 않는다. 스눕이 본 것을 재연하지 않으며, 다니엘의 증언의 진실 여부에 대해선 관객의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다. 다니엘은 지금 진실의 여부와 관계없이 아들로서 엄마와의 관계를 지킬 수 있는 증언을 하려고 하고 있고, 영화는 영화 속에 ‘사실이 존재한다’라는 절대적인 진실성을 존치시키려고 한다. 영화 <추락의 해부>는 인간의 ‘말’의 권위와, 비인간 존재의 ‘눈’이라는 권위가 서로 공방하는 상상의 스펙터클이다.

 

글·이승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