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들의 조용한 의식

2012-11-12     로리 파쇼

"7천~8천 명의 실종자는 승리의 대가였다." 1976~83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 때 희생당한 사람들의 수를 이야기한 사람은 86살의 구금자였다. 그는 독재자 호르헤 라파일 비델라로 반인륜 범죄로 현재 종신형을 살고 있다. 비델라는 "오히려 감옥에 수감된 지금 매일 마음 편하게 잘 수 있다"고 고백한다.

비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 캄포데마요에 위치한 군사감옥의 작은 독방에 갇혀 있다. 이 독방에는 와인색 이불의 조촐한 침대가 있고, 그 위에는 십자가가 하나 걸려 있다. 이곳에서 그는 수요일마다 아르헨티나 저널리스트 세페리노 레아토를 만나 인터뷰했다. 세페리노와 비델라의 9번에 걸친 만남과 28시간의 면담이 저서 <최후의 조치>(1)에 정리돼 있다. 이 책은 1976년 3월 24일 쿠데타의 발생, 군사정권 내부의 권력투쟁,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아르헨티나의 기업 총수들, 후안 도밍고 페론 장군의 미망인 이사벨라가 쿠데타로 실각한 뒤 투옥된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밝힌다. 비델라는 세페리노에게 노동운동가, 사제, 야당 정치인 등 자신의 정권에 도전하는 인사들을 처리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비델라는 자신의 딜레마도 털어놓았다. 정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던 반체제 인사들…. 그러나 이들을 총살하거나 법정에 세우는 일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1975년 9월 스페인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는 반파시스트 애국혁명전선 소속의 인사들이 처형당하자 국제사회는 맹비난했다. 반면 칠레 독재정권이 실시한 조직적 억압은 국제사회로부터 유감이라는 말만 들었다.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자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다른 방법을 사용했는데, 바로 최후의 조치였다. 비행기에 정적들의 주검을 싣고 가서 바다에 떨어뜨려 증거를 영원히 없앴다.(2) 방해되는 존재들을 은밀하게 처리하는 일이었다.

세페리노는 저서에 비델라의 고백 외에 여러 저널리스트와 전직 군인들의 증언도 실었다. 이런 자료들은 당시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정권의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분석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공정한 시각을 담고 있는 세페리노의 저서는 이사벨라 페론과 페론을 지지하는 몬토네로스(게릴라 단체)의 책임을 동시에 지적한다. 정부의 테러와 혁명 게릴라의 책임을 공정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1975년 10월 5일 보병사단이 공격을 받자 군대는 일련의 명령을 받았는데, 비델라는 이 명령이 일종의 '살인면허'라 했다. 그 역시 나중에 이를 이용했다고 한다.

비델라는 지나치게 폭력에만 의존한 방식은 안타깝지만 후회는 전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조직적인 아동 납치 계획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일부 아이들은 납치되고 또 다른 아이들은 팔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아이들은 불임 가정에 보내졌는데 좋은 의도로 시작됐다."

비델라의 증언은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우가르테의 증언을 생각나게 한다. 그 역시 자신의 행동에 어떤 후회도 없다고 했다. 1979년 출간된 저서 <결정의 날>(3)에서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공산주의 마약에 취한 사상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 정부를 전복한 최초의 인물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민주주의로는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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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로리 파쇼 Laurie Fachaux

번역 이주영 ombre2@ilemonde.com

(1) Ceferino Reato, <최후의 조치>(Disposicion Final), Sudmericana, 부에노스아이레스, 2012.
(2) 이 발언에 대해서는 자료 조사가 꼼꼼히 이루어진 필리프 케르의 소설 <부드러운 불꽃>(Une douce flamme)을 읽으면 된다.
(3)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우가르테, <결정의 날>(Le jou décisif), Editorial Adrés Bella, 칠레 산티아고,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