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둘러싼 계급투쟁
주당 노동일을 4일로 단축하자는 주장을 펴온 사회당의 피에르 라루튀루는 <리베라시옹>과 가진 인터뷰(10월 30일자)에서 “좌파는 다시금 당당하게 노동시간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법정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은 과연 현대 서구사회의 시간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스페인의 경제학자이자 소설가인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는 자신이 책을 쓸 시간이 없는 만큼 사람들이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몇 년 전에 매우 얇으면서 약어로 가득한 소설책을 한 권 내놨다.(1) TC(Tipo Corrient·보통 남자)라는 이름의 평범한 주인공이 겪는 고생을 묘사한 이야기이다. 다국적기업 직원인 TC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한다. 공급처에 영수증 재발급을 요청하기 위해 이미 수령한 영수증들을 캐비닛 안에 숨기는 게 그의 임무다. 고된 업무에 시달리며 주택 융자금을 갚아나가는 생활 속에서 TC는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열정을 실현할 시간(T)을 갖지 못한다. 그의 소원은 붉은머리개미 연구에 몰두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TC는 대출을 모두 갚고 붉은머리개미 연구를 시작할 수 있으려면 아직도 꼬박 35년을 더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는 결국 회사에 사표를 내고 돈벌이에 나서기로 작정한다. 그때 멋진 아이디어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 바로 T(시간)를 팔기로 한다. 그는 우선 5분 플라스크를 시장에 내놓는다. 상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성공에 고무된 그는 이번엔 2시간짜리 상자를 내놓는다. 그의 사업적 재능은 자신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사회적·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고 만다.
이 우화는 부채 메커니즘을 '시간의 절도'(2), 더 넓게는 현대 서구사회의 '시간 기근'(3) 현상으로 묘사한다. 서구사회는 광적인 생활리듬이 부여하는 특권에 눈멀고, 인간의 활동과 운명을 바라보는 특정 관점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시간을 너무도 뻔뻔스럽게 과소평가하고 심지어 그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독일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사는 "사람들이 흔히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것이나 개인적 운수로 간주하는 것의 배후에 이른바 '시간 체제'라는 것이 가차 없이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시계, 악마의 풍차
로사는 오늘날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가속(加速)의 세 가지 형태를 구분한다. 기술적 가속(인터넷·고속전철·전자레인지 등), 사회적 가속(직장과 배우자를 더 자주 바꾸고, 사용하는 물건의 수명도 짧아진다), 생활리듬의 가속(덜 자고, 더 빨리 말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덜 교류하고, 전화 통화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다림질을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단순 논리로 보면 기술적 가속 덕분에 우리는 좀더 평화롭고 느긋한 삶을 즐겨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개별 작업 시간이 단축된 만큼 우리는 더 많은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편지를 쓰는 것보다 훨씬 빨리 전자우편을 쓰고 보낼 수 있지만 훨씬 자주 전자우편을 보내게 된다. 자동차의 발명으로 이동 시간이 단축됐지만 그만큼 우리는 더 자주 이동하게 되었고 결국 이동을 위해 사용하는 전체 시간은 예전과 비슷하다. 우리에게 손짓하는 온갖 장치와 가능성- 소비, 레저 산업, 인터넷, 텔레비전 등-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과 조정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로사는 역사적으로 서구사회가 가속을 시작한 것은 진보와 자율에 대한 약속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그 속도가 자신의 기반인 사회제도와 정치적 틀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 속도는 사회 전체를 속속들이 지배하는 추상적 원리라는 의미에서 현대사회 내부의 전체주의적 힘으로 작용한다. 개인은 일상 속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급한 불을 끄는 것'뿐이라고 느낀다. 정치적 공동체들 역시 운명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역설적이게도 광적인 속도로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삶 속에서 사람들은 무력감과 체념에 사로잡힌다.
진보 진영조차 시간을 전략적 투쟁의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 불평등한 방식으로 분배되는 시간을 둘러싼 싸움은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1999년과 2002년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제정한 오브리법은 기업 중역들에게 더 많은 휴가를 제공한 대신 비숙련 노동자의 삶의 리듬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도우미 서비스' 용역 업체들은- '나를 위한 시간'이라는 이름의 회사도 있다- 여유 있는 계층의 사람들에게 일손을 제공함으로써 가사와 육아 부담을 덜어준다. 이런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빈곤층, 이민자, 여성이다. 이들이 수행하는 힘겨운 노동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보수도 형편없다.(4) '잡다한 일'을 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수당을 받기 위해 관청에서 길게 줄을 서야 하는 극빈층이나 실업자들도 멸시를 받기는 마찬가지다.(5) 그들은 자주 "내일 다시 오세요"라는 말에 발길을 돌려야 한다. '휴대전화를 안 받을 권리' 역시 모든 이에게 공평하지 않다. 한 건물 수리 업체 직원은 "공사 책임자는 자기가 원할 때 휴대전화 전원을 꺼놔도 상관없다.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밑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전화를 안 받으면 난리가 난다"고 말한다.(6)
특히 여성들이 겪는 압박이 크다. 벨기에 페미니스트 단체 '여성적 삶'은 지난 7월 올해의 연구주간에 이 문제를 다뤘다. '시간에 대한 권력을 되찾자'(www.viefeminine.be)라는 제목 아래 진행된 연구는 여성들이 대부분 집안일을 도맡아할 뿐 아니라, 직장에서는 시간제 직원으로 일하고 집에서는 정신적으로 가정생활의 다양한 일정을 관리하면서 '시간적 완충장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여성들은 남에 대한 헌신을 여성성과 연결하는 성차별주의적 사고방식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한 간호사는 "나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으면 항상 누군가를 버려둔 듯한 느낌이 든다"고 고백한다.(7)
지난 수십 년간 일부 분야에서 노동강도가 강해지고 노동이 사적 생활을 잠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근대사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공식적인 노동시간은 계속 단축돼왔다. 덕분에 우리는 더 많은 자유시간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만큼 집단적 삶이 강요하는 고통스러운 리듬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8) 로사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이 보기에도 별로 가치 없는 활동, 가령 텔레비전 시청 등에 여가시간을 써버린다.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일종의 자기억제 상태에 놓인 것이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시간의 문제는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할 때처럼 양적인 문제이지만, 시간이 있어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면 질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유래한 뒤 세속화 과정을 거친 자본주의 윤리 속에서 형성됐다.(9) 이 개념 속에서 시간은 "최대한 집중적인 방식으로 이윤을 뽑아내기 위한 추상적 자원"이다.(10)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P. 톰슨은 자본주의 1세대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에 수행해야 할 작업이 아니라 시계·사이렌·출근체크기 등에 의해 관리되는 새로운 방식에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전한다.(11) 새로운 시간 규칙이 도입되면서 집중적으로 작업에 열중하다가 원할 때면 한가한 휴식을 즐기던 예전의 자율적 방식은 자취를 감췄다. 톰슨은 후자의 경우가 인간의 자연적 리듬에 더 어울린다고 보았다.
'긴 현재'의 시계
이제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장, 미래의 노동자들을 초기부터 길들이는 학교 등에서 모든 규율은 엄격하게 분절된 시간 형태를 띠게 되었다. 1775년 맨체스터의 J. 클레이튼 목사는 "거리가 넝마를 걸치고 무위도식하며 돌아다니는 아이들로 들끓게 될지도 모른다"며 "아이들이 시간을 낭비할 뿐 아니라 노는 맛을 알게 될 것"을 염려했다. 청교도 신학자 리처드 백스터는 회중시계가 대중화되기 전에 이미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속의 도덕적 시계'에 맞춰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에 대한 억압이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더 최근에는 2005년 독일 헤세주의 기민당 소속 법무장관이 "전자팔찌를 이용해 실업자들을 감시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에게 "정상적인 생활리듬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란다.(12)
경제활동을 지배하는 수익률과 경쟁력의 논리('경쟁은 잠드는 법이 없다')가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여가시간 역시 노동을 통해 번 것인 만큼 효율적인 관리 대상이 된다. 이처럼 여가시간조차 마음껏 쓰지 못하는 태도는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이런 장애 상태는 계층을 망라한 사회 전체에 만연한다. 라울 바네겜은 "착취자들 못지않게 피착취자도 마음껏 게으름을 즐길 기회를 거의 누리지 못한다"고 썼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노동의 리듬에 의해 현실에서 배제된 의식이 우울한 몽상의 외피를 쓰고 다시 깨어난다."(13) 로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우리가 만약 개인적·집단적 역사의 흐름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길 원한다면 무엇보다 '시간 자원'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놀이와 무위의 시간을 되찾고, 시간을 '낭비'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를 전유할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덧붙인다. 그러지 못할 경우 세계는 우리에게 "차갑게 침묵하며, 무관심할 것이며, 심지어 적대적일 것"이다. 그는 "뒤늦은 모더니티가 빚어내는 재앙"을 경고한다. 알리스 메디그 역시 현대인들이 자신과 세계 앞에서 낯선 존재가 되어버리는 '박탈 현상'을 지적한다.(14) 시계가 우리를 지배하기 전에는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몸이나 구체적인 주변 환경과 관련돼 있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1950년대 카빌의 농부들이 시계를 '악마의 맷돌'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톰슨은 버마 승려들이 "손의 핏줄을 볼 수 있을 만큼 빛이 충분한 때를 기상 시간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잠깐'에 해당하는 시간을 '메뚜기 튀기는 시간'이라 부른다.
시간의 문제는 모더니티의 역사 속에 깊게 각인된 만큼 표면적인 해결책으로는 그 위기를 해소할 수 없다. 따라서 유럽에서 불고 있는 '슬로(Slow) 운동'- 슬로 푸드 식당(15), 슬로 미디어 언론, 슬로 시티(Cittaslow) 운동- 에 대해서도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미국의 사상가 스튜어트 브랜드는 텍사스 사막에 '긴 현재의 시계'(Clocking of Long Now)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이 시계는 1만 년 동안 서서히 움직이며 인류에게 긴 시간의 의미에 대한 성찰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그러나 자금을 대는 사람이 아마존닷컴의 설립자 제프 베저스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 프로젝트의 시적 분위기는 반감되고 만다. 아마존닷컴의 숨 막히는 창고 안에서 온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직원들은 과연 이 시계를 통해 실존적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글 / 모나 숄레 Mona Choll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1)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시간을 파는 남자>, 21세기북스, 2006.
(2) 마우리지오 라자라토, ‘빚쟁이 혹은 시간의 도둑’,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2월호.
(3) Hartmut Rosa, <소외와 가속: 뒤늦은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 이론을 위하여>, La Decouverte, coll. <Théorie critique>, 파리, 2012.
(4)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9월호 ‘낯선 공공재, 대인 서비스’ 기획 기사 참조.
(5) Alice Médigue, <삶의 시간, 사회관계, 지역의 삶: 인간의 눈높이에 맞춘 사회를 위한 대안들>, Yves Michel, coll. <Société civile>, Gap, 2012.
(6) Francis Jauréguiberry, <휴대전화 사용자들: 전화 사용의 사회학>,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coll. <Sociologie d‘aujourd’hui>, 파리, 2003.
(7) Paul Bouffartigue, <노동시간과 생활시간: 시간적 여유의 새로운 측면들>, Presses niversitaires de France, coll. <Le travail humain>, 파리, 2012.
(8) 세르주 알리미,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0월호.
(9) 모나 숄레, ‘허리띠 졸라매기, 그 회개의 윤리학’,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3월호.
(10) Hartmut Rosa, <가속: 시간에 대한 사회적 비판>, La Découverte, 파리, 2010.
(11) Edward P. Thomson, <시간, 노동규율, 산업자본주의>, La Fabrique, 파리, 2004.
(12) <Le Canard Enchaîné>, 파리, 2005년 5월 4일.
(13) Raoul Vaneigem, <세련된 게으름 예찬>, Editions Turbulentes, www.infokiosques.net
(14) Alice Médigue, <삶의 시간, 사회관계, 지역의 삶…>, op. cit.
(15) Carlo Petrini, ‘미식의 투쟁가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