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미술 전문가들, 착취에 나서다

2012-11-12     임근준 AKA 이정우

요즘 현대미술계가 돌아가는 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도리(道理)를 벗어난 일을 꾸미는 데 부끄러움이 없는 기성 미술인들의 모습에 새삼 놀라게 된다. (사전은 도리를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이라고 정의한다.) 오늘 내가 문제 삼으려는 비도(非道·올바른 도리에 어긋남)란, 미술품 거래를 통한 횡령이나 탈세 혹은 학력 위조 같은 범법 행위가 아니다. 사법적 차원에서 징벌이 가능한 범죄라면 언론 기고문을 쓰기보다는 증빙 자료를 담은 투서나 고소장을 작성하는 편이 옳겠거니와, 안타깝게도 그런 비위 사실은 평론가인 내가 잘 알지 못한다.

평론을 업으로 삼는 나를 분노케 하는 미술계의 비도는, 크게 두 가지다. 만연한 비도 가운데 으뜸가는 문제는, 젊은이들을 저임금이나 무보수로 부려먹는 엉터리 인턴 프로그램이다. 버금은, 청년 작가들에게 번듯한 전시 기회는 제공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포트폴리오 발표와 작업 해설을 요구하는 사이비 신진 작가 발굴 프로그램이다.

이 두 가지 문젯거리는, 공히 미술계의 양적 팽창과 질적 저하에 발 딛고 있다. 비판가들은 대개 미술시장의 팽창과 불황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은 과도한 인력 공급이 더 근본적인 문제다. 전 지구적으로 매해 10만 명 이상의 예비 작가가 번듯한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에 쏟아진다. 1990년대 중반부터 유학생 장사에 맛을 들인 영·미권 미술학교와 (전 지구화에 발맞춰) 중국 등 아시아 국가의 대학에 신설된 현대미술 관련 학과들이 쏟아내는 미술 전공자 수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미국의 2000년 미연방예술기금(NEA) 통계에 따르면, 국내 인구 1만 명당 8명이 순수미술가고, 27명이 디자이너고, 4명이 사진가고, 7명이 건축가다. 2011년 현재 미국 인구는 3억1천만 명이 넘으므로, 순수미술가만 24만 명 이상이 활동 중이라는 말이다. 한국만 해도, 전국의 미술대학 수는 135개에 이르고, 재학생은 8만여 명에 이른다. 디자인 분야는 수가 더 많아서 매해 약 3만5천 명의 디자인 전공자가 배출된다.

그렇다면 이 많은 미술 전문가들은 어디로 갈까? 다른 직업을 알아보는 사람도 부지기수지만, 지역마다 군소 비엔날레 등의 페스티벌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서 수많은 이들에게 생존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설사 재능이 없는 자라 해도 얼마든지 '스펙을 관리하며' 이력서를 늘려갈 수 있다. 하지만 양질의 기회는 하늘의 별 따기다.

오늘의 예비 작가는 전시 기회를 얻기 위해 수많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응모와 프레젠테이션의 무한 반복이다. 대안 공간의 신진 작가 공모 프로그램, 국공립미술관의 작가 거주 프로그램 등을 거쳐야 비로소 작가로 인지되기 시작하고, 그 기간에 어떻게 해서든 더 큰 전시 기회를 잡아야 한다. 마치 청년 구직자가 면접을 보고 또 봐야 하듯, 청년 작가들은 작은 전시 기회라도 얻기 위해 자기 홍보를 거듭해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인다.

그런데 몇몇 공공 미술관이 앞장서, 이런 상황을 (별 악의 없이) 악용하는 행태를 취하니 기가 막힌다.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란 허울 좋은 이름을 걸어놓고 무명의 신예들을 선발해놓은 뒤, 강의 프로그램과 워크숍을 돌리면서 (큰돈 들이지 않고) 생색을 내는 식이다. 이미 대학원에 '유학 생활'까지 마친 이들에게 그런 과정이 또 필요한가? 국공립미술관은 어떤 신진 작가의 작업이 유망해 보인다면 적절한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작품 제작 지원금을 유치·집행해야 마땅하다.

국공립 작가 거주 프로그램의 행태도 엇비슷하다. 신진 작가를 지원한다면서 '작가-비평가 매칭 프로그램'이란 걸 운영하는데, 다짜고짜 비평가를 초청해다가 작가의 방에 넣은 뒤, 정해진 시간을 머무르게 한다. 기관의 큐레이터와 코디네이터들은 준공무원답게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그 어색한 장면을 기록으로 남긴다며 서류용 사진을 펑펑 찍어대기도 한다. 이렇게 억지로 '만남'을 주선한 뒤 비평가에게 글을 요구하는데, 과연 이게 누구에게 이득이 될까? 그런데 큐레이터와 평론가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의 길은 이보다 더 지저분하고 험난하다.

돈 내고 '고용'되는 인턴

지난 10월 26일 사립미술관 아트선재센터가 '예술연구자 그룹'을 모집한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반가운 마음에 공고를 자세히 읽어봤는데, 기대와 달리 프로젝트 진행용 인턴을 모집하는 내용에 불과했다(http://www.artsonje.org/asc/kor/edu_arg.asp). 더욱 황당했던 것은, 프로젝트가 전개되는 3개월 동안 인턴에게 보수를 지급하기는커녕, 30만 원이란 적잖은 참가비를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인턴에게 돈을 받는다는 역발상에 잠시 말문이 막힐 정도로 크게 놀랐다.

예술연구자 그룹이라는 허울뿐인 이름과 '작가와의 교류', '수료증 발급'을 미끼로 내세운 이 인턴 모집 공고는 순식간에 마감됐다. '이거라도 해야지, 아트선재가 어디야. 뭐라도 해서 한 줄 채워야지'라는 생각으로 많은 학생들이 참가를 신청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이른바 '스펙 관리' 차원에서 유료 프로그램이라도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었다.

이 문제를 트위터와 페이스북상에서 지적하자, 뜻밖에 청년들의 기타 제보가 이어졌다. 해당 미술관이 전시장에서 작품을 해설하는 도슨트를 모집하며 약소하나마 수고비와 식대를 지급하기는커녕, 거꾸로 참가비를 받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엔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닐까 했다. 하지만 '문화자원 봉사활동에 대한 확인증'을 발행한다는 것을 미끼로 일반인에겐 9만 원, 학생에겐 7만 원을 사전 청구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해당 미술관의 예술연구자 그룹을 모집한 책임자라는, 프리랜서 큐레이터 아무개씨가 항의 편지를 보내왔다. 반성하기는커녕, "국가 보조금이 전혀 없는 사립미술관의 경영을 전혀 모르시는 비현실적인 발상"이라며 공개 사과하라고 주장했다. 간절하게 커리어 쌓을 곳을 찾는 미술계의 젊은이들을 인턴십 프로그램으로 착취하는 것도 비도로 지탄받아 마땅할 마당에,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상당한 참가비를 걷으면서도 전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 정도 교육 비용은 자체 예산으로 집행하거나, 기업 광고 후원을 받아 충당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1998년 7월 문을 연 아트선재센터는 대우재단(복지재단)이 경주선재미술관의 서울 분관으로 설립한 기획전 위주의 현대미술관으로, 그 이름은 1990년 11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요절한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씨의 맏아들 선재씨를 기리는 뜻을 지녔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전격 해체되면서 미술관의 정상 운영이 어려워졌고, 한동안 매각설이 나돌기도 했다. 대우재단의 자산이 거의 대우그룹의 주식이어서 운용할 자금이 크게 위축된 상태였기에, 무조건적인 기부 후원자를 찾거나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의 위탁 운영을 추진하는 등 애를 썼지만, 2005년 돌연 기획전을 중단하면서 개점휴업 상태에 빠졌다. 아트선재센터가 조용히 운영 재개에 나선 때는 3년 뒤인 2008년이다.

현재 아트선재센터는 (주)필코리아리미티드(옛 대우개발)가 운영하고 있다. 정희자 회장이 이끄는 필코리아리미티드의 자산 규모는 2005년 기준 1400억 원이 넘는다고 알려졌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은닉 재산으로 지목을 받았지만, 조세회피 지역인 케이맨군도에 설립된 유령회사(퍼시픽인터내셔널)가 지분의 90%를 소유한 터라 국고에 환수되지 않았다/못했다.

하지만 아트선재센터의 전시 기획은 필코리아리미티드가 아니라 '사무소'라 불리는 (주)스페이스포컨템포러리아트가 담당하고 있다. (아트선재센터의 학예실장 자리는 수년째 공석이다.) 김우중 전 회장과 정희자 회장의 딸인 김선정 교수가 이끄는 사무소는, 엄연한 '회사'(상법인)로서 아트선재센터의 전시 기획뿐만 아니라 관외에서의 다양한 전시 기획과 미술품 판매, 공공미술조각 사업을 벌여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희자 회장은 최근 한 경제지와의 인터뷰에서 "서울 아트선재는 우리 딸의 몫이고 선정이가 더 잘할 거예요"라고 의견을 피력한 바 있기도 하다. 경주의 선재미술관은 지난 8월 공매를 통해 한 수산업체에 매각됐으나, 보도에 따르면 "금융 당국은 김우중 전 회장과 관련된 옛 대우그룹 인사가 관련됐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아트선재센터의 소유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김선정 교수의 알려진 재산 규모 또한 상당하다. 이수그룹 회장의 부인인 그는, 2006년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수화학(6.08%) 지분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이후, 이수건설(29.0%)과 이수페타시스(8.71%)의 대주주 자리에 올라 있다"고 하니, 국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운영되는 문예진흥기금의 지원 같은 걸 바랄 처지는 아니다.

그런데도 사무소의 전 대표인 큐레이터 아무개씨는, 국가의 지원 없이 운영되는 미술관의 어려움 운운하며 인턴 프로그램 참가자들에게 참가비 받는 일의 불가피함을 역설했다. 왜 그는 내로라하는 부자가 소유한 미술관을 시민의 세금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대우그룹의 분식회계(금융감독원이 밝힌 규모는 최소 22조9천억 원이고, 피해 주주만 37만 명에 달한다)가 국가 경제에 미친 악영향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정희자 회장이나 김선정 교수는 왕년에 누리던 대재벌의 위상을 잃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일반 기준에 비추어 천문학적인 부를 소유한 최상위 부유층이다. 그런 이들이 쥐락펴락하는 사립미술관에서 전시 안내를 맡을 도슨트 희망자(즉 자원봉사자)에게 프로그램 참가비를 받고, 인턴으로 일하기를 희망하는 미술 전공자들에게 교육 프로그램 운영비를 부담시킨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이런 비도는, 비단 아트선재센터와 사무소만의 문제가 아니다. 엉터리 갤러리에 '대안'이란 이름을 붙여놓고, 공공기금으로 인턴을 뽑아 잡무를 시켜 먹는 자칭 '독립 예술 감독'들은 더 악질적인 모양이다. 미술계의 열악한 환경에서 인턴으로 일한 젊은이들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잡무, 회계 조작, 성추행 등을 경험하며 환멸을 느꼈고, 결국 큐레이터와 평론가의 꿈까지 접게 됐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토해냈다. 그들이 느꼈을 상실감을 생각하니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치미는 울화에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떨렸다.

젊은이의 꿈을 악용하지 말자

"부당한 일 처리는 바로 앞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몹쓸 묵계가 되기 쉬우므로 그때그때 시정을 요청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청년들을 독려해보기도 했다. "불합리한 관행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썩은 놈들 사이에서 버티고 생존하는 것도, 큐레이터와 평론가의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라고 우겨보기도 했다. 하지만 미술계의 청년 노동력 착취는 어디까지나 기성세대가 책임을 지고 바로잡아야 할 문제다.

미술계의 일부 기득권자들은, 비정규직으로 학예 인력을 채용해 큐레이터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몹쓸 관행도 모자라, 이제는 인턴 프로그램으로 청년들을 꼬여 적절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고 부리는 일을 관례화하려 들고 있다. 비도의 만연은, 결국 미술계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내쫓아 공멸의 길을 약속할 따름이다.

'그럴듯한 명목을 내세워 청년들을 저임금이나 무보수로 혹은 참가비를 내도록 꾸며 일꾼으로 부려먹는 일은 범죄나 다름없다'는 인식의 전파와 고용 환경 개선 등의 대책 마련을 위한 실태 조사가 시급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꿈 많은 젊은이를 착취하는 자들은, 언젠가 반드시 죗값을 치르는 법"이라고 나지막이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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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근준 AKA 이정우 서울대학교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미술이론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딴 뒤, 미술교육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아트선재센터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시공아트 편집장, 그리고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등이 대표 저작이고, 현재 <현대미술방법론: 오늘의 미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제)를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