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첨단전쟁 기술을 찬양하는 서방 언론
가자지구 파괴자인 이스라엘에 대한 서방의 이중잣대
텔아비브와 하마스, 2월 말까지 휴전 합의. 전투의 완전한 중단,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철수, 그리고 인질 및 수감자 석방 문제는 추가 협상을 통해 어렵게 타결이 되었다. 평화 정착의 전망이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이번 분쟁이 남긴 교훈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레바논에서 전통적인 군사 목표를 넘어서는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지도부가 제거되었으며, 군사적 역량 또한 크게 약화하였다. 인질 문제는 오랜 협상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는 갈등의 일부일 뿐이며, 텔아비브는 여전히 집단적 보복과 영토 확장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분쟁은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언론과 정치 담론 속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전달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을 비판할 수 있는 여러 핵심 요소는 거의 논의되지 않고 묵살되고 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량 학살을 암시하는 반인륜적 선언들이 나오고 있으며, 식량 공급 차단이 전쟁 전략의 일부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집요하게 주거지를 파괴하는 행위가 계속되고 있으며, 이스라엘 병사들이 자신의 전쟁 범죄를 촬영해 자랑스럽게 공유하는 영상들이 유례없이 확산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국제연합(UN) 산하 기관들을 조직적으로 타격하는 군사 작전이 전개되면서 유엔 기구마저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추상적이고 허구적인 ‘유대-기독교적 가치’
이러한 본질주의적 시각은 이스라엘이 가해자인데도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이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있다는 명백한 논점을 무시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아예 공론장에서 다뤄지지도 못하며, 과장된 수사로 가득 찬 담론 속에서 사라진다.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주장이다. 이는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논점에서도 벗어난 이야기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폭력적으로 식민 지배하던 시절, 프랑스 본토에서도 이 식민 지배를 민주주의적으로 바라보았던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이스라엘군이 자체적으로 전쟁 범죄를 조사한다는 주장이나,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인 군대’라는 표현은 군사 조직이 스스로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허구적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사회가 서구 국가들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런 만행을 저지를 리 없다는 논리도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이스라엘과 서구 국가들이 공유하는 ‘유대-기독교적 가치’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이러한 ‘유대-기독교적 가치’라는 개념은 명확하게 정의된 적도, 실제로 일관되게 적용된 적도 없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이러한 허구적 서사의 확산은 비논리적이면서도 구체적인 현실적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민간 인프라를 정당한 공격 대상으로 삼아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100만 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인 독일이 이스라엘의 민간 학살에 논할 때도 푸틴이 내세운 주장과 다를 바 없는 입장을 보인다.
네덜란드는 자국의 자랑이자 국제 정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국제형사재판소(ICC)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스위스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지원하는 유엔기구 UNRWA(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에 대한 공격에 동참해 국제기구 시스템을 약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는 곧 제네바의 국제적 명성과 경제적 번영을 지탱해 온 기반을 허무는 행위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자신의 외교적 독립성을 강조해 온 전통과 달리, 이제 영국처럼 미국의 대외 정책에 발맞춰가는 모습을 보인다.
‘피의 대지’에서 ‘피의 바다’로
이러한 즉흥적이고 모순된 입장들이 난무하는 현실은, 이 갈등이 이성적 사고보다는 무의식적인 편견과 맹목적 태도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학자 앙리 로랑은 ‘피로 물든 땅’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유럽과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설명한다.
이 개념은 원래 역사학자 티모시 스나이더가 그의 저서 『블러드랜드(Bloodlands)』에서 사용한 표현이다.(1) 그는 이 책에서 소련의 스탈린 체제와 독일의 나치 정권이 12년 동안 동유럽에서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기록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이 끔찍한 역사 중 나치 강제수용소 학살만이 기억될 뿐, 수백만 명의 민간인—특히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이 희생된 다른 학살의 역사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과거 동유럽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학살은 이제 남쪽으로 이동했다. 가자지구는 극심한 참상을 겪고 있지만, 국제 사회의 관심은 오직 하마스가 저지른 폭력에만 집중될 뿐이다. 이에 반해, 완벽하게 기록된 다른 잔혹 행위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인해 수많은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팔다리를 잃었으며, 신생아들은 의료 지원이 차단된 채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전투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은 불도저가 무더기로 치우고 있고, 감옥에서는 성폭력을 동반한 고문이 관행처럼 자행된다.
언론인들은 반복적으로 암살당하고 있으며,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의료 장비조차 반입이 금지되는 비인도적 조치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서방 사회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무관심을 넘어, 팔레스타인인의 생명이 서구인들의 생명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논리는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예멘, 리비아까지 확장되며, 특정 지역의 민간인 희생이 당연시되는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피의 대지에는 그에 상응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지중해가 점점 피의 바다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만 명의 이민자들이 익사를 각오한 채,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다. ‘피의 대지’와 ‘피의 바다’의 비교는 중요하다. 해상 구조 의무는 망명권과 전쟁법과 같은 제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유럽 서부에서 먼저 등장했으며, 무엇보다도 유럽인들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특권으로 만들고 싶어 하며, 식민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전통에서 비롯된 위계적인 세계관을 내세워 인류의 일부를 이러한 권리에서 배제하려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근간에는 문명적 우월성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모든 이러한 논리의 기초가 되며, 강력한 기술력으로 인해 끊임없이 확인된다. 모든 우월주의적 담론에서는 기술적 강대함이 자기완결적인 정당화의 역할을 한다. 즉, 서구인은 가장 강하기 때문에 가장 우수하다는 논리다.
이스라엘이 가자와 레바논에서 수행하는 첨단 기술 전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전쟁의 최첨단 측면에 대한 병적인 매혹을 불러일으켰다. 이 전쟁들은 정밀하고, 거의 과학적이며, 유도 미사일과 표적 암살, 실시간 드론 및 인공지능을 활용한 정보전으로 이루어진다고 묘사된다.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의도적으로 구식인 호출기(삐삐)를 사용했으나, 이는 원격 조종 폭탄으로 변형되어 병사들의 손에서 폭발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포르노 같은 전쟁’, 첨단 기술 전쟁의 이면
그 결과, 이스라엘의 군대는 분명히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정교하고, 세련되며, 지적인 힘을 갖춘 존재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는 지배적인 담론 속에서 그대로 찬양받는다. 그러나 첨단 기술 전쟁은 본질적으로 더 단순한 현실을 감추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우선, 무력의 과도한 사용이 있다.
가자지구가 우리가 아는 폐허가 된 황무지로 변한 것은, 이스라엘이 적의 지하 터널망을 정밀하게 타격할 수 있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민간 기반 시설과 주거 지역을 포함해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초토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바논에서는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를 제거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대형 벙커버스터 폭탄 80기를 사용했다. 비교하자면, 미국이 사담 후세인의 전체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사용한 것은 24기에 불과했다. 실제로 첨단 기술 전쟁은 더 정밀한 타격을 보장하기보다, 오히려 공격의 한계를 더욱 확장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또한, 이 전쟁은 가장 잔혹하고 노골적인 현실을 가린다. 이스라엘의 무기는 첨단일지 몰라도, 그 무기를 사용하는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반드시 정교한 것은 아니다. 가자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의 지상군 부대들은 식민지 군대처럼 행동하며, 수많은 군기 문란 행위, 약탈과 무분별한 파괴, 종교 시설 훼손, 모욕과 고문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비웃으며 촬영해 퍼뜨렸다.
이스라엘의 장교들과 정치인들 또한 이러한 폭력을 부추겼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미래의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했으며, 집단적 보복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식민주의, 인종 청소, 집단 학살을 연상시키는 언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이러한 ‘포르노 같은 전쟁(porno-war)’—끝없는 폭력의 영상들이 넘쳐나는 현실—은 공적 공간에서 삭제되었을지 몰라도, 첨단 기술 전쟁의 또 다른 얼굴이자 그림자다. 서구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 모든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오히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를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찬양하기까지 한다.
유럽과 북미의 언론과 정부 또한 이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제앰네스티와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가자 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법적으로 ‘진행 중인 집단 학살(ongoing genocide)’로 규정했다.(2) 국제사법재판소(ICJ) 역시 ‘집단 학살의 위험’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이러한 심각한 고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물질적, 도덕적,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언론적 지원은 거의 흔들리지 않고 있다. 도대체 왜, 명백히 거리를 두어야 마땅한 이 전쟁들에 일부는 기꺼이 공모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일까?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반유대주의 낙인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현재의 무관심이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현상임을 인식해야 한다. 1995년 스레브레니차에서 8,000명의 보스니아 무슬림이 학살되었을 때, 이는 즉각적으로 ‘집단 학살(genocide)’로 규정되었다. 2003년,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벌어진 고문 사진들이 공개되었을 때, 이는 대규모 국제적 스캔들로 번졌고, 결국 미군이 내부 징계 조치를 하도록 만들었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충격적인 수감 환경 역시 새로운 구금 방식의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운 예외적 사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더 이상 인권적 가치, 민주적 원칙, 법치, 자유시장 경제, 그리고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확신을 가진 서구의 모습이 아니다. 서구 사회는 이제 편집증적인 폐쇄성에 사로잡혀 있으며, 보편주의적 가치를 포기하고 근시안적인 지역주의에 갇혀버렸다. 많은 서구 사회 구성원들은 경찰력 강화, 안보, 남성적 권위에 대한 열망에 빠져 있으며, 외부의 적을 찾아 비난하고 내부의 ‘배신자’를 경계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이러한 퇴행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더욱 부추겼다. 결국, 이스라엘이야말로 ‘올바른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야만적이고 미개한 이들은 오직 힘의 논리만 이해할 뿐이라면, 이스라엘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소한 문제를 따지는 대신, 서구는 이 강경한 방식에서 배울 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논리는 식민주의적 억압의 귀환을 뜻하며, 동시에 유럽 전역에서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새로운 형태의 외국인 혐오(xenophobia)와 맞물려 있다. 이번에는 ‘동화될 수 없고 은밀히 위협적인 존재’로 지목되는 이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아랍인과 무슬림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이스라엘의 전쟁이 결국 ‘공동의 전선’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 새로운 형태의 외국인 혐오는 과거의 반유대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방하며 추가되는 양상이다. 특히,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이들이 오히려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비판을 ‘유대인 방어’라는 명목으로 공격하며, 그 결과 유대인 전체를 이스라엘의 범죄와 동일시하는 프레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유대인은 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이처럼 ‘반유대주의’라는 낙인을 무차별적으로 남용하는 것은 그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이다. 반유대주의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024년 11월 7~8일 암스테르담에서 발생한 훌리건 간의 충돌을 ‘포그롬’(pogrom, 특정 민족, 종교, 또는 사회 집단에 대한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박해나 학살을 의미하는 용어—역주)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 왜곡이다. 이는 유럽이 여전히 제대로 반성하지 않은 유대인 박해의 비극적인 역사를 희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지지하는 모든 행동을 반유대주의로 규정하는 것 또한, 결국 본질적인 논의를 피하려는 또 하나의 회피 전략일 뿐이다.
글·피터 할링 Peter Harling
중동 지역 전문가
번역·나정민
(1) 프랑스어판 『피의 땅: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의 유럽(Terres de sang. L’Europe entre Hitler et Staline)』, 갈리마르, 파리, 2012; Folio 재출간, 2019.
(2) Akram Belkaïd, 「이스라엘, 집단 학살로 기소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5년 1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