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미의 문화톡톡] 늦게 알아챈 계절과 시간
1. 안다는 것, 그리고 잊는다는 것
때가 되면 그 또한 인생이라는 걸 알게 된다는 말,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게 마련이라는 말처럼 가슴에 와닿지 않는 말도 없다. 그러나 막상 지나고 나면 이 말보다 더 명징한 위로는 없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이 말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도 ‘때’의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그리고 미래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현재의 고통 때문일 테다. 그러나 이 말이 어떤 말보다 확실한 위로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건 인간이란 불가역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시간을 역행하지도 특정한 시간에 머무를 수도 없는 불가역적인 존재, 오로지 시간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존재.
상실은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상을 잊/잃어버리는 행위와 동시에 슬픔과 고통을 야기하는 비극적 경험이다. 대개 상실은 예고 없이 갑자기 ‘당’하는 경우가 흔하고, 혹 대비했더라도 그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부정적인 방향으로 빗나간다는 점에서 비극이다. 실제로 상실의 경험이 그 자체로 트라우마가 되거나 상실 이후에 각좋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상실의 슬픔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대체 가능한 대상을 찾아 부재의 자리를 메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건, 목표, 관계, 지위와 같은 것들을 상실했을 경우 보통의 사람이라면 가능한 빨리 대체 대상을 찾아 상실의 부재를 메워 고통을 최소화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애초에 이것이 불가능한 상실이 있는데 바로 죽음으로 인한 상실이다. 대체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은 영원한 부재나 다름없다. 여러 형태의 상실 중에서도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그 자체에도 있겠지만, 존재와 부재 사이의 간극을 채울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절망 때문이기도 하다.
상실의 슬픔은 잊힐 때쯤 밀려와 우울하게 하고, 잊었다고 믿을 때쯤 튀어나와 의지를 무너뜨린다. 기억 알람을 설정해 둔 것도 아닌데 주기적으로 상실의 대상을 떠오르게 만든다. 게다가 별 의미 없는 흔적에 상실의 대상을 투영하게 만드는 순간 인간은 주저앉는다. 상실의 대상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절망감, 동시에 그를 잊고 살았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이 울부짖게 만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를 주저앉히는 힘의 세기도, 절규의 깊이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약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때가 되면 알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는 말은 영 틀린 말은 아닌 셈인 듯 하다. 그렇다면 시간은 정말로 우리를 알게 해줄까, 잊도록 해줄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확실한 것일까.
2. 계절과 시간이 엉망이 된 사람들
김애란의 단편소설 「입동」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다. 남자는 결혼 후 잦은 이사를 거쳐 비로소 자신만의 집을 갖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다. 더이상 떠돌지 않아도 된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무리한 대출로 얻은 집이기에 조금만 삐끗해도 고스란히 빚이 되어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자는 매매 계약서에 쓰인 자신의 이름을 보며 마치 가명처럼 같다고 생각했고. 가족이 자는 밤이 되면 이 집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제 자리에 놓였는지 확인하곤 했다.
남자의 이러한 불안과 의심은 아내의 행동을 바라보는 모습에서도 드러나는데 아내는 ‘남의 집’을 빌려 사는 동안 마음껏 하지 못했던 ‘집 꾸미기’에 에너지를 쏟는다. 물론 넉넉지 못한 돈 때문에 아내의 집꾸미기는 때때로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고 비슷하게 만들 수 없다면 아예 ‘가림’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한다. 남자는 그런 아내를 보며 “아내는 물건의 기능을 뺀 나머지,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 한다고 표현한다. 기능과 생활이 일상이라면 기능과 생활을 뺀 나머지는 일상적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아내는 ‘나머지’가 주는 기쁨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이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면서도 자신이 공들여 가꾸어 놓은 공간을 어지럽히는 것만큼은 용납하지 않는다.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물고 만지고 제 마음대로 하는 아이의 행동은 일상이지만 아내에게 아이의 일상은 허용될 수 없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는 일상을 잃게 되는데 바로 아이의 죽음이다.
아이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시간은 멈추고 일상과 현실은 파괴된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는 남자와 아내는 일상을 살아가는 타인을 보며 시간이 불공평하다고 느낀다. 자신들의 시간은 아이의 상실한 그 때에서 멈춰있지만 가해자를 비롯한 타인들의 시간은 유유히 흐르고, 계절은 어김없이 다음의 계절로 바뀌기 때문이다.
일상은 시간이 켜켜이 축적되었을 때, 그리고 아주 나중에서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전까지는 일상을 알아차리는 게 쉽지 않다. 바꿔 말하면 일상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곧 일상 끊어지거나, 다른 일상이 비집고 들어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상을 더이상 유지하지 못할 때, 단절되거나 파괴된 일상을 마주했을 때 인간은 비로소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시간의 흐름. 존재의 변화, 번복할 수 없는 규칙들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그것들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두고두고 그리워한다.
시간이 약이고, 때가 되면 알게 된다는 말은 어김없이 남자와 아내에게도 적용 되는 듯 두 사람은 점점 아이의 죽음과 부재를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기능을 뺀 나머지, 생활을 뺀 나머지”가 주는 집의 아름다움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다시 일상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두 사람은 애쓴다. 아이 이름으로 만들었던 통장을 헐어 대출을 갚고, 가해자가 선물로 보낸 복분자액이 튀어 얼룩진 벽에 새로운 벽지로 덮는 일련의 행위는 단절된 일상에 다른 일상을 덧대어 어떻게든 시간을 이어가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애꿎게도 과거의 일상이 툭 튀어나오면서 두 사람은 다시 한번 무너지고 만다. 언제쯤인지 모를 과거의 어느 때에 아이 혼자서 벽 한구석에 자신의 이름을 ‘기특하게’ 써 내려간 흔적을 발견한 순간 두 사람은 아이의 일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그리워하며 숨죽여 절규한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라고 반복하며 말하는 아내의 말을 남자는 기꺼이 이해한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는 말,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위로의 이면에는 위로받을 만큼 받았으니 그만 슬퍼하라는 뜻도 있다. 남자와 아내 역시 그 위로의 겉과 속을 구분하지 못할 리 없다. 다만 그 위로를 수용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누구라도 이 둘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상실의 아픔을 가진 사람 앞에서 위로한답시고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거나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라고 요구하는 건 생각보다 도움이 되지 못한다. 상실도, 슬픔도, 그리고 수용도 모두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같은 경험, 같은 아픔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어쩌면 이 말이 가장 정확한 위로일 지도 모른다.
3. 상실은 완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상실을 통해 얻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상실한 대상이 켜켜이 만들어내었던, 그러나 인식하지 못했던 가치를 ‘늦게서나마’ 알아채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많은 사람들은 늦게 알아차린 것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끼고, 오랜 시간 동안 이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늦게서야 알아채는 것을 두고 나쁘다고 말하는 건 옳지 못하다. 상실 전까지는 누구도 쉽게 그것의 존재와 의미를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지구는 찰나도 허용하지 않고 태양을 돌고 스스로 움직인다. 때가 되면 저절로 계절이 변하고, 아침 오고 자연스럽게 저녁이 온다. 지구와 자연이 만든 규칙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반복되는 계절과 시간에도 변화는 일어난다는 것, 작년의 여름과 올해의 여름은 다르다는 것, 오늘 하루는 내일 하루와 다르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다 늦게서야 알아차리는 것들이다.
상실은 완전히 치유되지 못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훨씬 크다. 상실의 대상이 어떤 방식으로 등장할지도 예상 불가능할 뿐 아니라 느닷없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일상을 뚫고 비집고 나올 때 아무렇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게다가 그 대상이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였다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슬픔과 죄책감으로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듯 일상을 단절시킬 필요도 없고, 반대로 이제는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허세를 부릴 필요도 없다. “바깥은 여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는 건 아직 여름이 아직 오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지나왔다는 깨달음 덕분이다. 계절과 시간은 반복되고 상실의 슬픔 역시 반복된다. 그리고 또 변한다. 거칠게 또는 아름답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그리고 상실의 아픔을.
*참고문헌*
김애란,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
글·장윤미
소설가 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