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원의 시네마 크리티크] <미키 17>, 기술복제시대의 인간성

2025-03-24     이수원(영화평론가)

봉준호의 SF 신작 <미키 17>(Mickey 17, 2025)은 리얼한 시나리오와 재기발랄한 연출을 통해 기술복제를 맞닥뜨린 인간의 미래를 탐구한다. 한갓 소모품으로 전락한 개인의 상황을 SF적 상상력으로 극대화시킨 이 영화의 근저에는 인간성 파괴를 문제삼되 SF의 화려한 스펙터클 대신 짜임새 있는 내러티브로 승부하려는 감독의 뚝심이 깔려있다. 특수효과의 과잉을 우회하고 “발 냄새 나는”(봉준호) 인간미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과학기술에 의한 윤리 침해와 인간의 아우라 붕괴, 그리고 인간 개개인에 대한 희망을 사유한다.

 

우주 개척의 실체

우주 개척(탐험)은 SF 장르를 대표하는 핵심 주제로, 우주선과 우주비행사, 외계 생명체는 SF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아이콘들이다. 광활한 우주에서 펼쳐지는 영화들은 대개 지구 밖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간(특히 과학자와 사업가)의 개척정신과 그에 따르는 위험을 다루며, 이때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망망대해 같은 곳에서 미미하기만 한 인간의 위상, 혹은 고난을 헤치고 끝끝내 살아남는 위대한 인간성이 부각되기도 한다. 종종 낯선 외계 괴물의 등장이 그 과정에서 스펙터클한 볼거리와 끔찍한 공포라는 장르의 재미도 선사한다.

SF 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나 전설적인 SF 호러 <에일리언>(1979)에서는 뚜렷하게 조명되지 않지만, 대개 스크린상에서나 현실에서 우주선이 머나먼 항해를 감행하는 이유는 인간의 이기 때문이다. 허구세계에서 시간적 배경은 대개 지구 멸망 이후로 설정되며, 다가올 종말 즉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예측을 바탕에 깔고 있다. 황폐해진 지구를 떠나 인간이 거주할 만한 새로운 정착지를 탐험하는 <인터스텔라>(2014), 개척 행성을 무대로 펼쳐지는 <패신저스>(2017),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그린 <애드 아스트라>(2019)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인간의

이러한 우주로의 진출과 새로운 기지 구축은 순수하게 인류의 생존만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행위다. 동서냉전기에 벌어진 미·소 간 경쟁적인 우주 개척은 가장 유명한 예일 것이다. <미키 17> 역시 ‘니플하임’이라는 얼음행성을 개척하여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정치인 마셜의 ‘익스펜더블(expendable. 소모품)’ 프로젝트에 주인공 미키가 자원하면서 본격적인 서사로 돌입한다. 동 프로젝트는 가공할 위험과 위협으로 가득 찬 미지의 환경에 신속히 적응하고 정착하기 위해 한 인간을 대놓고 사전 실험대상으로 삼아 최대한 안전한 점령을 준비하는 것, 요컨대 마루타처럼 미키를 끊임없이 복제하여 낯선 우주의 공격 아닌 공격에 내던지는 것이 내용이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동명 원작에서는 지구 멸망 이후가 배경이지만, 봉준호가 이를 현재 기준 30여 년 내인 2054년으로 앞당긴 것은 동시대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에 비춰볼 때 시의적절하다.

전작들에서도 일관된 요소인 감독의 계급의식은 과거 강대국의 식민지 개척에 비견할 수 있는 행성 개척의 실제 현장에 여실히 담겨 있다. 새로운 점령에 늘 희생이 필요함은 역사가 증명한 바 있다. 원주민들이 입는 피해를 제외한다면, 예외없이 최하층 계급이 그 현장에 투입됐다. <미키 17>에서 개척단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한 마셜 부부의 암흑 같은 탐욕에 이용당하는 다수 역시 (미키 17이나 동업자 티모처럼)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채무자, 목숨 부지가 목적인 죄수 등 대개 자본주의 사회의 하층부를 구성하는 이들이다.

 

인간 프린트

 

미키의

SF물로서 <미키 17>의 핵심적인 장르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을 프린트하는 기술이다. 제목이 함축하듯 주인공의 존재 자체의 근간이며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심축이기도하다. 미키 반스를 17번째 프린트한 버전인 ‘미키 17’, 신기술의 적용과정에서 발생한 부정적 결과 혹은 우연과 운명의 조화로 탄생한 ‘미키 18’, 금지된 ‘멀티플’(미키 17과 미키 18의 공존)의 발생 모두 바로 이 인간 프린트 기술에 기인한다.

다소 생소한 어감의 인간 ‘프린트’는 인간 복제의 한 방식으로, 영화에서 제시된 바에 따르면 생체정보와 과거 기억을 업로드 해놓고 무한정 몸을 출력하는 기술이다. 기존 SF영화에 나오거나 실제 과학자들이 추진하는 생명 복제 방식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과거 파문을 일으킨 후 중동 어딘가에서 낙타를 복제 중이라는 황우석 교수의 세포 배양 기술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여하튼 상상의 힘은, 특히 SF에서, 무한하고 또 혁신적이지 않던가. 영화에서는 죽음을 맞이한 미키 버전을 용광로에 폐기시켜 추출한 재료를 버무려 새로운 미키의 몸을 뽑아낸다. 그 공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고, 대신 미키 17이 탄생하기까지 이전 미키들의 죽음과 부활이 플래시백으로 펼쳐진다. 흥미롭게도 그 여정의 연출은 서사적 내실과 재미를 동반함에도, 비주얼에 힘입어 흡사 역겨움 내지는 혐오감이라 할 만한 반응을 유발한다. 다양한 임무 수행 후 필연적 죽음에 이르는 직전 미키들이 용광로에 던져진 뒤 금세 미끈미끈한 알몸들로 쭉쭉 뽑아져나오는 공정이 반복적으로 속도감 있게 이어지는데, 일종의 시각적 포화(saturation)에 기인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장면이다.(물론 개인에 따라 재미만 느낄 수도 있다) 엔딩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인간 프린트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감안할 때, 관객이 이성보다는 몸으로 먼저 반응하도록 하는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현재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 복제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인간은 물론 다른 생명체에 대한 배양과 증식 역시 윤리적으로 지극히 민감한 사안이기에 오직 연구 목적으로 학계에서 매우 엄격한 통제하에만 허락되는 실정이다. 바꿔 말하면 기술상으로는 이미 인간 복제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미키 17>에서 인간 프린트가 지구 밖 외계에서만 익스펜더블로 자원한 1명에 한해 실행되며, 무엇보다 멀티플이 금지된 것은 이와 같은 동시대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선술했다시피 영화는 현실의 빗장이 머지않은 미래에 풀릴 것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미키 17>에서의 프린트 기술에 의해서든 줄기세포 배양 등 여타 생명공학기술에 의해서든 인간 복제는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는 기술로 제시된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거대한 황금알을 낳는 과학기술이 언젠가 지극히 반상업적인 윤리적 통제를 뚫고 인간 개개인의 진정성을 해체시킬 날이 도래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미키 17의 아우라

발터 벤야민은 가장 혁신적이라 꼽히는 그의 저서 『기술(적)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원본과 모사의 차이를 ‘일회성과 지속성’ 대 ‘일시성과 반복성’의 차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복제기술 발달이 예술작품 원본의 진품성과 일회성, 즉 그것의 아우라 붕괴를 촉발한다는 의미이다. 예술작품을 대상으로 한 그의 논의를 작품이 아닌 인간에게 단순 적용시켜보면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이라는 그야말로 최후의 아우라가 붕괴된다. 미키 반스의 여러 복제물 중 하나인 주인공 미키 17은 바로 그 예이다. 그런데 이런 근미래 상황을 예견하면서도 봉준호는 미키 17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놓치 않음으로써 여전히 인간 개개인이 가진 아우라의 편에 서보려고 한다.

미키 17의 고유성은 이전 16개 버전의 폐기와 멀티플 금지라는 제도적 장치 때문에 일차적으로 보호되지만, 인간미라는 주제의식과의 연결성은 미키 18과의 대비에 의해 부각된다. 예기치 못한 미키 18의 등장 전까지 미키 17은 (주인공이긴 하나) 일상적인 캐릭터로만 존재한다. ‘원본’인 미키 반스에 대한 정보가 미미한 채, 친구 티모와 마카롱 가게를 하다가 망해서 사채업자에게 쫓겨 지구를 떠나기로 했다는 사실만이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익스펜더블이 된 후 우리가 보는 미키 17을 특별히 원래의 미키와 비교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강력한 여전사 타입의 애인 나샤의 사랑과 수호 덕에 비우호적인 주변 환경에서 살아남고 심신의 역경을 극복하는 대체적으로 나약하고 보호받는 캐릭터로 확정된다. 미키 18의 등장은 이런 그의 나약함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런데 개인의 아우라라는 측면에서 미키 17의 부드러움 혹은 초식남의 면면은 거칠고 폭력적이고 남성적인 미키 18과 차별화되는 그만의 개별적 속성이다. 미키 18의 존재로 생각지 못한 미키 17의 개성이 부각되고 이는 그만의 ‘아우라’로 빛을 발하게 된다.

비록 나약하지만 몸으로 부딪치며 고군분투하는 것은 미키 17의 보다 실질적인 고유성이다. <미키 17>이 발내 나는 영화이길 바랐다는 말의 의미도 이러한 그의 몸 사용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미키 17은 땀내 나는 캐릭터의 전형이다.(이 글에서는 땀내를 발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다이 하드’ 시리즈의 브루스 윌리스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톰 크루즈, 홍콩 무협코미디의 대가 성룡이 맡았던 인물들이 그러하듯, 발로 뛰고 몸으로 세상에 맞서는 계보를 잇는다. 심지어 끊임없는 죽음과 부활을 겪어야 하는 몸 자체의 극단적 시련을 의무적으로 감내해야 하기에 그들과는 또 다른 새로운 차원에 위치한다.

 

크리퍼와의

후반부, 익스펜더블만이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행성의 낯설고 혹독한 얼음땅을 배경으로, 개척단에게 잡힌 아기를 구하러 몰려든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를 위해 그가 전력 질주하고 노심초사한 결과 마침내 크리퍼 모체와 소통하고 아기를 돌려주기까지는 (이빨만으로 밧줄을 지탱하여 아기 크리퍼를 구해내는 나샤의 근성을 포함하여) 본질적인 인간성을 시청각적으로 구현한다. 그 인간성은 기계성, 기술성과 차별화되는 그 무엇이다. 다른 SF물에서 야심차게 선보이는 신기하고 화려한, 지루할 틈 없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폼 나는 시청각적 볼거리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도 차갑고 깔끔한 첨단 기술의 전시 대신 인간 개개인의 이러한 전력투구와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 아닐까...

나약하게만 보였던 미키 17은 결국 인간을 프린트로부터 구원한다. 폐기 처리된 이전 16명의 미키, 그리고 스스로 희생을 택한 미키 18 역시 모두 고유한 개개인이라는 암시와 함께. 여기서 아직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인간이 대상이기에 더욱 심도 있는 성찰을 유발하는 중차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복제 인간 역시 엄연한 독자성을 갖춘 개별 존재자임을 존중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 이는 인간을 대체하거나 인간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 창조된 수많은 SF 영화들의 로봇이나 인조인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들의 고민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 개개인의 아우라를 논한다는 면에서 다른 차원에 있다. “파괴되지 않는 인간존엄성의 서사” , 기술복제시대의 인간성문제다. 봉준호는 가속화될 복제와 아우라 파괴 시대에 여전히 땀내 나는 인간미라는 화두에 천착하고 있다.

 

 

글·이수원
영화평론가, 전남대학교 교수.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한국본부 국제이사. 영화와 디지털문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