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헤게모니'와 유럽

2012-12-10     페리 앤더슨

‘협박’이란 말은 쓰고도 달콤하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은 2014~2020년 예산 협상에서 2개 그룹으로 갈렸다. 자국 부담을 줄여보려는 영국의 의지가 관심의 초점이 되면, 실제로는 유럽 전체의 프로젝트가 뒤죽박죽이 돼버린다. 이미 정한 국내총생산(GDP)의 1% 선에서 EU 예산을 감축하려는 목표에 사로잡힌 북유럽 국가들은 ‘연대’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하는 남유럽 국가들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다시 한번, 독일의 지도력이 요구된다.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메나헴 베긴 전 이스라엘 총리,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그리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등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일부 수상자들을 지목해서, 노벨평화상은 '노벨전쟁상'이라고 이름을 다시 붙이는 게 낫다고 곧잘 얘기해왔다. 2012년 수상자도 덜 호전적이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조롱감이다. 운 좋게도 유럽연합(EU)은 '노벨 자아도취상'이라고 기록될 만한 상을 받게 됐다. 오히려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핀란드의 노벨위원회가 EU보다 나았다. 내년에 또다시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노벨위원회가 스스로 수상자가 되기를 바란다.

현재 논란이 없지 않다. 하지만 EU에 주어진 명예가 적절한 시점에 찾아온 것만은 확실하다. 21세기 초 유럽의 자만심은 최고조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EU는 사회적·정치적 발전의 보편적 귀감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이 말에 유럽의 많은 현인들도 공감의 언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2009년부터 유로존에서 내분이 일며 이런 과도한 자기만족에 가차 없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만족의 소리들이 사라졌던가? 독일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EU에 대해 최근 저술한 <EU 헌법론>(1) 같은 당당한 사례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듯하다. 하버마스의 이 책은 2008년 출판한 <아, 유럽>(Ach, Europa)에 이어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의 중심 논문인 '국제법의 헌법화에 비춰본 EU의 위기'만큼 지적 내향성을 잘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60여 쪽 분량의 이 논문에는 100여 개 인용이 포함돼 있는데, 이 가운데 4분의 3이 독일 학자들 것이다. 조력에 감사를 표한 3명의 동료나 하버마스 자신의 것이 절반을 차지한다. 나머지 인용은 절대적으로 영국과 미국 학자들 것이다. 그중 3분의 1은 하버마스를 존경하는 단 한 사람, 영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가 차지했다. 헬드는 '카다피 스캔들'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2) 유럽의 다른 문화권 학자들은 이렇게 순진한 지역주의를 보여준 책에서 단 한 명도 인용되지 않았다.

논문의 주제는 훨씬 더 흥미롭다. 2008년 하버마스는 리스본 조약을 거칠게 비판했다. EU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결핍'(Democratic Deficit)을 보충하거나 이를 위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지평을 열지도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리스본 조약이 통과되면 정치 엘리트와 시민들 간의 기존 간극이 더욱 공고화될 뿐"(3)이라며, 유럽에도 어떤 긍정적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 대신 유럽에 필요한 것은 유럽 전체 차원의 국민투표이며, 이를 통해 EU에 사회적·재정적 조화와 군사적 능력, 그리고 특히 직선 유럽 대통령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는 논리다. 대통령제야말로 정통 신자유주의 노선을 걷게 될 미래의 유럽을 구원할 수 있다고 그는 내다봤다. 대중적 의지의 민주적 표현을 향한 하버마스의 이런 열정은 그의 기존 관점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 독일에선 이런 식의 적극적인 지지를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이런 점에 주목하면서 리스본 조약이 비준된다면 하버마스는 틀림없이 점잖게 조약집을 주머니에 넣어다니는 수준에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4)

이런 예상은 실제 완전히 빗나갔다. 하버마스는 조약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앞장서서 조약의 전도사가 됐다. 하버마스는 이제 리스본 조약이 정치 엘리트와 시민 사이에 어느 정도 존재했던 간극을 공고화하기는커녕, 인간의 자유를 향한 행진에서 전례 없이 앞으로 나아간 헌장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리스본 조약이 동시에 시민과 (국가의 국민이 아니라) EU의 국민 사이에서 유럽주권의 기초를 두 배로 강화해주고, 미래에 태어날 세계의회의 빛나는 모태가 될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리스본 조약의 유럽은 국가 간 관계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문명의 과정'을 선도하고,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것에 무력 사용을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약간은 불완전하지만 필수불가결한 현재 우리의 '국제사회'를 내일의 '코즈모폴리턴 사회'로 이끌어줄 모범적인 길을 보여주었다는 식이다. 하버마스는 <EU 헌법론>에서 "코즈모폴리턴 사회는 지구상의 마지막 영혼까지 포용하는 일종의 연합"이라 설명했다.

도달할 수 없는 에덴동산을 향해

이런 식의 황홀한 비약을 통해 지난 몇십 년간 유럽을 휩쓸던 자아도취가 수그러들기는커녕 새로운 절정을 맞고 있다. 리스본 조약은 유럽의 국민이 아니라 유럽의 국가를 다루고 있다. 세 차례의 국민투표(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2008년 아일랜드)에서 표출된 대중적 의지를 우회하기 위해 억지로 밀어붙인 조약이다. 조약에 복종해야 하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한 구조를 떠받들고 있다. 인간권리의 피난처이기는커녕, EU가 성문화한 리스본 조약은 고문과 점령 행위와 연관된 부분이 포함돼 있다. 고명하신 의원들도 이것에 대해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몽롱한 자화자찬 속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

개인의 정신세계가 집단의 지성과 결코 맞먹을 수는 없다. 군복 상의에 훈장을 줄줄이 매단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련 장성만큼이나 유럽의 상을 많이 받았던 하버마스는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명망의 희생자임이 틀림없다. 하버마스 이전의 미국 철학자 존 롤스처럼 찬미자와 추종자들만 우글거리는 정신세계에 갇혀서 자신의 입장과 몇mm 떨어진 생각과도 점점 더 대화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현대적 후계자로 자주 칭송받기도 하지만, 하버마스는 현대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가 될 위험을 안고 있다. 하버마스는 금융적 탈규제의 해악이 코즈모폴리터니즘적 각성의 축복을 받는 데 기여한다든가,(5) 서구가 범인류적 정당성을 갖는 궁극적인 에덴동산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길을 닦는다는 식의 신의론(神義論)을 흔들림 없이 완곡어법으로 설파하고 다닌다.

여기까지는, 그의 개성뿐만 아니라 개성에 영향을 미친 타락에 의해서 일어난 특수한 사례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유럽 내에서 벌어지는 실제 문화적·정치적 삶에 대해 많은 지식을 보여주지도 않고 유럽을 세계가 주목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려고 했던 하버마스의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하버마스는 유럽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한 공동통화의 현재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 같다.

유로 위기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진 EU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여기서 강조할 필요는 없다.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내내 지속된 가장 깊고 긴 경기침체에 시달려왔다. 그 혼란의 원인을 살펴보려면 유로존 위기의 기저에서 작동하는 동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는 서로 교차해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두 가지 필연의 결과이다. 첫째는 가상자본의 총체적 붕괴다. 가상자본은 1980년대에 시작된 금융화의 장주기 속에서 선진국의 시장을 굴러가게 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실물경제의 수익성이 국제적 경쟁의 압박 속에 줄어들고 10년마다 성장률이 하락하게 했다.

자본의 움직임에 내재된 이런 감속의 메커니즘에 대해선 로버트 브레너가 1945년 이후 선진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엄청난 저술을 통해 권위적인 설명을 제시했다.(6) 최근엔 이윤율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엄청나게 늘어난 사적·공적 채무 속에서 자본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막스프랑크연구소의 볼프강 스트레크가 분석해냈다.(7) 미국 경제는 모범적으로 이런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논리는 시스템 전체에 해당된다.

유럽에선 독일 통일(1990년)과 마스트리흐트 조약(1992년)에서 합의된 통화 통합의 구상, 그리고 안정성 협약(1998년)에 의해 새로운 논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조약은 독일의 요구에 따라 재단된 것이다. 공동통화는 하이에크적인 개념(8)에 충실한 중앙은행이 관장하게 됐다. 이런 중앙은행은 유권자나 정부가 아니라 '가격 안정'이라는 단일 목표에 책임을 다한다. 새로운 공동통화 지역인 유로존을 지배하는 것은 유럽 최대 경제인 독일 경제다. 독일 경제는 현재 국경을 맞대고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는 거대한 배후지인 동유럽에까지 확대됐다. 막대한 통일 비용을 지불한 독일은 성장률이 내려갔다. 이를 벌충하기 위해 독일 자본은 전례 없는 임금 억제 정책을 시행했다.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등으로 아웃소싱하겠다는 협박에 독일 노동계도 이를 수용했다.

운명 공동체는 없다

남부 유럽에서 이로 인한 경제적 결과는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9) 독일에서 제조업 생산이 증가하고 상대적 노동비용이 감소하면서 독일의 수출산업은 최고 경쟁력을 갖게 됐다. 유로존 시장에서 차지하는 독일의 비중도 커졌다. 반면 유로존의 주변부는 자국 경제의 경쟁력 손실에 해당하는 부분을 독일이 정한 규칙에 따라 통화동맹 내에서 동일하게 유지되는 이자율로 빌린 값싼 자본으로 메우면서 무감각해졌다.

미국에서 잉태된 과잉금융(Over-financialization)의 총체적 위기가 유럽을 강타했을 때, 이들 주변부 국가의 부채에 대한 신용도는 무너져내렸고, 연쇄적인 국가 부도의 두려움이 증대됐다. 미국에선 대규모 공적 구제금융으로 은행과 보험회사, 기업들이 가까스로 파산을 면하고, 연방준비은행이 수요 위축을 억지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유로존에서는 동일한 임시적 해결책의 시행을 막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마스트리흐트 조약으로 정해진 유럽중앙은행(ECB)의 규정은 회원국의 부채 매입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통 정치 질서 속에서 통치자와 피치자를 한데 묶어주는 '운명공동체'(Schicksalsgemeinschaft)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막스 베버적인 국가의 운명공동체(10)에서는 통치자가 피치자의 존재 필요를 무시하는 데 대한 무거운 대가를 지불한다. 연방주의를 흉내낸 유럽에서는 미국 모델 같은 '이전 연합'(Transfer Union)이 있을 수 없었다. 또한 위기가 강타했을 때, 유로존의 단결력은 사회적 복지 지출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강제에서만 나올 수 있을 뿐이다. 북유럽 소국 블록의 수장 격인 독일은 남유럽 국가들에 자국민에게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엄격한 긴축 프로그램 쪽으로 방향을 잡도록 했다. 이 국가들은 단일통화 도입 이후 평가절하를 통한 경쟁력 회복을 이제 생각해볼 수 없는 형편이다.

이런 압력을 받은 약소국 정부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위기 초기에 집권했던 집권 여당이 더 철저한 처방을 맡아야 할 후임 정부를 뽑는 총선에서 모두 나가떨어졌다. 이탈리아에선, 정치권 내부의 붕괴와 외부의 압박으로 총선을 치르지 않고 전문 경제관료 출신의 마리오 몬티가 이끄는 기술관료 내각이 의회를 구성하는 정부를 대신하게 됐다. 그리스는 독일과 프랑스, EU가 강요한 처방으로 인해 1922년의 오스트리아를 연상시키는 상태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오스트리아는 국제연맹의 감독 아래 국제 차관을 수용하면서 국제연맹이 파견한 고등판무관이 수도 빈에 주재하며 오스트리아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고등판무관으로 선정된 인물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우파 시장이던 알프레드 지메르만이었다. 지메르만은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을 모방한 네덜란드에서의 혁명 기도를 탄압한 주역으로, 1926년까지 고등판무관 자리를 계속 지켰다. "그는 끊임없이 오스트리아 정부를 비판했고, 정부의 무능을 강조했다. 모든 국민에게 더 많이 저축하고 희생할 것을 항상 요구했다. 그리고 정부에 대해선 훨씬 더 낮은 수준에서 예산을 안정화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런 결과에 도달할 때까지 통제가 계속될 것이라고 그는 공언하고 돌아다녔다."(11)

긴축 처방이 관철된 모든 국가에서는, 해당국 정부의 신뢰도에 대한 금융시장의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조처에 사회적 지출의 삭감, 시장 규제 완화, 그리고 공적 자산의 민영화가 포함된다. 신자유주의적 표준 목록에는 과세 압박의 증가도 들어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균형예산 편성 조항을 유로존의 17개 회원국들의 헌법에 강제로 명문화해 이런 조처들에 완전히 못을 박으려 했다. 미국에서는 '예산의 헌법 명문화'라는 개념이 정신 나간 사람의 고정관념이라고 여겨져 오래전에 폐기됐다.

새로운 '특별 관계'

2011년에 처방된 묘약으로는 유로존의 병을 치유할 수 없었다. 국가 부채의 이자율 차이는 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했다. 그렇게 쌓인 부채가 공적 부채만이 아니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부에서 추산한 바로는, 은행들의 의심스러운 채권이 1조3천억 유로에 달했다. 문제는 더 심각했고, 처방은 더욱 미미했다. 이를 관리하는 자들은 관리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허약했다. 디폴트의 유령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면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땜질했던 임시방편들은 계속될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두 지도자 간의 동반자 관계는 결코 동등할 수 없었다. "독일의 힘이 최고위층이나 중앙은행에서 나오기보다는 오히려 시장이라는 간접 수단을 통해 더 가혹한 형태로 행사될 것임을 각오해야 한다"(12)고 나는 위기 이전에 지적한 바 있다. 독일은 국내적으로 임금 억제 정책과 대외적으로 자본 규제 완화 조처를 취함으로써 그 어떤 나라보다 유로존 위기에 큰 책임이 있다. 하지만 독일은 약소국들의 채무 이행 방안을 짜는 데도 주요 입안자로 나섰다. 이런 점에서 유럽에서 새로운 헤게모니의 시간은 이미 도래했다. 이 시점에 맞춰 EU 내 독일 주도권에 대한 뻔뻔한 첫 번째 선언이 이뤄졌다.

콘스탄츠대학 법학교수인 크리스토프 쇤버거는 독일 내 지식인의 여론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인문학 잡지인 <메르쿠르>에 기고한 글에서, 독일이 유럽 내에서 행사하게 될 운명의 헤게모니 종류는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반제국주의 강의에 나오는 한심한 구호와 공통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의 법학자 하인리히 트리펠(1868~1946)이 해설한 헌법적 의미에서 헤게모니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즉 19세기에서 20세기 초 독일 제2제국에서 프러시아가 했던 것처럼, 연방체제 속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보면, EU는 본질적으로 EU이사회에 결합된 정부 간 컨소시엄의 모델에 해당한다. EU의 입법 정책 결정 기관인 이사회에서의 협의는 대중의 목소리가 철저하게 차단되고, 공상과학 소설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지구상의 모든 제도적인 찌꺼기들을 없앤 민주주의의 파란 꽃'(13)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회에 참여하는 국가들이 면적이나 국력에서 아주 불평등하기 때문에, 동등한 처지에서 상호 조정이 가능하리라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EU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인구 규모나 국부에서 앞선 국가들이 이사회에서 단결과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유럽은 독일의 헤게모니를 필요로 하고, 독일도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데 소심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핵보유국으로 현재는 대단하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인 프랑스도 자국의 역할을 재조정해야 한다. 독일은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비스마르크(1815~98) 총리가 독일 제2제국이라는 다른 연방 체제에서 바이에른 왕국에 했던 식으로 프랑스를 대해야 한다.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가 주도권을 가지면서도 제국 내 소국인 바이에른을 달래기 위해 상징적 호의와 관료적인 자율권을 베푸는 식으로 다른 구성국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자치권을 부여했다. (14)

프랑스가 제2제국에서 바이에른의 위상과 같이 자국의 위상이 낮아지는 것을 쉽게 수용할 수 있을까? 이 점은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비스마르크가 바이에른인들에게 품었던 '오스트리아인과 인간의 중간'이라는 생각은 잘 알려져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재임 시절엔 이런 유추가 그리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프랑스는 독일 우선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더 현대적인 비슷한 사례가 현 상황에 더 잘 어울릴 듯하다. EU 내에서 독일의 계획에서 따로 떨어져나가지 않고 항상 연관을 짓고자 했던 프랑스 정치인들의 열망은 또 다른 '특별한 관계'를 점점 더 연상시켜준다. 영국은 미국 진영에서 보조적 역할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프랑스가 얼마나 오랫동안 조금의 반발도 없이 굴종의 태도를 지속할지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유럽이 이제 독일어를 말한다"고 허세를 부린 독일 기민련(CDU)의 사무총장 폴커 카우더의 행동은 고분고분하게 만들기보다는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엄청나게 왜곡된 프랑스 선거제도 때문에, 프랑스는 EU의 어느 국가보다 앞으로 오랫동안 압도적으로 순응적일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새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에게서 사르코지보다 경제적 또는 전략적 독립에 대한 강경한 모습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경험보다는 그러길 희망해서 하는 얘기일 뿐이다. 똑같은 이유에서, 국민 여론과 공식적 대응의 간극이 프랑스처럼 벌어진 나라도 없다.

올랑드는 스페인의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처럼 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점에서 유권자들의 열광적인 지지 없이도 정권을 차지했다. 긴축을 할 경우 올랑드는 이른 시간에 약화될 수 있다. 올랑드가 프랑스의 대리인이 된 유럽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심각한 대중적 소요는 지금까지 그리스에서만 일어났다. 스페인에선 그 전조가 될 진동이 있긴 하다. 다른 곳에선, 정치 엘리트들은 대중의 소리를 경청해야만 한다. 심각한 곤경에 처했을 때 일반 국민이 무감각한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폭발한다는 점에 대해선 보장할 수 없지만, 맞는 얘기다. 이 점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 러시아의 경제위기 때 러시아인들이 보여줬다. 그러나 EU 국민은 상대적으로 덜 낙담한 상태다. 상황이 더 심각하게 악화된다면 그들의 인내의 끈은 더 짧아질 것이다. 모든 시나리오의 뒤에는 냉혹한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빈층까지도 험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 유로 위기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유럽 경제의 성장 위축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페리 앤더슨 Perry Anderson 영국 태생의 역사학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교수. 주요 저서로 <새로운 구세계: 미국적 세계질서에서 보조적 운명에 대하여>(The New Old World·아곤 출판사·마르세유·2011) 등이 있다.

번역 / 류재훈 hoonie@hani.co.kr <한겨레> 온라인 국제판 에디터.

(1) 위르겐 하버마스, <EU 헌법론>(Zur Verfassung Europas), 수르캄프 출판사, 프랑크푸르트, 2011. 이 책은 2012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La Constitution de l’Europe>이란 제목으로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됐다.
(2) David Held는 런던정경대(LSE)에서 리비아 지도자의 둘째아들 사이프 알이스람의 후견인이자 논문 지도 교수였다. 사이프는 자신이 쓰지 않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대학은 카다피재단에서 엄청난 기부금을 받았다. 논문 대필 논란이 불거진 다음날 헬드는 대학을 떠났고, 대학 총장도 사직했다.
(3) 위르겐 하버마스, <아, 유럽 11권>(Ach, Europa, Kleine politische Schriften XI), 수르캄프 출판사, p.105, 2008. 이 책은 2011년 나남출판사에서 <아 유럽>이란 이름으로 한글로 번역 출간됐다.
(4) 페리 앤더슨, <새로운 구세계: 미국적 세계질서에서 보조적 운명에 대하여>, 아곤 출판사, 마르세유, pp.651~655, 2011 참조. 2005년 하버마스는 프랑스의 국민투표에서 유럽 헌법안이 거부된다면 재앙이 올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열정적으로 개입했지만,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 때처럼 정작 조국 독일에서는 어떤 대중적 협의도 전혀 이뤄지지 않는 데 대해 그는 완전히 침묵했다.
(5) 위르겐 하버마스, ‘경제적 이성의 간계’, <EU 헌법론>, op. cit., p.77.
(6) Robert Brenner, <혼돈의 기원: 세계 경제위기의 역사 1950~1998>, 베르소 출판사, 뉴욕, 2006(전용복·백승은 옮김, 이후출판사, 2001). 2008년 위기까지 살펴보려면 브레너, ‘세계경제와 미국 경제위기’, <세계 금융위기인가, 자본주의의 승리인가?>(Crise financière globale ou triomphe du capitalisme?), 아곤 출판사, 마르세유, 2012. <뉴 레프트 리뷰> 제54권, 2008년 11~12월호(49∼85쪽)에 실린 브레너의 저작들에 대한 니컬러스 크래프츠, 미셸 아글리에타, 고조 야마무라 등 영미권과 유럽, 일본 학자들의 세미나 발표 논문 참조.
(7) Wolfgang Streeck, ‘민주주의-자본 공모, 막장 향하는 돌려막기 경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월호.
(8) 오스트리아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9)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독일의 임금비용에 대한 수치와 유럽 국가 경제에 대한 독일 임금의 영향에 대한 예측에 대해선 페리 앤더슨의 <새로운 구세계> pp.81~82 참조.
(10)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잘 활용했던 개념.
(11) Charles Gulick,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 히틀러까지>(Austria from Habsburg to Hitler), 버클리, 1권 p.700, 1948.
(12) 페리 앤더슨, <새로운 구세계>, p.82.
(13) 독일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본명 게오르크 필리프 폰 하르덴베르크, 1772~1801)가 무한함을 갈망하며 사용한 상징적 시어. 이후 독일에서는 ‘파란 꽃’이란 말을 이런 뜻의 속담처럼 사용하고 있다.
(14) Christoph Schönberger, ‘내키지 않는 헤게모니: EU 내에서 독일의 위상’, <메르쿠르>(Merkur), 752호, 슈투트가르트, 2012년 1월호, pp.1∼8. 쇤버거에게 개념적 모델을 제공한 트리펠은 비스마스크 시절 프러시아가 헤게모니를 행사했던 제2제국을 열렬하게 찬양한 이는 아니었다. 1933년 그는 히틀러의 권력 찬탈을 ‘합법적 혁명’이라고 찬양했다. 그는 1938년 헤게모니에 관한 책에서, 히틀러에 대해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을 합병함으로써 완전한 통일국가에 대한 독일의 오랜 꿈을 실현시킨 정치인이라는 찬사로 이 책의 결론을 내렸다. <헤게모니: 국가들을 선도하는 국가에 관한 책>(Die Hegemonie: Ein Buch von führenden Staaten), 콜하머 출판사, 슈투트가르트, p.578,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