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가 유일하게 죽지 않는 방법이었을지도 (1)
웨스 앤더슨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을 중심으로
미셸 푸코는 에두아르 마네를 캔버스의 물질적 속성을 드러낸 최초의 화가로 지목했다. 기존의 화가들이 긴 사선과 나선을 강조해 회화의 평면성을 교묘히 숨겼던 것과 달리, 마네는 수직축과 수평축을 교차시켜 캔버스의 틀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킨다. 재현 공간 너머를 바라보는 인물은 자연스럽게 감상자에게 캔버스 너머의 무한한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영화를 그림에 비유할 수 있다면,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마네의 회화를 닮았다. 카메라는 종횡을 가로지르며 기계적인 붓질을 선보이고, 등장인물들은 외화면을 바라보거나 관객을 향해 말을 걸며 스크린 너머를 드러낸다. 푸코의 사유를 따른다면, 웨스 앤더슨의 각진 카메라 움직임은 영화 상영의 물질적 특성, 즉 필름이 영사되는 이차원의 평면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의 카메라가 오르내리는 트레일은 종횡에 그치지 않는다. 스크린에 깊이감을 부여하는 z축, 디제시스 내부로의 움직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네는 의도적으로 두꺼운 벽을 배치해 원근감을 소거하며 작품 전반의 입체감을 차단했다. 반면, 웨스 앤더슨의 미학적 구도는 세 방향의 축으로 구성되어 서사가 몸담는 공간의 입체성을 드러낸다. 좌표공간 위에 놓인 각진 육면체는 <로얄 테넌바움>(2001)과 <개들의 섬>(2018),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의 오프닝 시퀀스가 노골적으로 가리키듯 연극 무대를 연상시킨다. 일정한 부피를 지닌 연극 무대는 감독 특유의 강박적인 프레이밍을 위한 최적의 공간을 제공한다. 조그만 창을 통해 거대한 현실 세계의 일부를 엿보는 영화들과 달리, 무뚝뚝한 육면체 영화는 무대의 유한성을 감추지 않는다.
무한한 세계를 그리는 영화 중에서도 종종 과잉된 재현을 통해 자기 반영적 층위의 문을 두드리는 작품들이 있다. 연극이라는 키워드를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네아스트는 <버드맨>(2014)을 연출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다. 컷 분할을 극단적으로 절제하는 편집 방식은 뛰어난 몰입감을 선사하며, 무한히 확장하는 세계를 스크린에 재현한다. 이토록 중단 없는 이냐리투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회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카메라다. 곰과 혈투를 벌이는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입김이 렌즈에 닿는다.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2022)에서 실베리오(다니엘 히메네스 카초)가 마주한 댄서가 그를 지나쳐 카메라를 향해 안부 인사를 건넨다. <버드맨> 속 카메라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주인공만큼이나 놀라 허둥댄다. 이냐리투의 카메라는 단순히 세계를 바라보는 도구를 넘어선다. 마치 한 명의 종군기자처럼, 카메라는 직접 영화 세계 내부에 좌표를 점유하며 사건을 포착한다.
위 세 작품과 정반대로 ‘소통 3부작’으로 불리는 이냐리투의 초기작들은 컷을 잘게 잘라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교차한다. 필모그래피 정중앙에 위치한 <비우티풀>(2010)을 살펴보면, 감독이 왜 정반대 스타일을 추구하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컷은 여전히 빠르게 전환되지만, 한 남자의 사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극은 초기작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유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이 날아가는 새를 바라볼 때 그의 시선을 따라 패닝하던 화면은 곧 서러운 남자의 표정으로 복귀한다. 시선에서 시작되어 최종적으로 신체 밖에서 인물을 비추는 자연스러운 전환,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굳건히 드러내는 카메라가 발아하기 시작한다.
이냐리투의 전회는 일면 연극적 요소를 차용한 것이다. 시공간을 거듭해서 빠르게 교차하는 초기의 기교는 분명 영화 예술만의 영역에 가깝다. 여러 위치에 카메라를 배치하며 연극의 고정된 시점을 넘어서긴 하지만, 웨스 앤더슨 역시 스크린에 재현된 공간이 연극 무대처럼 보이길 원한다. 리얼리즘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서 있는 두 예술가가 연극을 경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는 그들이 마주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프랙탈 영화
웨스 앤더슨에 대한 비평은 특유의 우아한 미장센에 현혹되어 형식적인 측면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다. 강박적인 대칭미와 반짝이는 인서트 컷은 관객의 눈을 사로잡지만, 그의 작품에 스며든 잔혹함은 다각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아기자기한 캐릭터와 실소를 유발하는 블랙코미디는 그 잔혹 동화적 측면을 오래도록 감추어 왔다.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극단적인 열등감에 시달린다.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수십 마리의 동물이 처참한 최후를 맞으며, 기한이 만료된 사랑은 다가올 이별을 예고한다. 그러나 이 모든 비극에도 등장인물들은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강아지들이 분쇄기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전자오락처럼 묘사한 <개들의 섬>(2018)은 죽음이 일종의 유희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외상적 사건들 속에서 죽음이 내면화된 것일까?
웨스 앤더슨의 작품을 관통하는 동화적인 색채에 주목하면, 참혹한 과거와 죽음에 매몰되기를 거부하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떠올릴 수 있다. 그의 영화 대다수는 어린아이 또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지 못한 어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견딜 수 없는 비극을 경험한 아이는 트라우마 증세를 호소한다. 그렇다면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 꾸준히 발견되는 해피엔딩은 일종의 ‘포르트-다(fort-da)’ 놀이로 바라볼 수 있다. 아이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의도적으로 반복하며 능동적인 주체로 거듭난다. 아이를 닮은 예술가는 자신의 삶을 제삼자의 위치에서 서사화하며 모든 상황을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몰아붙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예술가가 삶이 남긴 상흔을 승화하기 위한 절박한 노력이다. 감정을 절제하는 캐릭터는 과거의 사건과 거리를 두기 위한 장치로 작용한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메마른 표정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죽음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들은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에 격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모든 삶이 한 편의 이야기라는 동화적 상상이 미처 닿지 못한 어둠 속엔 항상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어린아이가 남아 있다. <문라이즈 킹덤>(2012)의 꼬마 스카우트 대원들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출을 감행한다. 동심을 잃은 어른들이 캠핑용 텐트로 상징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무자비하게 무너뜨린다.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던 아이들은 끝내 무지막지한 현실과 타협하지만, 그들만의 ‘문라이즈 킹덤’은 그림 속에 영원히 남겨진다.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는 극중극에서 배제된 여배우(마고 로비)의 몸을 빌려 미처 발화되지 못한 이야기를 재현한다. 딸의 죽음조차 웃음의 소재가 되는 영화에서, 오직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진 여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놀랍도록 애틋하다. 마찬가지로 <프렌치 디스패치>(2021)에서 기자들은 죽음을 맞이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편집장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는 영원히 입을 다문 채 봉인되는 것일까? 바로 이 지점에 웨스 앤더슨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따스함이 놓여 있다. 그의 작품 대다수는 액자식 구조를 취한다. 러시아 전통 인형처럼 육면체 무대 속에는 또 다른 육면체가 숨어 있다. 심지어 넷플릭스와 협업한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2023)는 끊임없이 z축을 파고들며 ‘극중극중극’ 구조를 선보인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담길 수 있다면, <다즐링 주식회사>(2007)와 <컴 투게더>(2016)는 열차 손님이 담긴 각 창문의 개수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생동하는 이야기들은 심지어 한 편의 영화 속에 갇히는 것조차 거부한다. <다즐링 주식회사> 속 작은 이야기는 단편 영화 <호텔 슈발리에>(2007)로 완성되고, <커진 벤 트루프 스크리닝>(2012)과 <두 유 라이크 투 리드>(2012)는 <문라이즈 킹덤>에서 파생된 짧은 이야기들이다. <다즐링 주식회사>에서 삼형제를 공포에 몰아넣은 독사는 <독>(2023)에서, <로얄 테넌바움>(2001)에서 어른아이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노란 텐트는 <문라이즈 킹덤>의 스카우트 텐트로 재등장한다.
영화 내부와 외부를 가리지 않고 발산하는 이야기는 마트료시카 인형의 단순한 반복 구조를 넘어선다. 크고 작은 육면체가 끝없이 되풀이되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 세계는 프랙탈 구조를 띤다. 이 기하학적 형태는 자기 유사성이라는 화려한 외양만큼이나 언제든 다음 도형을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입을 다문 이야기는 언젠가 말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통해 비로소 가능태의 지위를 얻는다. 지금도 그의 영화 속에는 생명력을 지닌 수많은 이야기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꿈틀댄다. 이것이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 차가움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과거의 상처와 서러운 감정을 매몰차게 외면하지만, 동시에 단 하나의 사연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던, 단 하나의 과거도 소홀히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아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사진 출처 : IMDB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