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월셋방에서 '잠자'는 한국형 카프카의 탄생-영화<세입자>

2025-03-03     이승희(영화평론가)

영화 <세입자>는 최근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전세사기사건을 위시해 한국 사회가 당면한 작금의 위급한 문제들을 다룬다. 환경오염, 고용불안, 그에 따른 빈곤 문제, 계층의 양극화, 부동산 가격 상승에 따른 주거불안정 및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부동산 정책, 빈곤계층의 소외 및 고독사 등. 주택이 더 이상 주거를 위한 건축물, 즉 집이 아니라 부동산인 시대, 아니 차라리 화폐로써의 도구에 불과한 시대의 주거환경은 도시민들에게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대신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럭키, 아파트>, <한 채>, <백수아파트> 등 주거의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재 한국 영화계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주거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한결같이 지니고 있는 문제의식 역시 위에 나열한 것들과 다르지 않다. 그 중에서도 영화 <세입자>가 ‘월월세’, ‘천장세’ 같은 기발한 상상력의 키워드들을 통해 꼬집고 있는 한국 사회의 초상은 어둡지만 날카롭고, 섬뜻하지만 정확하다.

 

영화 <세입자>는 공포영화 <호텔 레이크>를 만들었던 윤은경 감독의 두 번 째 장편이다. 신인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저예산 독립영화답게, <세입자>는 참신함과 재기발랄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는 장은호 작가의 단편 공포 소설 <천장세>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 소설 자체가 워낙 흡인력있게 진행되는 탄탄한 서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영화의 흥미진진한 흐름도 원작 소설에 빚지고 있는 면이 있다. 그러나 영화를 발랄하고 참신하게 만들고 있는 건 외려 문학적 향취가 강한 원작을 영화 고유의 형식들로 옮겨놓은 영화적 각색에 의해서다. 영화는 몇몇 장면들에선 원작 소설의 장면들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재연해내고 있는 반면에, 한편으로는 원작이 그 문학적 한계로 인해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구체적인 이미지로써 생생하게 변환해내고 있다. 흔히 소설이나 희곡 같은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실사 이미지로각색되는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거추장스런 설명이나, 서사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극화하기 위해 더해질 수 있는 장식적 수사들을 영화는 피하고 있다. 대신 새로운 설정 몇 가지가 더해지면서 영화는 좀 더 다채로운 층위의 개성을 띠게 되었다. 이를테면, 공포물이라는 원작 소설의 장르에 SF의 색채를 더하거나, 원작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집주인의 아들인 강아지, 의사, 해피미트 직원들)을 첨가하고, 원작에서는 상세한 묘사가 생략되었던 인물들의 코스튬이나 분장을 섬세하게 살려낸 부분 등이 그렇다. 이는 원작 <천장세>를 ‘사랑한다’고 밝힌 윤은경 감독이 소설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 영화의 이미지에 숨결을 불어넣은 부분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효한 것은 영화를 촬영한 카메라의 구도다.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보이는 ‘프레임 속 프레임’ 구도는 영화의 인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독특한 미장센을 제공한다. 주인공 신동이 사는 작은 월세 아파트, 그 협소하고 폐쇄적인 공간 안에 ‘월월세’라는 둥지를 틀고 들어간 신혼부부. 이들을 찍는 카메라는 촬영이 힘들 정도로 좁은 공간의 단점을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담아낸다. 월월세로 입주한 첫날, 좁디 좁은 화장실에서 괴이한 ‘호흡법’ 의식을 치르고 있는 부부의 장면을 카메라는 천장에서 내려다보는 항공샷으로 찍었다. 이 때 천장에서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방의 구도는 정사각형이 아니라 마름모꼴이다. 이어지는 숏에서 신혼부부의 모습을 몰래 들여다보던 신동이 놀라 거실에서 자기 방으로 가는 모습도 그대로 천장을 따라 항공샷으로 찍었다. 이 카메라워크에 따라 영화는 그것이 촬영되고 있는 장소의 협소함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모습을 잡아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는 물론 예산이 충분하지 않은 독립영화의 특성상 세트장을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러한 촬영상의 한계는 이 때부터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기능한다. 인물들이 살고 있는 월셋집이라는 공간에는 폐쇄적 미장센의 답답함과 불안함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인물들을 내려다보는 어떤 관음적 시선의 존재가 암시적으로 생성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시선-천장에서 주인공을 내려다 보는-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영화의 서사에서 후반부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 알게 되기 전까지 영화에는 기묘한 분위기의 긴장감이 감돈다. 영화에 기묘한 분위기를 더하는 것은 카메라 구도 뿐 아니라, 개성이 강한 배우들의 절묘한 캐스팅, 코스튬 및 분장, 연기 디렉팅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프레임 속 프레임’ 구도는 비단 촬영공간의 미장센에 의해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처음 발명한 ‘위니떼 다비따시옹(Unite d’habitation)’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생겨난 아파트였다. 고층의 집합건축물에 주거를 가능하게 한 이 발명품은 인구 과밀의 도시 서울에 들어서면서 더욱더 많은 인구들이 도시로 전입해 거주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파트 단지를 따라 서울에는 학군과 상권이 형성되었고, 서울의 모습을 상징하는 랜드 스케이프가 되었다. 아파트는 서울로 밀려드는 인구들을 그 안에 서랍처럼 차곡차곡 욱여넣었고 그에 따라 지역간 경제적 간극이 생겨났다. ‘상승,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된 서울의 고층 집합건축물, 초고밀도의 공간구조들에는 도시민들의 계급격차와 더 상위 계급으로 올라가고자하는 욕망들이 수직으로 쌓여있는 것이다. 고층의 주거공간에 켜켜이 쌓아올려진 계급투쟁을 담아내는 영화들은 전에도 있었다. 벤 휘틀리의 2015년 영화 <하이라이즈>는 J.G.발라드의 1975년 디스토피아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마치 봉준호의 2013년 영화 <설국열차>에서 계급투쟁이 들끓는 열차를 수직으로 세워놓은 듯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설국열차>에서 처절한 계급투쟁을 끝이 보이지 않는 병렬의 긴 구도로 직조했던 봉준호는 결국 2019년 <기생충>에서 수직 구조의 건축물에서 그 계급투쟁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해내기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집합건축물 혹은 공동주택이라는 고밀도의 주거환경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는영화들-<콘크리트 유토피아>, <럭키, 아파트>, <백수아파트>-에서 비극적 사건들은 ‘옆집’이 아니라 ‘윗집’ 혹은 ‘아랫집’에서 일어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타지에서 온 이웃의 거주를 도운 조합원이 아파트 상층부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럭키, 아파트>에서 주인공 선우는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악취 때문에 아랫집에 살던 노파가 고독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백수아파트>의 주인공 거울은 밤마다 아파트의 윗집에서 들리는 소음의 범인이 누구인지 추적한다. 거울은 끈질긴 추적 끝에, 건설사로부터 돈을 받고 소음을 일으켜 주민들을 쫓아내도록 사주 받은 경비가 범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세입자>에서 ‘프레임 속 프레임’은 미장센으로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는 영화의 서사 구조를 가시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프레임 속 프레임’이 ‘이야기 속 이야기’ 즉 액자식 서사구조를 명시하는 사례는 흔히 있었다. <세입자>는 액자식 구성의 영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때 프레임은 ‘서사’의 단위가 아니다. ‘월월세’ 세입자를 화장실에 들이는 바람에 집에서 샤워를 할 수 없게 된 신동은 씻기 위해 공원 화장실로 향한다. 이 때 월셋집 내부에서 신동을 항공샷으로 내려다보던 카메라워킹은 공원씬의 야외까지 신동을 따라 나온다. 그에 따라 이 숏의 구도는 더 높은 곳의 초월적 시선이 인물들을 바라보는 구도가 된다. 이른바 ‘묵시록적’ 구도. 윤은경 감독은 ‘홀로그램 영상통화’라던지, 지하철 도어가 광고 영상을 상영하는 스크린이 되는 장면, 신동의 직장이 ‘배양육’을 만드는 업체라는 설정 등을 가미해 원작 소설과 다른 근미래 SF를 완성했다. 영화는 머지않은 미래를 다루고 있다. 영화가 포현하는 미래는 ‘프레임 속 프레임’의 더 싶은 심급으로 밀려나는 소외의 공포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소설 원작에서는 공포스런 기담에 불과하던 스토리가 sf적 각색을 통해 근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공포물이 되고 있다.

 

공원화장실에서 씻으려고 줄을 잔뜩 선 사람들이 묵시록적인 항공샷에 담긴 후, 이어지는 쇼트는 밤의 도시 전경샷이다. 빽빽하게 밀집된 주거용 건물들의 수많은 창문들에서 생활의 불빛들이 새어내온다. 영화의 <이창>에서 처럼 여러개의 창문이 빛을 뿜는 건물의 풍경은 각자가 하나의 사연을 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모든 프레임들을 하나의 사연이라고 한다면 ‘프레임 속 프레임’을 ‘사연 속 사연’이라고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도시에 힘겹게 월세들어 살고 있는 세입자의 방 한 구석으로 밀고 들어오는 ‘월월세’ 세입자의 사연 말이다. 사연 속 사연들은 물론 인물들의 계급적 욕망과 차별, 소외를 욱여넣고 있다. (“난 다 잘될거라는 생각을 꾸역꾸역 욱여넣는다.”)

 

감독의 영화적 각색은 카메라의 구도 뿐 아니라 카프카적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윤은경 감독은 소설<천장세>를 읽으면서 카프카의 아스트랄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소설에서는 암시적으로만 표현되었을 뿐, 어디에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있지 않은 '월월세남'을 감독은 영화의 말미에 가서 바퀴벌레 이미지로 치환한다. 이 영화적 장치에 따라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난다. 월세들어 사는 독거남 신동이 제 방 한켠에 세입자로 들인 게 사람이 아니라 ‘바퀴벌레’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의 처지가 ‘바퀴벌레’와 마찬가지로 비루하다는 것을 거울 반영으로 깨닫고 마는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속 ‘잠자’가 도시에서 도태되어가는 자아에 대한 슬픈 자화상이라면, 곰팡이가 슨 천정 벽에 바퀴벌레처럼 누워있는 신동은 한국형 도시생활자의 더욱 처연한 그림자가 아닌가. 영화 <세입자>가 특유의 재기발랄한 영화적 아이디어로 각색해낸 이미지들은 이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세입자들을 일종의 카프카적 괴물의 알레고리로 작동시킨다.

 

글·이승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