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권력이 탄생시킨 ‘무용 예술’

2025-02-28     크리스토프 아프릴 | 사회학자

소위 ‘무용 예술’이라 불리게 될 것이 17세기에 탄생했다. 권력은 이를 민속 전통에 대립시키려 했고, 그 결과 지속적인 분할과 위계를 확립했다. 1980년대에는 현대 무용이 구별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예술이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완할 것으로 여겨졌다.

 

음악이나 미술과 달리, 프랑스의 문화 엘리트들은 20세기 상당 기간 안무 예술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현대 무용’은 프랑스가 아닌 독일(마리 비그만, 루돌프 라반)과 미국(이사도라 덩컨, 마사 그레이엄)에서 등장했으며,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발레단이 상징하는 클래식 발레만이 미적 지배력을 행사하며 확고한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식인 사회와 단절된 채,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주변화된 무용수들은 근대성과의 만남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1961년,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연극, 음악, 문화 활동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했을 때조차, 안무 예술은 여전히 ‘클래식 발레’와 동의어로 간주 되었다.

 

춤과 권력: 궁정에서 탄생한 예술

이러한 상황은 역사와 맞닿아 있다. 16세기 말, 춤이 예술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궁정에서는 고급 정통무용(danse savante)이 규범화되었으며,(1) 검술과 승마와 함께 문명화된 신체를 구현하는 수단이자, 이상적인 궁정인의 품격을 드러내는 도구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춤은 실천적 행위로서의 춤과 공연 예술로서의 춤으로 분리되었다. 이탈리아식 극장에 통합된 춤은 궁정인들의 자기표현 이상과 부합하면서, 단순한 오락에서 벗어나 군주와 신하 간의 관계를 규범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1661년 왕립 무용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danse)의 창설은 서구 안무 예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뛰어난 무용수이자 연출가였던 루이 14세는 이를 통해 ‘벨 댄스(belle danse)’, 즉 오늘날의 클래식 발레의 전신을 제도화했다.(2) 이로써 안무 예술은 점차 하나의 정치적 도구로 자리 잡았다.

 

춤의 변혁: 미테랑 시대, 무용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당연하게도, 역사 서술은 궁정 무용을 우선으로 다루어 왔다. 그 결과, 학계와 일반 대중 모두에서 두 가지 이중 구분이 정착되었다. 하나는 아마추어 무용과 프로 무용의 구분, 다른 하나는 참여형 무용과 공연형 무용의 구분이다. 이 구분은 정치적·미학적 함의를 지닌 채 1980년대에 다시 활성화되었다.

마치 잠든 공주처럼, 안무 예술은 오랜 침체 상태에서 깨어났다. 이는 프랑수아 미테랑 당선 이후였다. 1984년부터 사회당 정부는 현대 무용을 무용계에서 지배적인 문화로 제도화했다. 문화 장관 자크 랑(Jack Lang)은 앙드레 말로가 내세운 보편주의를 대신하여 ‘혁신’이라는 새로운 원칙을 도입했으며, 이 개념은 곧바로 클래식과 현대의 대립 구도로 변환되었다. 이는 역사적으로 클래식 발레가 정치적으로는 우파, 미학적으로는 보수주의, 사회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크 랑은 1970년대 안무 유산을 기반으로 공식적인 현대 무용의 부상을 지원했다. 물론 무용 예술이 특정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속하거나 단순히 정치적으로 도구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예술가들은 새로운 흐름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대적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그들은 “쾌락적이고 축제 같은 문화 속에서, 스타 시스템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으며, 오히려 개별적 재능의 탁월함을 더욱 찬양하는 경향을 보였다.”(3)

 

누가 춤을 추는가? 국가 정책이 형성한 무용계의 지형

이 프로젝트는 정교하게 구성된 스토리텔링 속에 자리 잡고 있다. 1982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 문화부 장관 회의에서 자크 랑은 두 가지 개념을 내세웠다. “문화와 경제: 같은 싸움”이라는 구호였다. 하나는 미국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저항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화와 예술에 마치 마법과 종교적 힘이 깃든 듯한 역할을 부여하며, 그것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자크 랑은 바로 이러한 문화의 힘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83년 프랑스 정부는 국가를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 통합하려 하고 있었다. 예술계의 창의적 잠재력은 경제적 변화에 맞서 세계를 다시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한 힘으로 간주하였다. 우파에서는 문화와 경제의 연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좌파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없었다. 

문화 기획자들은 이를 받아들이며 “예술 프로젝트의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고, 이는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슬로건이 되었다. 예술과 문화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치료제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더 나아가, ‘반(反)문화(counter-culture)’가 소비사회에서 비롯된 소외에서 개인을 해방하는 열쇠가 되었다. 금기와 규범을 깨뜨리는 행위(종종 전복적인 성격을 띠는)가 새로운 신조로 자리 잡았으며, 여기에 창조, 기업가 정신, 참여, 성공, 소비의 자유와 같은 가치들이 결합했다. 그와 동시에 경쟁과 경쟁력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원칙이 함께 자리 잡았다.

현대 무용은 이러한 반문화의 대표적인 예술 형태로 자리 잡았다. 젊고 새롭다는 점뿐만 아니라, 신체와 성(性)에 대한 독특한 접근 방식을 통해, 신체가 핵심이 되는 초정치적(transpolitique) 의미를 갖는 ‘상시크라티에(sensicratié)’ 개념의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는 기술관료제(technocratié)와 그 합리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겨졌다.

 

사라진 무도회, 현대 무용이 대체한 춤의 풍경

현대 무용의 탄생은 차별화된 미적 기준이 형성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례가 1988년 리옹 비엔날레에서 장클로드 갈로타(Jean-Claude Gallotta)가 선보인 공연 <마마메(Mammame)>(특정한 의미를 지칭하지 않은 조어)이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무도회가 열렸고, 아코디언 연주자 이베트 오르네르가 이끄는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았다. 그러나 이 두 공연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대적 미학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대중 무용과의 격차를 더욱 부각했다.

비슷한 사례로 1993년 필립 데쿠플레가 <잃어버린 작은 무도회(P’tit Bal Perdu)>를 새롭게 해석한 작업을 들 수 있다. 이 노래는 원래 배우이자 가수였던 부르빌(Bourvil)이 1947년 불렀으며, 아코디언 연주에 맞춰 커플들이 춤을 추던 무도회의 황금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데쿠플레는 파스칼 우뱅과 함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를 재해석했다. 두 사람은 수화 언어를 활용한 추상적인 듀엣을 선보였다. 무도회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몸을 부딪치며 춤을 추지만, 이들은 서로 닿지도 않고 함께 춤을 추지도 않는다. 또한 젊은 전문직 종사자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의상과 정교한 기술, 감각적인 표현력이 이들의 무대를 대중 무용과 차별화했다.

반세기가 지난 후, 이 듀엣은 다시 무대에 올랐다. 2020년 6월 23일 열린 제32회 몰리에르의 밤에서 사회자는 이렇게 소개했다. “<잃어버린 작은 무도회> 하면 부르빌, 무도회, 여름밤 등불 아래에서 추는 춤이 떠오를 겁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작은 무도회>는 필립 데쿠플레가 창조한 아름다운 무용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안무는 작품 속에 또 다른 작품이 포함되는, 이른바 아비임 연출(mise en abyme)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기던 춤이 점차 사라졌고, 이제 현대 무용이 ‘춤’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이렇듯 현대 무용은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로 인정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대중 무용 장르와의 단절이 이루어졌다. 이 분리는 적극적인 문화 정책에 의해 더욱 공고해졌다. 프랑스 정부는 현대 무용의 교육, 연구, 공연 공간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며 춤의 영역을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재즈 댄스는 점차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사교 춤(danse de bal)은 공공 지원에서 극히 적은 부분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2017년 기준, 프랑스 문화부 내부 문서에 따르면, 전체 보조금의 81%가 현대 무용 단체에 지원되었고, 13%가 힙합 무용 단체, 그리고 단 6%만이 기타 무용 장르에 배정되었다.

 

현대 무용과 대중 무용, 공존할 수 없는가?

그런데도, 15세 이상 인구 중 무용 공연을 본 비율은 1997년에 8%에 불과했다. 이 비율은 2008년에서 2018년 사이 8%에서 9%로 소폭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연극 관람 비율은 19%에서 21%로 상승했다.(4)

잃어버린 공동체적 유대를 회복하고, 지역의 분위기에 젖어 들며,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 기획자들은 아마추어 무용수들의 문화적 소양 부족을 우려하며, 그들을 “공연에 데려가” 점진적으로 대화를 형성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도록 유도하고자 한다.(5) 그러나 현대 무용수들에게 무도회 문화에 대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편, 음악 축제 모델을 본떠 ‘춤의 축제’를 창설하자는 아이디어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무도회 개념은 현대 무용 및 예술계 출신 안무가들에 의해 변형된 형태로 차용되었다. 그 결과, 다양한 하이브리드 형태의 무도회 프로젝트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예로 미셸 레이악의 <Le Bal Moderne>, 필립 슈발리에의 <2000 Bal>, 오딜 아자귀리의 <Champs d’amour>, 다비드 드루아르의 <Bal impressionniste>, 카롤 에랑트의 <Ballhaus> 등이 있다. 그러나 “거리에서 무대로”, “제도화된 공간에서 비제도권 무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춤이 궁극적인 기준이라는 원칙은 유지되었다. 이 점은 힙합 무용의 부분적 제도화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춤의 위계 구조를 해체하고, “춤 사이의 지배적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현대 무용을 배제하자는 뜻이 아니다.(6) 오히려 현대 무용은 단절과 탈출의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숨통이 트이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준다. 이러한 흐름이 제도적 통제에서 자유로운, 더욱 평온한 환경에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무용 정책이 가진 비대칭적 이분법과 결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춤이 살아남고 무용수들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는 조건이 될 것이다. 

 

 

글·크리스토프 아프릴 Christophe Apprill
사회학자. 주요 저서로  『무도회의 세계』(2018), 『슬로우: 욕망과 환멸』(2021) 등이 있다. 

번역·아르망 


(1) Nathalie Lecomte, 『환상의 정원과 무도회 사이: 유럽의 발레 (1515-1715)』, 국립 무용 센터(Centre national de la danse), 2014.
(2) Philippe Le Moal, 「왕립 무용 아카데미 창설 - 1661년 3월」, 2023년 3월 3일, France Archives.
(3) Philippe Urfalino, 『문화 정책의 발명』, Hachette Littératures, 파리, 2011.
(4) Philippe Lombardo) & Loup Wolff, 「프랑스의 문화 실천 50년」, 문화부(Ministère de la Culture), 2020, www.culture.gouv.fr.
(5) 브르타뉴 지방 문화청(DRAC) 음악·무용 담당 고문과의 인터뷰, 2021.
(6) Jean-Michel Guy & Dominique Jamet, 『무용 관객들』, 프랑스 문서 정보원(La Documentation française), 파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