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인영의 무용가 집중탐구 (1) 안무가 장혜림

2025-02-18     손인영 무용가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을 지낸 손인영 무용가가 본지에 주목받는 안무가 집중 탐구시리즈를 게재합니다. 인천시립무용단 예술감독과 제주도립무용단 상임안무자, 서울예술단 무용감독을 역임한 손 무용가는 성균관대에서 춤 사위의 철학적 의미를 탐구해 동양철학 박사를 받았고, 2005년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나우무용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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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면서도 묵직한, 차분하면서도 나긋한 춤새

작품에는 안무가의 내면이 오롯이 드러난다. 안무가 장혜림의 작품에는 차분하고 나긋한 향기가 묻어있다. 장혜림과 마주하면 작품의 분위기와 그녀가 무척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정도를 걷는 그녀의 발걸음이 그녀 춤의 선 만큼이나 명확하고 단단하다. 섬세하면서도 묵직한, 그러면서도 부드러움과 명징함을 드러내는 안무가 장혜림이 어떤 길을 걸어왔기에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녀는 2023~24년에 안무가로서 정상에 올랐다. 2회째인 서울문화재단이 수여하는 ‘서울예술상’에서 연극과 시각예술 등 여러 장르의 최우수상의 최고상인 대상을 수상했고, 영국공연예술의 메카인 The place에서 초청공연을 하는 쾌거를 누리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수상을 한 재능있는 무용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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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무용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뭔가요?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학교 특별활동으로 무용부가 있었는데, ‘무용’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설렘을 느꼈죠. 무용부에서 다양한 음악에 맞춰 율동을 배우면서 춤추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특별히 제가 좋아하는 음악과 동작이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무용을 더 진지하게 배우고 싶어서 무용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곳에서 발레, 현대무용, 한국무용 등 여러 장르를 접하며 각각의 특징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 전통음악에 깊은 매력을 느꼈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하게 되었죠. 결국, 한국무용을 전공으로 선택하여 예술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무용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작품 수상 경력이 많은데, 안무에 관한 관심은 언제부터 생겼는지요?

“안무가 창조의 행위라는 것은 춤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깨달았어요. 이후 대학 때, 창작법 수업을 통해 안무의 개념과 다양한 방법론을 이론적으로 배우고 실습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죠. 처음에는 안무가 너무 어렵고, 다른 친구들과 협력하는 과정이 쉽지 않아서 ‘그냥 춤만 추고 싶다’라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작품을 완성하고 난 후의 성취감은 춤을 출 때와는 또 다른 특별한 감정이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한예종에서는 매 학기 창작발표회를 통해 제가 바라보는 세상을 춤으로 표현해 보기 시작했어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의 의미와 무용수들과의 소통 방식을 배우며 창작의 즐거움을 발견한 시간이었죠. 

지금도 작품을 만들 때면 동작에 깊이를 담아내는 무용수의 존재감, 움직임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많이 느끼곤 합니다. 무용수들이 안무가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더 해 몸짓으로 풀어낼 때 작품은 더욱 특별해지거든요. 이렇게 춤이 하나의 언어인 것을 깨닫고 배웠기에, 이제는 제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내재율’은 내 춤의 중심이 되어 매순간 호흡”

-춤 스타일이 굉장히 섬세한데, 어떻게 그런 섬세한 춤을 추게 되었는가요? 어떤 연습 과정을 거쳤기에 그런 섬세함을 가지게 되었는가요?

“제가 추구하는 춤의 근원을 찾자면, 선화예중·예고에서 배운 '바기본 호흡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이 호흡법은 제 은사 배정혜 선생님께서 한국춤 전공자들을 위해 특별히 연구하신 것으로, 무용수들이 자기 몸을 깊이 이해하고 한국 춤의 본질을 체득할 수 있도록 돕는 핵심 원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표현은 선생님께서 호흡을 설명하실 때 자주 언급하신 '내재율(內在律)'이라는 개념인데요, 이 가르침은 지금도 제 춤의 중심이 되어, 매 순간 호흡이 어떻게 내면에서 시작되어 몸의 움직임으로 피어나는지를 의식하게 만듭니다. 결국, 제 춤에서 발견되는 섬세함은 이렇게 호흡의 흐름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체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같아요.”

 

마른땅

-안무를 처음 시작하면 깜깜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다가 노하우가 쌓이면서 조금씩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또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 방법론이 생기는데, 혜림씨의 안무 스타일은 언제 완성이 되었는지요?

“처음 안무를 시작했을 때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죠.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하루 종일 작품만 생각했는데도 막상 무용수들과 연습을 시작하려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연습실에 온 무용수들을 돌려보냈던 순간들입니다. 그때는 정말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2014년에 99 아트컴퍼니를 설립하고, 10년 동안 작업을 이어왔는데요, 저희는 공연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함께 연습하고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대화해요. 우리가 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나에게 전통은 무엇이고, 동시대성은 무엇인지 등 서로가 바라보는 관점에 관한 대화를 많이 나누죠. 그것이 작품의 방법론을 구축하거나,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작품 스타일이 굉장히 깊고 생각을 많이 한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게 혜림씨 성격의 문제인가요? 비슷한 교육과정을 거쳐도 무용가마다 다른 스타일이 나오는데 혜림씨의 작품 스타일이 어떤 과정을 통했기에 그런건지 궁금하군요?

“저의 작품을 깊이 있게 바라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안무를 시작하면서 ‘리서치’에 대한 개념과 그것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이는 작품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고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전에는 제가 동작을 모두 만들어서 전달하거나, 제가 구상한 틀 안에서 무용수들을 움직이게 하는 작업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무용수나 다른 작업자들과 함께 단순히 동작을 만들고 구성하는 것을 넘어, 작품의 주제와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고 토론하며, 때로는 느슨한 제안을 통해 장면을 만들어 가기도 합니다. 주제에 관한 개인적 경험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 안에서 우리의 행위가 어떻게 연결될 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눕니다. 이렇게 다양한 시도들이 좋은 장면으로 담기고, 모두가 공동 창작한다는 개념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영혼에 울림을 주는 춤’을 추구”

 

연습실에서

-후배들을 키우는 것으로 아는데, 쉽지 않은 환경인데 왜 키우는지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어떤 마음가짐에서 나왔는지요? 내가 한창 작업할 때는 나 혼자 이루기도 어려운 환경이었는데, 요즘이라고 더 편하지 않은 환경일 텐데요. 착실하게 후배를 키우는 걸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먼저 후배들을 ‘키운다’라는 표현에 대해 겸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이것은 동료들과 함께 의미 있는 일들을 찾아 실천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저희 99 아트컴퍼니가 추구하는 것은 ‘영혼에 울림을 주는 춤’입니다.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무대와 일상을 모두 아우르는 저희의 철학이 되었습니다. 이 가치를 중심으로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기부형 워크숍 ‘아만나’를 통해 춤의 가치를 더 많은 분과 나누고 있고, ‘99 아트컴퍼니 장학금’으로 꿈을 키워가는 무용 전공생들과 함께하고 있으며, ‘몸의 시’ 프로젝트로 새로운 창작자들의 발걸음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모두 예술이 우리 삶 속에서 진정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 조금씩 ‘학교’라는 안정된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 작업하는 친구들이 생기고, 또 그런 친구들의 작업이 괜찮은 경우도 제법 보이더군요. 이런 현상에 대한 혜림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세대 변화와 함께 한국무용의 발전 방향도 다양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할 당시만 해도 대부분 무용수가 직업무용단 입단을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의 한국무용 전공자들을 보면, 무용단 활동보다는 개인 작업이나 해외 활동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대학무용단의 성격도 많이 변화했습니다. 과거에는 졸업생들이 모여 지도교수님의 스타일을 중심으로 무용단의 색깔을 만들어갔다면, 현재는 개별 무용수들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존중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세계의 흐름에 한국춤 전공자들도 발맞춰 가는 것 아닌가 싶어요. 개인 고유의 생각이 작품에 반영될 때 독창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잘하는 무용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예술가를 키워내야”

 

침묵

-나는 한국의 무용가들이 교육을 너무 잘 받아서 개성이 없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요. 예술은 개성이 있을 때, 비로소 자기만의 예술세계가 형성되는데, 안타까워요. 혜림씨 생각에 개성있는 안무가가 나오려면 어떤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까?

“한국의 무용가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개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 역시 그런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개성 있는 안무가가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환경에 대해 많이 고민해 왔습니다. 스웨덴의 무용수들과 작업했던 경험이 떠오릅니다. 제가 춤의 방법론이 전혀 다른 한국에서 온 안무가였기에, 무용수들 모두가 호기심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했고, 제 몸을 직접 만져봐도 되는지 물어보며 근육이 어떻게 쓰이는지 자세히 알아가려 했습니다. 안무가의 의도와 생각이 무엇인지 매일 물었고, 자신의 방향이 안무가의 생각과 함께 가고 있는지도 수시로 확인했죠. 반면 한국의 학생들이나 무용수들은 춤을 정말 잘 추는데도 불구하고 질문을 하지 않거나, 질문에 답하기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도 소리 내어 질문하는 것을 주저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안무가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이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나누는 문화 속에서 춤을 추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잘하는 무용수’가 아닌 ‘생각하는 예술가’를 키워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모두 함께 고민하고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터널을 지나 빛을 발견한다는 믿음으로 작업을 지속해”

-안무가로서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 어떤 위기와 기회 또는 행운들이 있었는지요? 

“안무가뿐만 아니라 창작하는 모든 사람은 외로운 시간을 보내게 돼요. 그리고 무대에서 보이는 장면보다 훨씬 더 많은 장면을 만들고 버리기를 반복하죠. 때로는 대중문화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면서, 제 작업의 가치를 의심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동료들과 우리 작업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여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어려운 길 가운데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인 것 같아요. 한 안무가가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안무란 미지의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해요. 그렇게 걷다 보면 그 터널을 지나 빛을 발견하게 된다는 믿음이 작업을 지속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 중요한 공연과 수상 경력을 알려주시고 앞으로 안무가로서의 포부는 무엇인가요?

“<피안의 여행자들>이란 신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전통 무용가, 음악가와 협업을 한 작품이에요. 연습 과정에서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즐거움과 열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어요. 연습실에서 만들어가는 특별한 에너지와 순간들을 관객분에게 전해드리고 싶어요. 안무가로서 제 작품을 통해 삶이 위로받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라고, 표현해 주시는 관객을 만나면, 제가 하는 일의 가치를 다시금 발견하게 돼요. 정말 소중하죠. 이런 소중한 순간들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앞으로도 진정성 있는 작업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안무가 장혜림이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된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안무가들이 생계를 위해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잡으면서 작품 활동이 뜸해지는 경우가 많다. ‘안무가’는 직업이 될 수 없는 한국의 실정에서 교수가 되길 희망하는 무용가들을 말릴 수는 없다. 장혜림 안무가가 교수가 되지 않고 ‘안무가’라는 직업을 택해도 후회하지 않는 문화적 환경이 만들어 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교수’라는 직업보다 안무가라는 직업이 훨씬 존경받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문화적 환경이 조성될 때, 비로소 한국에서 ‘무용’이 예술의 한 장르로서 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장혜림]
2023. 제2회 서울예술상 ‘최우수상’ 및 ‘대상’ 수상
2024. 제38회 한국무용제전 ‘최우수 작품상’ 수상
2024년 5월. A Festival of Korean Dance 영국 문화원 & The Place 초청 <제, 타오르는 삶>
2024년 9월. Fabbrica Europa 이탈리아 초청 <제, 타오르는 삶>
2025. 2월. <피안의 여행자들> 신작 공연
2025. 11월. 체코,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제, 타오르는 삶> 투어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