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남부 전략’의 끝
퍼트레이어스 전 CIA 국장의 불륜 스캔들이 터지고 근동 지역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고 긴축과 관련해 공화당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어떤 사회적 기반에 의지해서 두 번째 임기를 수행할 것인가?
남북전쟁이 발발한 뒤 15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미국에서 연임에 성공한 민주당 소속 대통령은 4명에 불과하다. 우선 우드로 윌슨과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있고, 최근에는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있다. 이 중에서도 두 번의 대선에서 모두 50% 이상의 득표율로 당선된 경우만 추리면 2명만 남는다. 첫 번째 주인공은 루스벨트이고, 두 번째는 2012년 11월 6일 오바마가 이름을 올렸다.
역사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몇몇 성공 사례들처럼 근본적인 '정치적 재편'(Political Realignment)에 의해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우려는 유권자의 열망이 거둔 승리는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다수파 연합을 결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 혹은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의 창조"(1)를 통해 근본적인 제도적 개혁을 이루려는 열망이 반영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의 재편이 성공한 역사적 사례를 꼽자면, 1936년 루스벨트 당선(61% 득표, 상대 후보 31% 득표)과 1984년 레이건 당선(58% 대 40%)을 들 수 있다. 반면 오바마의 경우는 이번 대선에서 2008년의 7% 표차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 차이(51% 대 48%)로 당선됐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에 직면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공화당에 맞서는 힘겨운 상황이었음을 감안해도, 2002년 존 주디스와 루이 텍세이라가 자신들의 공저(2)에서 선언한 '부상하는 다수파 민주당'(Emerging Democratic Majority)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번 대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건국 이래 지금까지 미국의 고질병으로 남아 있는 인종차별을 완화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2008년 대선 출마 때만 해도 오바마는 미국 정치의 '탈인종화'를 위한 이상적인 후보로 보였다. 오바마는 제시 잭슨(1984년, 1988년 민주당 프라이머리 흑인 후보)의 급진적 분위기와 달리 차분한 인상으로 백인 유권자 43%의 표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1996년 클린턴의 백인 유권자 득표율과 맞먹는 수치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이 비율은 상당히 후퇴했다. 백인 유권자의 59%가 밋 롬니 공화당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오바마보다 20%포인트나 앞선 수치다. 할리우드 카우보이 출신 레이건이 재선될 때 백인 유권자들에게서 받았던 지지율 64%에 육박한다.
민주당이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WASP) 유권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건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멀리는 1964년 시민권법을 철저하게 반대했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가 미시시피·앨라배마·조지아·사우스캐롤라이나·루이지애나 남부 5개 주에서만 선거인단 의석을 확보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뒤로도 공화당은 꾸준히 정치적 전략의 일환으로 인종 문제를 부각시켜왔다. 1980년 레이건의 발언으로 심증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미시시피주 필라델피아의 작은 마을에서 '주정부의 권리'를 운운했다. 16년 전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시민권 운동가 3명을 살해한 바로 그 마을에서 행한 연설이었다. '주정부의 권리'라는 말이 암암리에 담고 있는 의미- 흑인에게 백인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해줄 수 없다는 고집스러운 태도- 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인종차별주의 전통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레이건은 최남단 지역에서 지지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백인 유권자들의 지지 덕분에 대통령 자리를 독점해오던 공화당은 1992년 빌 클린턴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 역시 남부 출신이던 클린턴이 민주당의 무게중심을 중도우파 쪽으로 이동시킨 덕분이었다. 클린턴은 두 번의 대선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기존 흑인 유권자들에게 충실하면서 동시에 공화당 지지 백인 유권자들의 표를 잠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부자들의 세금을 내리고 1935년부터 시행해온 빈곤층 가정 지원 프로그램을 중단하는 등 백인 중산층과 부유층을 위한 정책을 통해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연합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다수파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지는 못했다.
과거와 달라진 '남부 전략'의 효과
그리고 2008년 이라크전쟁과 경제위기로 조지 W. 부시의 임기 말기가 어려워지면서 민주당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버락 오바마 후보 지명은 일찍부터 이라크전쟁에 반대 의사를 표명해왔다는 이점에 덧붙여 탁월한 웅변력, 평범하지 않은 이력, 지지자들의 열렬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지자들은 선명한 매력은 없지만 '희망'과 '변화'를 외치는 그에게 끌렸다. 이런 식으로 오바마는 민주당 후보로서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자리를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그러나 백인 노동자 계급, 특히 펜실베이니아나 오하이오처럼 빈곤 지역으로 전락한 기존 산업 지역(Rust Belt)의 주민들은 오바마의 열광적인 호소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민주당 프라이머리 때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선호했다.
2008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출신 오바마는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와의 대결에서 승리한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라는 이름의 흑인이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이들에게 오바마의 피부색 때문에 민주당의 득표율이 다소 떨어진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은 분명 실례다. 그러나 정치학자 마이클 S. 루이스벡과 아이오와대학 연구팀의 대답은 단호하다. "미국이 인종 구분에 완전히 무관심한 사회였다면 오바마는 분명 훨씬 큰 표차로 당선됐을 것이다."(3)
만약 오바마와 모든 면에서 비슷한 백인 후보가 나왔다면 어땠을까? 일부 백인 유권자 그룹(전체의 3~5%)은 이데올로기적 성향 혹은 인구통계적 상황 때문에 존 매케인 대신 그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미국의 역사를 지배해온 인종차별 경향을 감안한다면 이보다 더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흑인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미국 정치의 중요한 구조적 요소이긴 하지만 공화당이 '남부 주민들에게 호소하는 전략'을 취했던 1960년대와는 차이가 있다. 당시는 미국 유권자의 90%가 백인이었지만 오늘날은 72%에 불과하다. 오바마의 승리가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다. 아프리카계의 압도적인 지지(93%)뿐 아니라 라틴계(71%)·아시아계(73%)의 지지가 없었다면 흑인 후보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60년대였다면 올해 대선에서의 오바마처럼 백인 10명 중 4명 이하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선거에서 이기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득표 중 43%는 비백인 유권자 표로 공화당(11%)과 큰 차이를 보였다. 이처럼 비백인 유권자의 영향력이 갈수록 중요해지면서 거의 4반세기 동안(1968~92년) 공화당의 우위를 보장해주던 '남부 전략'(Southern strategy)은 효력을 잃었다.
이런 역전이 민주당에 '부상하는 다수파'로서의 입지를 자동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가령 2004년 대선 때만 해도 라틴계 미국인들 중 44%는 부시에게 표를 던졌다. 여성 유권자는 어떨까?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진영은 공화당이 '반(反)여성 전쟁'을 일으킨다고 비난하며 여성 유권자의 표심을 잡기 위해 애썼지만 투표 집계를 보면 여성 유권자층 내부의 분열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백인 여성 유권자 56%, 전체 여성 유권자 44%가 롬니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여성과 소수자 유권자들이 오고 있다
민주당은 오바마 집권 기간에 새롭게 부상하는 유권자층으로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젊은 유권자다. 최근 두 번의 대선에서 젊은이들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선거 결과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통념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올해 대선에서 18~29살 유권자 수가 지난 대선 때보다 더 많았고(전체 유권자의 18%, 2008년에는 17%), 초선 때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오바마에 대한 높은 지지율(2012년 60%, 2008년 66%)을 보였다. 오바마가 동성애 결혼에 지지를 보내는 등 사회적으로 리버럴한 태도를 보이고 학생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펼친 결과였다. 가령 그는 20년 동안 월급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을 불입하면 학자금 대출을 청산해주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오바마 지지율은 2008년 62%에 비해 11%포인트 상승했다. 1992년에만 해도 아시아계의 55%가 공화당을 지지한 터였다. 라틴계의 오바마 지지율도 크게 증가했다. 롬니 후보가 미등록 외국인들의 '자진 추방'(Self Deportation)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만큼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이러한 분위기라면 10년 전 주디스와 텍세이라가 규정했던 유권자 그룹(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여성, 특히 교육수준이 높고 경제활동을 하는 미혼 여성)이 이후 미국 정치의 향방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현실성을 얻는다. 이런 대안 세력 형성에 일조한 일등 공신이 바로 1960년대 말부터 오랫동안 공화당의 집권을 보장하다가 이제 막다른 벽에 부딪힌 '남부 전략'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하다. 21세기 초 미국의 변화한 인구학적 맥락에서 공화당은 백인 중심의 구성(2012년 공화당 전당대회 참석 대표단의 98%가 백인이었다)과 정책을 고집할 경우 심각한 정치적 장애에 부딪힐 것이다.
오바마는 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 후보 자리를 다투던 2008년 초, "레이건이 빌 클린턴과 달리 미국 정치의 궤도를 바꿔놓은 인물"이었다고 역설했다. 개혁을 향한 자신의 야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그러나 오바마가 백악관에 입성하고 4년이 흘렀지만 약속했던 재편은 실현되지 못했다. 첫 번째 임기를 걸고 추진하겠다던 의료개혁은 공화당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미 연방 의회 예산국 추정에 따르면, 2022년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미국인 수는 3천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4) 이 절반의 실패는 적극적으로 국민의 이익을 방어하기보다 병원·제약회사들과 밀실 협상을 벌이는 식의 전략을 취한 오바마 대통령에게 큰 책임이 있다.(5) 또한 오바마는 금융소득에 대한 엄청난 면세 혜택을 폐지하지 않았다. 위기를 준비하고 부추기고 확산시킨 뒤 이익을 챙겨간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정책 추진을 위해 주저 없이 당대 최고 부유층의 경제적 이익을 제한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경영계를 대하는 오바마의 태도는 비교적 온건했다. 그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적 타협과 양보 때문이었다. 만약 오바마가 자신이 공언한 대로 개혁하는 대통령이 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오늘날 갈수록 거대해지는 경제적·정치적 권력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어야 한다.
글 / 제롬 캐러벨 Jerome Karabel 사회학자,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교수. 저서로 <선택된 자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의 수용과 배제의 숨겨진 역사>(Houghton Mifflin·보스턴·2005) 등이 있다.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정치적 재편’(Political Realignment) 개념과 관련해서는 John Judis & Ruy Teixeira, <The Emerging Democratic Majority>, Scribner, 뉴욕, 2002 참조.
(2) 같은 책.
(3) Michael S. Lewis Beck, Charles Tien, Richard Nadeau, ‘Obama’s missed landslide: a racial cost?’, <PS: Politicql Science and Politics>, vol.43, n°1, 워싱턴 DC, 2010.
(4) Congressional Budget Office, ‘Estimates for the Insurance Coverage Providsions of the Affordable Care Act Updated for the Recent Supreme Court Decision’, 워싱턴 DC, 2012년 7월.
(5) 의료업계에 대한 오바마의 태도와 관련해서는 Paul Starr, <Remedy and Reacion>, Yale University Press, 뉴해븐, p.194~238, 201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