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희망버스 재판 투쟁기
르 디플로 에세이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떡을 먹으면서 툭탁거린다.
"엄마, 형이 내 떡 먹으려고 해."
오늘이 엄마 판결일이라는 것을 아는 아이들이 판결에 대해선 묻지도 않는다. 다른 녀석들은 어려서 그렇다지만 중학생인 첫째까지 어찌 저럴까? 섭섭하다.
나처럼 반듯하게 사는 사람이 재판이라니, 게다가 내 죄명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이다. 그러므로 나는 형사재판 피고인.
사연인즉,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 나는 작년 6월 <오마이뉴스>에서 희망버스 동행취재를 부탁받았다. 희망버스는 정리해고를 막고자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씨를 응원하러 가는 사람들이 탄 버스다. 늦은 밤, 나는 탑승객들과 함께 사다리를 타고 부산 한진중공업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한진중공업 가족대책위 아내들이 무대에 올랐다. 그중엔 아기를 안은 젊은 엄마 둘이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코끝이 싸해지고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직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그 엄마들의 힘겨움이 가슴에 절절히 와닿았다. 세 아이의 엄마인 나는 그 고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날, 한진중공업의 어떤 이보다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의 사연이 궁금했다. 젊은 엄마에게 "아기가 몇 개월이에요?" 하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11개월. 돌도 안 된 아이가 집회 현장에 있있다니. 마음이 아팠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어린 아기를 둔 엄마를 길거리로 나서게 한 걸까?
젊은 엄마의 남편은 정리해고 반대투쟁으로 집에 못 들어온 지 6개월이 넘었다. 젊은 엄마는 남편이 사라진 집에서 홀로 아기를 키우고 있었다. 젊은 엄마가 사는 집은 회사 사택으로 법원에선 이미 퇴거명령서를 보낸 상태였다. 앞뒤가 막힌 막막함. 그 이야기를 취재수첩에 담아 기사로 썼다.
그 후 4주 뒤 나는 부산 영도경찰서에서 소환통지서를 받는다. 폭우로 나무가 쓰러진 날, 담당 형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몇 달 뒤 난생처음으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고는 결국 벌금 200만 원 형을 받았다. 단 네 문장으로 표현되는 사법 처리 과정이 평범한 삶을 살던 내겐 무척 힘든 일이었다. 경찰서에서 보내는 등기우편물 하나에도 손이 떨리고, 형사의 전화 한 통에도 무릎이 꺾였다. 사실 200만 원 벌금 내버리고 손 떨리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부당하다는 생각에 정식 재판을 신청했다. 부산법원에 재판받을 각오를 하고 신청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용기가 대단했지 싶다. 다행히 가까운 성남법원으로 재판이 옮겨졌다.
정식 재판을 신청할 땐 이렇게 공판이 길어질 줄 몰랐다. <오마이뉴스>가 내게 취재 요청한 문서와 그날 작성한 기사를 증거로 내면 쉽게 무죄판결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1차 공판은 내가 피고인 '강정민'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싱겁게 끝났다. 2차 공판은 변호사와 검사가 누구를 증인으로 신청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났다. 3차 공판에선 검사 쪽 증인인 한진중공업 사람과 부산 영도경찰서 형사가 나와 증인심문을 받았다. 4차 공판에서는 우리 쪽 증인인 기자들이 증인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5차 공판에선 변론을 종결할 줄 알았다. 벌금 200만 원 재판에 증인을 부르는 것도 특이한 경우라고 했다. 남편이 마지막 재판이라며 휴가를 내서 차로 태워다주었다. 그런데 되레 5분 정도 늦었다. 법정에 들어가자마자 피고인석에 앉았다. 그런데 검사가 둘이었다. '어, 이게 뭐야. 전에는 여검사 혼자 들어왔는데 남자가 둘이네.'
변호사가 증거를 제출했다. 증거는 내가 <오마이뉴스>에 여태껏 작성했던 40여 편의 기사다. 기사 한 편당 A4용지 5장은 된다. 그런 기사를 40편이면 200장이 넘는다. 기사를 일일이 프린트해 3부씩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 600장이다. 변호사가 가방을 항상 2개씩 가지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재판 비용으로 쓰기에 부족한 수임료를 받고 변호사가 재판을 맡아주었기에 더욱 미안했다.
그런데 검사가 증인을 새롭게 신청한다고 했다. 나와 함께 재판을 받는 월간지 기자를 조사한 형사를 부른다고 한다. 검사 쪽 요구가 받아들어졌다. 다음 공판일을 잡고 5차 공판이 끝났다. 재판을 시작한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내가 피고인석을 나오자 방청석에 앉아 있던 남편이 묻는다.
"뭐야 재판 안 해? 이게 끝이야?"
"응. 검사가 증인 신청한다잖아."
뭔가 이상하다. 법정에서 나온 변호사가 설명해준다.
"4차 공판이 끝나고 우리 재판 기사가 신문에 나왔잖아요. 그 기사가 나오고 검사가 바뀐 것 같아요. 공판검사 말고 다른 검사가 들어오네요."
검사가 바뀌면 우리에게 불리한 게 아닐까 불안해진다.
6차 공판에선 함께 재판받는 월간지 기자를 조사한 형사에 대한 증인심문이 있었다.
7차 공판은 10월 11일 변론 종결일이었다. 판사가 몇 가지 심문을 했다.
"강정민씨는 한진중공업 안에 들어가서 어떤 일을 했나요?"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검사는 심문할 것이 없다고 했다. 내심 고마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란다. '최후진술문'을 읽었다. 내 목소리가 떨린다.
"…제가 일곱 차례 이 법정에 선 순간에도 몸은 재판정에 와 있지만 마음은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을 걱정한 경우가 많습니다. …6차 공판 땐 5학년 아이에게 감기에 걸린 여섯 살 막내를 맡기고 법원으로 향하기까지 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그동안 세 아이가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공판 과정에서 저와 아이들만 고생한 것은 아닙니다. 제 재판엔 여섯 분의 증인이 귀한 시간을 내서 법정에 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공판에도 수고하시는 많은 분이 계십니다. 전 이 모든 것이 사회적 비용이라 생각합니다.
그날 취재현장에 들어간 제 행동이 이렇게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죄를 따져야 하는 사건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루빨리 저와 제 가족들이 재판 때문에 받는 크고 작은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다 읽고 자리에 앉았다. 나를 보는 변호사의 얼굴이 밝았다. 잘 읽었나 보다. 함께 재판을 받는 월간지 기자도 준비해온 글을 읽었다.
"검사, 구형하세요."
"두 사람 모두에게 벌금 200만 원을 구형합니다."
당황스럽다. 벌금 200만 원이면 구형할 수 있는 최대치다.
판사는 다음 선고일을 알려준다. 11월 1일 오후 1시 40분에 선고를 한단다. 3주일간 기다리는 내내 마음이 떨렸다. 변호사도 나도 무죄를 기대했다. 하지만 검사가 벌금 200만 원을 그대로 구형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죄가 나오더라도 검사가 항소해서 2심까지 갈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11월 1일 여덟 번째 법정에 섰다. 판사는 판결문을 읽는다. 판사가 분명 한국말을 하는데도 뭐라는지 통 못 알아듣겠다. 하지만 느낌은 잘못했다는 말이다. '유죄구나.'
"벌금 50만 원 선고합니다."
변호사는 다른 재판 일정과 겹쳐 법원에 오지 못했다. 대신 참석한 변호사 사무실 직원의 말을 들으니 얼마 전 비슷한 사건의 유죄판결이 우리 재판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한다.
난 판결 선고일 하루 전까지 내가 먼저 항소하지는 않을 것이라 각오했다. 왜냐하면 경기도 하남 집에서 재판을 받는 성남까지 여덟 차례 다니는 것이 아이들 때문에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심 재판은 성남도 아닌 수원에서 열린다니 대중교통으로는 가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린다. 직행버스가 있지만 그것도 하루에 4회 왕복할 뿐이다. 그래서 난 검사에게 항소당하면 당했지 나 스스로 2심에 가진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니 적어도 항소할 수 있는 기간 일주일 내내 고민하고 마지막에 결정하리라 각오를 했다.
함께 재판을 받은 월간지 기자는 벌금 70만 원이 나왔다. 기자가 내게 묻는다.
"당연히 항소하실 거죠?"
"전 항소하기 싫어요. 검사한테 항소당하고 싶은데."
나와 아이들만 생각한다면 항소하는 것보다는 벌금 50만 원을 내는 것이 훨씬 좋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항소를 안 하면 함께 재판받은 기자가 기운 빠지겠지 싶었다. 비슷한 경우로 유죄판결을 받은 기자가 벌금을 내고 항소하지 않은 것이 우리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했다. 결국, 이 말은 내가 벌금형을 받고 항소하지 않는 것도 또 다른 누구의 판결에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말이다. 변호사는 전화로 "항소 취하는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 일단 항소장을 접수하라"며 나를 설득했다.
결국 난 항소장을 접수하고 법원을 나섰다. 머리가 멍하다. 취재의뢰를 한 증빙 서류와 작성한 기사를 증거로 제출했는데도 법원이 내게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동안 여덟 차례의 법정행이 다 물거품인 듯 억울하다. 아이들 고생은 또 어떤가? 이 정도 벌금액이면 죄를 인정하고 줄여달라고 했을 때 받을 벌금과 비슷한 액수다. 그랬다면 아이들 고생 덜 시키고 재판도 훨씬 빨리 끝났겠지.
항소하면 무죄가 될까? 무죄가 나오면 검사가 항고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지. 벌금 200만 원 사건을 대법원까지? 그럼 2년 내내 재판에 한쪽 발이 잡힌 채 살아야 한다. 누구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고민을 나눌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다. 집에 도착한 나는 이불에 드러누웠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간식을 먹는다. 판결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묻지도 않는 아이들이 섭섭했는데 30분쯤 지났을까 첫아이가 묻는다.
"엄마 오늘 판결 나온다고 했잖아."
"50만 원."
'르 디플로'에 재판투쟁기를 모레까지 써주기로 했는데 머리엔 잡생각이 떠돌아 글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벌금 50만 원은 벌금 내기에 부담스런 액수도 아닌데 기분이 나빴다. 마음이 상했다. 겨우 50만 원에도 이런 기분이 드니 몇억씩 배상 판결받은 해고노동자들은 얼마나 막막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어떻게 됐어?"
"어, 50(만 원)."
유죄라는데도 언니 목소리는 여전히 밝다. 복잡한 머릿속 이야기를 털어놨다.
"정민아, 여기서 그냥 끝내면 나중에 네가 찜찜해. 그냥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항소해."
언니 목소리가 더없이 다정하다. 인생 선배인 언니는 이렇게 내가 힘들 때 용기 내게 도움을 준다. 정신을 차리고 변호사에게 재판투쟁기를 쓰기로 했다는 것과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문자로 물었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변호사다.
"강정민씨, 오늘은 글 쓰지 말고 좀 쉬세요."
"네?"
"저도 지금 기분이 안 좋아서 친구 불러 술 한잔 하고 있어요. 강정민씨도 오늘은 술 한잔 하세요. 그리고 우리 오늘만 우울하기로 해요. 내일부터는 기운 내셔요."
아, 이 변호사도 나처럼 마음이 상했구나. 고맙다. 개인적으로는 피하고 싶은 이런 일들이 내게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그 모습을 발견할 기회를 준다. 난 결국 수원까지 항소심을 받으러 가겠지.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이 있으니….
*
글 강정민 세 아이의 엄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의 이강혁 편집디자이너는 희망버스 동행취재 중 경찰에 채증을 당해 강정민 기자와 함께 8차례의 재판 끝에 건조물침입 및 도로교통방해 혐의로 벌금 70만 원을 선고 받고 항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