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의 ‘Yes’는 진짜 Yes일까?

성폭력 재판에서 논란이 된 ‘동의 개념’

2025-02-28     클라라 세라 | 철학자

지젤 펠리코 부인의 성폭력 피해 재판 이후 법률에 ‘동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오직 예스만이 예스다”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정의되는 이러한 해결책은 언뜻 자명해 보이지만 우려스러운 정치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최근 철학자 클라라 세라는 자신의 저서 『동의의 교리』(La Fabrique, 파리, 2025)에서 이 문제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토크쇼와 TV 뉴스에서 끊임없이 언급되고, 소셜 미디어에서 대중화되며, 대기실의 포스터나 교육 안내서, 그리고 정치 연설에서도 인용되는 성적 동의는 오늘날 완벽한 해결책으로 보인다. 스페인은 2022년 9월 6일, 성적 자유의 포괄적 보장에 관한 조직법을 채택하여 “오직 예스만이 예스다”라고 명시했다. 법안을 둘러싼 논쟁은 진보적 찬성파와 보수적 반대파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대립 구도로 압축됐다. 

즉, 진보적인 찬성자들이 보수적 반대자들을 이길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처럼 명백하고 분명하게 표현된 동의 개념은 두 가지 장애물에 직면해 있다. 하나는 구시대적 법률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법제화하길 거부하는 남성우월주의적 판사들이다.

주기적으로 사회를 뒤흔드는 성폭력 사건들로 인해 우리는 형사법 개혁의 모든 가능성을 안도하며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다음과 같은 의문을 피할 수 없다. 과연 동의를 ‘긍정적 동의’라는 특정 원칙으로 단순화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이 정말 성범죄 근절을 위한 최선의 방법일까?

 

‘동의 개념’의 효과는 어디까지

지젤 펠리코 부인의 약물 주입 상태에서의 성폭력 사례는 이를 반증한다. 재판에서 (남편의 사주를 받아 펠리코를 강간한) 가해자들은 “그녀가 동의했다”고 믿었다며 자신들을 변호했다. 그들은 피해자가 남편에게 동의했다는 확신이 있었고, 이 동의가 자신들의 행위를 합의된 성관계로 만든다고 주장했다.(1) 만약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동의가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성폭력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펠리코 부인이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잔(Mazan) 성폭력 사건의 핵심은 피해자가 거부할 능력조차 없었다는 점인데, 왜 이런 상황에서의 추정된 동의(설령 있었다 하더라도)를 동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즉,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예스’는 유효한 동의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복종 관계에서의 동의는 가부장제의 허구

긍정적 동의가 당연한 것처럼 제도화된 배경은 1980년대 미국 페미니스트 운동의 ‘성 전쟁(Feminist Sex Wars)’에서 찾을 수 있다. 포르노그래피 규제법을 둘러싼 이 큰 논쟁은 사실 더 근본적인 문제인 동의에 관한 것이었다. 

캐서린 맥키넌은 『직장 여성의 성희롱』(1979)에서 여성이 상사의 성적 제안을 거절할 때 받게 되는 직장 내 보복 문제를 다룬다. 맥키넌은 이런 지배 관계에서의 자유로운 합의나 동의는 가부장제의 허구일 뿐이며, 자유주의적 계약론은 남성의 자유와 여성의 복종을 정당화한다고 본다. 그는 처음에는 남성이 주로 상위직을 차지하고 여성 부하직원의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를 남용할 수 있는 임금노동 영역에 주목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이론가 안드레아 드워킨과 연대하면서 초기 저작에서처럼 구체적 상황의 다양성을 검토하는 것을 멈췄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이런 변화는 비극적 실수였다”고 평가한다. “이제 성희롱의 구조는 더 이상 우연적이거나 제도적 맥락에 따른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는 남성이 지배하고 여성이 종속되는 사회 구조의 표현으로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여성은 늘 협박의 피해자이자 적대적 환경 속에 있었고, 더 나아가 세계 자체가 적대적 환경이었으며, 협박은 이성애의 작동 방식에 불과했다.”(2)

 

성에서 권력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어

반면 버틀러가 속한 또 다른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이성애(Heteropatriarchy)를 자연스러운 형태로 만드는 모든 규범과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성적 반체제(레즈비어니즘, 성전환과 크로스드레싱, 성매매 등)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또 다른 성적 규범(예컨대 레즈비어니즘)을 강요하려는 시도를 비판한다. 

이는 여성의 욕망 한계를 넓히고, 죄책감에서 벗어나며, 성적 환상을 비범죄화하고, 합의된 관계 안에서 여성이 젠더 역할을 하는 것이나(예를 들어 한 파트너가 남성성을, 다른 파트너가 여성성을 표현하는 관계를 말하는 부치-팸(butch-femme) 레즈비언 커플) 성적 권력 관계를 통한 쾌락을 추구하는 성적 실천을 의미하는 (SM-사도-마조히즘)을 실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버틀러는 성에서 권력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권력의 완전한 부재를 성관계의 정당성이나 허용 조건으로 삼는다면, 이는 성에 대한 위험한 도덕주의적 규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버틀러와 포르노 금지 반대 페미니스트들은 맥키넌의 접근이 ‘좋은 성관계’라는 새로운 규범을 만든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성관계의 윤리적 판단이 합의 여부가 아닌, 특정 행위의 도덕적 성격(애정적 성관계는 선, SM은 악)에 기초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성적 동의와 권력, 페미니즘의 두 가지 시각

주디스 버틀러가 속한 페미니즘 진영은 퀴어 운동과 성노동자 권리 옹호의 역사적 맥락을 공유하며, 성과 폭력을 구분하는 타당한 기준으로 성적 동의를 분명히 선택했다. 버틀러의 분석에 따르면, 캐서린 맥키넌의 ‘비극적 실수’는 결국 다음과 같다. 권력의 불평등이 동의의 조건을 훼손한다면, 남녀 간의 모든 성관계는 결국 강요된 것이며 따라서 폭력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강간과 이성애적 성관계의 구분은 사라진다.

권력을 힘과 동일시하게 되면, 성폭력을 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이는 형사 처벌의 불가피한 확대를 초래한다. 성인 간의 나이 차이가 동의 조건을 해친다면, 계급 차이는 왜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피부색의 차이가 명백한 권력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인종 차이는 왜 동의를 방해하지 않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같은 회사 내에서 서로 다른 권력 지위에 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인가?

맥키넌의 논지는 성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는 청교도적 북미 사회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현대 페미니스트 철학자 아미아 스리니바산의 설명처럼, “포르노에 대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맞아떨어졌다. 이 이데올로기는 국가의 규율이 필요한 ‘나쁜 여성들’(성노동자들, ‘복지수당의 여왕들’)과 국가의 보호가 필요한 ‘좋은 여성들’을 구분했으며, 남성을 본성적으로 약탈적인 존재로 보았다. (…) 신우파의 지도자였던 로널드 레이건은 미 대통령 재임 시절 법무장관에게 포르노의 해악을 조사하도록 지시했고, 맥키넌과 드워킨이 이에 전문가로서 참여했다.”(3) 

포르노에 반대하는 여성들(WAP) 운동에 모인 활동가들은 북미 우파의 도덕주의와 생산적인 연대를 맺었고, 이 강력한 사회적 반향을 이용해 현재까지도 유효한 금지법들을 통과시켰다.

 

동의의 두 얼굴, Yes와 권력 관계 사이

과거의 이러한 논쟁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배 관계를 강조한 페미니즘의 법적 유산이 반포르노법에만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포르노 금지를 정당화했던 철학적 원칙들은 미국 법률에서 동의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즉, 권력을 폭력과 동일시하고, 지배 관계로 인해 ‘No’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의 범위를 무제한 확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미국의 주류 페미니즘은 긍정적 혹은 확인적 동의라는 법적 개념의 정치적 영감을 제공했고, 위스콘신, 버몬트, 뉴저지,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여러 주가 지금까지 이를 따르고 있다. 스리니바산은 “201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제리 브라운이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지지를 받아 ‘Yes means Yes’로 알려진 SB 967법을 비준했다”라고 상기시킨다. “이 법은 주 정부 기금을 받는 모든 고등교육기관이 성적 행위의 합의 여부를 판단할 때 ‘확인적 동의’ 원칙을 채택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원칙은 아직 많은 주에서 시행되지 않았지만, 미국 대학 캠퍼스의 내부 규정으로는 널리 채택되었다. 1996년 오하이오 주의 안티오크 대학은 지금까지 유효한 규정을 도입했는데, 이는 모든 성관계에 대해 사전 ‘구두 동의’를 요구하며, 이는 ‘성관계의 각 단계마다’ 반복되어야 한다. 즉 이는 구두 동의를 포함한 긍정적인 의사 표현을 요구하는 규제로 바뀌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거부 여부를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이고 분명한 동의 의사까지 확인하도록 확장하는 것이다.

 

동의라는 환상, 예스와 노 사이의 회색지대

모델이자 배우, 진행자인 제넬리아 데쉬무크는 동의의 중요성을 다룬 화제의 영상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No’는 ‘No’다. ‘Maybe(아마도)’는 ‘No’다. ‘I don’t know(모르겠다)’도 ‘No’며, 침묵 역시 ‘No’다.”(4) ‘오직 ‘Yes’만이 ‘Yes’라는 공식이 말해주듯, 완벽하게 분명한 ‘Yes’가 아닌 모든 것은 완벽하게 분명한 ‘No’인 것이다.

2020년 국제앰네스티의 캠페인에서도 이런 명확화 정신이 나타난다: “Yes+Yes=Yes, Yes+No=No, No+Yes=No, Yes+Uh=No, Yes+I don’t know=No.” 이처럼 성의 영역 전체는 우리가 분명히 원하는 것과 분명히 원하지 않는 것으로 양분된다.

여성 잡지, 성학자의 조언, 인스타그램 콘텐츠…. 우리는 끊임없이 명확성, 욕망의 명시화, 성에 대한 언어화, 합의된 동의, 구두 약속을 강요받고 있다. 이런 입장의 낙관주의는 성을 지속적으로 계약화함으로써 우리가 단순히 동의된, 즉 비폭력적인 성관계뿐 아니라 원하고, 충만하며, 즐겁고 행복한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약속에 근거한다.

역설적이게도, 과거에는 성적 위험 상황에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원하는 것을 조금의 모호함도 없이 단언할 수 있다는 완전한 신뢰가 존재한다. 이전에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었다면, 이제는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성이 필연적으로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비관주의에서 쾌락과 즐거움이 언어와 상호 합의로 보장된다고 믿는 순진함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동의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거나, 너무 많이 기대하는 양자택일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떻게 이 둘을 동시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법이 닿을 수 없는 곳, 욕망과 동의의 경계

적어도 프로이트 이후, 우리는 정신이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난제를 고려해야만 한다. 주체의 내적 분열-동시에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근본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를 수 있는-은 법이 명확하고 자의식 있는 의지의 주인으로 간주하는 이 주권적 개인을 큰 어려움에 빠뜨린다.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가 말하듯, “무의식이라는 가설이 주체에 대한 고전적 관점의 자아도취에 큰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정신분석은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늘 곤혹스러운 것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5)

동의와 욕망의 일치가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점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거나, 선택한 것을 욕망하지 않을 가능성으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누구도 없다. 이러한 불일치를 해결하려 시도해야 하는 것은 주체이지, 어떤 페미니스트 선구자들도, 당연히 국가도 아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하려 하지 않고, 우리를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으며, 우리의 성숙함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이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없다.

버틀러가 쓰듯이 “우리는 안티오크 대학의 성행위 규칙처럼, 모든 성행위가 두 사람 사이의 사전 논의와 어떤 접촉 이전의 동의를 필요로 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순간들에 법은 성적 만남을 침범했다. 법이 우리의 담론을 잠식했다.” 

바로 이렇게 욕망을 명료하고 말 많은 것으로 변형하려는 주장, 욕망을 계약의 틀 안에 기입하려는 의지가 형법이 그 기능을 넘어서도록 초대한다. 욕망에서 불명료함을 제거하는 것은 법이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영역—욕망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영역—에 법이 들어가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글·클라라 세라 Clara Serra
철학자.  『동의의 교리』(La Fabrique, 파리, 2025) 저자.  이 글은 해당 저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번역·아르망


(1) 앤드루 하딩, 「지젤 펠리코: 이 평범한 여성은 어떻게 성폭행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인식을 바꿔놓았나」,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evg2m3994zo?xtor=AL-73-%5Bpartner%5D-%5Bnaver%5D-%5Bheadline%5D-%5Bkorean%5D-%5Bbizdev%5D-%5Bisapi%5D
(2) 에릭 파생, 미셸 페헤르의 주디스 버틀러 인터뷰 「성의 윤리: 성희롱, 포르노그래피, 성매매」, <Vacarme>, 파리, 2003년 1월 22일
(3) 아미아 스리니바산의 『성에 대한 권리: 21세기의 페미니즘』 ,PUF, 파리, 2022; Points 재판 2024 『The Right to Sex』, Bloomsbury, 런던, 2021
(4) “제넬리아 데쉬무크의 동의에 관하여” 페이스북 게시물, 2022년 4월 20일
(5) 로지 브라이도티의 『페미니즘, 성차와 유목적 주체성』, Gedisa, 바르셀로나,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