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유엔의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을 보며

2012-12-11     라일라 파르사흐

이집트의 중재로 가자지구가 휴전에 들어가면서 하마스의 국내·역내 입지가 강화된 가운데 유엔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마무드 아바스 수반이 제출한 팔레스타인의 비회원 국가 지위 신청을 검토하고 있다. 최근 세력이 크게 약화된 아바스 수반은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여러 유럽 국가들의 반대에 직면해 있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회의적 태도도 극복해야 한다. (유엔은 지난 11월 29일 열린 총회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강력한 반대 속에 팔레스타인의 지위를 비회원 단체에서 비회원 국가로 격상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편집자)

"아랍 민중이 '아랍의 봄'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을 보여준 데 이어 이제는 팔레스타인의 봄, 즉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이룩할 차례다." 2011년 9월 23일 유엔총회에서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이 연설로 참석자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아바스가 다시 유엔총회 출석을 앞둔 가운데 벌어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끈질긴 저항과 세계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확인시켜줬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독립을 이룩하려는 이들의 꿈을 가로막는 세계의 역학관계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지지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11월 21일, 무슬림형제단 출신인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의 중재로 휴전 협상이 타결되면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이 중단됐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이끄는 정당인 파타와 라이벌 관계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이스라엘과의 교전에서 나름대로 소득이 있었다. 비록 수많은 사상자와 무차별적 파괴를 야기한 충돌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위상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가자지구에서 보여준 통치 방식의 문제로 지지도 하락을 겪었던 하마스의 인기가 다시금 높아진 데는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 점령군을 상대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군사력을 보여줬고, 아바스 수반과 미국·EU가 수년간의 노력에도 얻어내지 못한 봉쇄 완화 조치를 이스라엘로부터 쟁취해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랍 세계와 터키가 하마스를 적법한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집트 총리, 튀니지 외무장관, 아랍연맹 대표단도 잇따라 가자지구를 방문했다.

아랍의 봄 이래 최초로 발생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 사태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는 했지만 중동 지역에서 일고 있는 유례없는 민주화 요구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랍의 봄을 지켜본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오슬로 협정 체제의 종식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히 원하게 됐고, 협정의 산물인 파타 정권과 그 근간이 되는 2개 국가 해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자고 주장하게 됐다. 또한 청년층을 위시한 많은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정치권이 독립투쟁의 미래와 그 의미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로 빚는 갈등도 가시화됐다.

2011년 2월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이집트 혁명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라말라·가자·나블루스 등지에서 많은 시민, 청년, 재야 인사, 비정부기구 관계자들은 2007년 이래 각각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통치하고 있는 파타와 하마스 간의 동족 갈등 종식을 촉구했다. 양대 세력은 주민들의 압력 속에 협상을 시작했고, 그 결과 2011년 5월 이후 3건의 화해조약을 체결했다. 비록 사문화되다시피 했지만 이 조약 덕분에 하마스는 정계에서 정당성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양쪽 지도자들이 이렇다 할 국민 화합을 이끌어내지 못하자 주민들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2011년 5월 이후 팔레스타인에는 비폭력 시위가 자리를 잡았다. 팔레스타인을 고립시키는 장벽 건설에 반대하는 '벽을 멈춰라'(Stop the Wall) 캠페인을 비롯해, 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투자철회·경제제재(BDS·Boycott, Divestment and Sanctions) 운동, 인권·여성·정치범후원 부문의 많은 단체와 노조가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라말라에 소재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청사 '무카타' 앞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고, 라말라와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한 칼란디아 검문소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한 정보 활동을 펼치는 한편 식료품 물가 인상에 항의하는 농성을 주도했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열기를 발산하는 팔레스타인 사회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분명했다.

'평화 프로세스' 떠넘기기

첫째, 팔레스타인의 국가주권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시위자들은 단순히 국가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난민의 귀환을 보장받고 정치적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2011년 5월 15일 '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이라는 뜻.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추방이 시작된 날)를 기해 여러 청년단체와 민중조직, 비정부기구들은 분리장벽을 따라 거리행진을 벌이며 난민들의 귀환권이 불가침 권리임을 다시금 주장했다.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팔레스타인 출신자들이 1948년 파괴된 여러 마을에서 기념집회를 열며 시위에 힘을 실어주었다.

둘째, 파타와 하마스의 통치 구역 전체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의미의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민주화 프로세스가 재개되는 것이었다. '독립청년운동', '존엄성을 위한 팔레스타인 그룹' 등 이런 움직임을 주도하는 단체들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선거 실시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NC)를 해체한 뒤 투표를 통해 재조직할 것을 요구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입법조직인 팔레스타인민족회의는 난민, 해외 동포, 이스라엘계 아랍인들을 비롯해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출범했지만 오슬로 평화협정에서 배제되면서 1988년 이후 한 번도 개회하지 못했다. 이런 유령 의회를 재건하려는 점령지구 청년들의 의지는 오슬로 협정으로 산산조각 난 민족정치 조직을 되살리려는 팔레스타인인 디아스포라 단체들의 오랜 염원을 이어받은 것이다.

시위자들의 세 번째 요구는, 바로 난관에 봉착한 오슬로 협정과 관련 있다. 이들은 유명무실한 '평화 프로세스'와 이스라엘과의 협력 정책을 포기할 것을 주장했다. 2012년 초, 요르단 암만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대화 재개'를 시도하자 점령지구 주민들은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즈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주의자들이 라말라와 예루살렘에서 회동하자 점령이 지속되는 한 이스라엘 쪽과 모든 접촉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많은 청년단체들이 반발했다.

아랍의 봄을 지켜본 젊은 투사들은 독립투쟁을 국가권력이 아닌 권리 쟁취의 차원에서 과감하게 재정의했다. 2005년 170여 개 국제단체들이 출범시킨 보이콧·투자철회·경제제재 운동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들은 인종차별적 정권을 상대로 싸우면서 3가지 기본 원칙을 수호하려고 했다. 즉 점령을 종식시키고, 난민 귀환권을 보장받고, 모든 이스라엘 거주민이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유엔에 가입 신청을 하기로 한 것은 이스라엘과의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몸짓인 동시에, 오슬로 협정과 파타 및 하마스의 통치에 적대적인 여론을 무마하려는 취지가 숨어 있다. 아바스 자치정부 수반이 유엔에서 2012년에 행한 연설과 1년 전에 했던 연설을 비교해보면 그간 자치정부가 시위자들의 언어를 모방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메시지를 얼마나 통제·조종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두 개의 연설은 '팔레스타인의 봄'을 국가 수립 및 독립 쟁취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둘 다 국제사회가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2011년 연설에서는 아바스 정부수반이 팔레스타인이 유엔에 정회원국으로 가입하기를 희망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미국의 반대로 인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입 신청에 필요한 정족수의 찬성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2012년 유엔을 다시 찾은 아바스는 이번에는 비회원 국가 지위(바티칸과 유사) 인정을 요청했다. 이 지위를 획득하면 팔레스타인은 국제형사재판소(ICC), 국제사법재판소(IJC), 각종 유엔 산하기구에 가입해 이스라엘이 일으킨 전쟁과 국제법 위반 사건들을 제소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점령이 끝나거나 난민 귀환권까지 보장받게 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자치정부가 유엔에서 벌이는 이런 투쟁은 과거 팔레스타인 지역의 22%에 해당하고, 서안지구·가자지구·동예루살렘을 포함하는 지역에 주권국가를 세울 권리를 인정받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바스는 팔레스타인의 원래 영토 가운데 적절한 부분을 팔레스타인들에게 돌려줘야 1948년 그들이 겪은 추방의 수모를 부분적으로나마 보상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1947년 채택된 유엔 결의안 181조의 팔레스타인 영토 분할 합의에도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아바스 자치정부 수반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은 국가만이 귀환권과 존엄권, 경제적 번영권을 비롯해 주민들의 각종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고도 역설했다.

정권의 인기가 추락하는 상황을 감안해 아바스는 유엔에 가입 신청을 제출한 주체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아닌 팔레스타인해방기구였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아바스는 2011년과 2012년 연설 모두에서 난민, 이스라엘 시민권자, 해외 동포, 점령지구 주민 등 모든 팔레스타인인의 단결을 언급했다. 이런 활동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다시 국제적으로 이슈화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아바스 자치정부 수반은 이 문제를 미국이 독자적으로 해결하려 드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유엔에 손을 뻗은 것이다. 이 전략은 2011년 9월 23일 연설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유엔의 각종 산하기관이 채택한 결의안들을 통해 유엔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유엔이 더 중요하고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해주기 바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 아바스의 어조는 한층 강경해졌다. 유엔 연설에서 그는 팔레스타인 시위대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했다. 이스라엘의 '식민정착촌 건설'만을 비난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동예루살렘과 점령지구에서 '인종차별' 및 '인종청소' 정책이 자행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이는 지금까지 일부러 사용을 삼가던 표현들이다. 2011년에만 해도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이웃 국가 간에 평등과 균형을 바탕으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 정부와 국민에게 손을 뻗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이스라엘 정부가 '2국가 인정 해법'을 실패시키고, 오슬로 협정의 본질을 제거해버렸다"며 노골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행보를 통해 아바스가 노리는 것은 무엇보다 국민의 환심을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점령이 지속되는 가운데 오슬로 협정이 표류하고 협상은 지지부진하자 민심이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바스의 수사적 변화는 이스라엘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기도 하다. 지난 9월 유엔 연설에서 아바스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쪽에 넘겨준다는 땅은 "임시 국경 내에 국가를 건설하자는 이스라엘의 일방적 계획에 따라 기존 식민군사 점령 구역들에 새로운 이름만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한층 강경해진 아바스의 어조

이처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국제사회에, 간접적으로는 미국에 일침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과거 연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부분으로, 아랍의 봄 이후 생겨난 낙관적 전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해까지는 세계 주요국들에 평화협상 재개를 위해 힘써달라고 주문하던 아바스도 지금은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용인하고, 처벌도 가하지 않는 현실을 씁쓸하게 인정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1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대담함도 보여줬다. "인종식민통치를 비난·처벌·금지해 완전히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평화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보이콧·투자철회·경제제재 운동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내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유엔에서 벌이는 활동을 통해 얼마나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유엔의 이스라엘 제재를 이끌어내기 위해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지도자들에게 더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 20일 실시된 지방선거 결과, 나블루스·라말라·제닌에서 다수의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것은 파타의 영향력이 약화됐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높은 투표율로 알 수 있듯, 팔레스타인인들은 국가 수립 여부와 상관없이 자유와 존엄성을 누릴 권리만은 지켜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 라일라 파르사흐 Leila Farsakh 주요 저서로 <팔레스타인 노동력의 이스라엘 이주: 노동, 땅 그리고 점령>(루틀리지 출판·런던-뉴욕·2005) 등이 있다.

번역 / 최서연 qqndebien@naver.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르몽드 세계사 2>(공역·20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