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만호의 숨은 거상들

-석유와 곡물로 떼돈 버는 스위스 중개상

2012-12-11     마르크 게니아

스위스 제네바의 도심 바스 거리에 자리잡은 군보르 본사의 작은 금빛 명판은 흔한 로펌 간판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뒤에는 2011년 매출 800억 달러를 기록한 러시아 원유 트레이딩 전문회사가 숨어 있다. 시계 제조사나 은행과 달리 원자재 중개업체는 레만 호수 끝자락에 위치한 제네바를 화려한 간판으로 환히 밝히지도 않고, 돈 들여가며 각종 잡지에 요란하게 광고를 싣지도 않는다.

스위스 제네바는 지난 10여 년에 걸쳐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을 위협할 정도로 세계적인 원자재 거래 시장으로 도약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비톨·군보르·루이드레퓌스·머큐리아·번기 등 원유·광물·농산물 트레이딩의 메이저 회사들이 로잔과 제네바로 본사를 이전했다. 제네바에는 카길을 비롯한 여러 동종 업체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둥지를 틀고 있기도 하다. 세계 원유·곡물·커피·설탕 거래의 상당 부분이 레만 호수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1) 제네바에 주소지를 둔 회사만 400곳이 넘고 이들의 연매출액은 8천억 스위스프랑(약 6600억 유로)에 달하며, 직접 고용한 인원은 9천 명에 육박한다. 스위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전통적 대표 산업으로 손꼽히는 은행업과 맞먹는다. 구리·아연 등 광물 무역 부문에서는 독일어권인 추크주(州)도 각광받고 있다. 매출액으로 따지면 네슬레는 더 이상 스위스 제1의 기업이 아니다. 2011년 실적에서 네슬레는 4위로 밀려났고, 비톨·글렌코어·트라피규라 등 상품 트레이딩 업체가 1위부터 3위까지 휩쓸었다. 이들의 매출액은 각각 2790억, 1740억, 1140억 스위스프랑(약 2320억, 1450억, 950억 유로)을 기록했다(스위스 경제지 <한델스차이퉁>, 2012년 6월 27일자).

이런 발전은 스위스인과 제네바 시민도 눈치채지 못하다시피 했다. 스위스 언론도 200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곳에 자리잡은 러시아·프랑스·미국 중개상들은 스위스 당국이 제공하는 평온함뿐만 아니라 각종 유엔 기구와 대규모 금융시장이 인접해 자본 조달이 용이하다는 점도 높이 평가한다. 제네바 주정부의 경제 홍보 포털 사이트 'whygeneva.ch'는 또 다른 결정적 이유를 언급하고 있다. '유리한 세제'에 다양한 '조세 최적화' 가능성까지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애매한 표현을 풀어보면, 이곳에서는 매출의 80% 이상이 국외에서 발생하는 모든 기업은 이익에 대해 11.6%에 불과한 세율이 적용된다(반면 프랑스와 벨기에의 법인세율은 33%가 넘는다). 원자재를 지구 방방곡곡에서 취급하지만 정작 스위스 시장에서는 보잘것없는 양만을 판매하는 중개상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제도다.

최적의 조세 회피와 최적의 책임 회피

이 업체들은 조세 비밀에 가까운 불투명성 때문에 스위스 연방 금융감독원, 뒤이어 스위스 라디오·텔레비전(RTS)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레만 호수를 끼고 제네바와 이웃한 보주(州)의 경우 2006년 생프렉스에 법인을 설립한 브라질의 대형 광물 중개업체 '발'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이 지난 2월 발각됐다.(2) 주 당국은 이 업체에 주와 시에서 부과하는 지방세를 면제해주고 연방정부세를 80% 감액해줬을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제공하는 자료만으로 과세표준을 정한 뒤 그 근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후 확인도 하지 않았다. 발은 2006∼2009년 2억8400만 프랑(약 2억3600만 유로)의 세금을 납부했다고 발표했는데, 이 회사가 진출한 세계 38개국에서 생프렉스로 유입된 실제 이익을 토대로 세액을 산출해보면 무려 30억 프랑을 덜 낸 셈이다.(3)

이런 사례는 자크올리비에 토만 제네바무역운송협회(GTSA) 회장에게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스위스가 세제 혜택에서는 두바이·싱가포르 등 주요 중개시장을 뒤쫓으며 선두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개인, 즉 직원들에 대한 세제는 제네바가 유리할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한 원유 트레이더는 이렇게 말한다. "제네바에서는 개인소득 세율이 높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간부들은 보수의 상당 부분을 상여금 형태로 수령하고, 이는 유리한 조세제도가 적용되는 역외 계좌로 대부분 입금된다." 또 다른 트레이더가 부연설명을 한다. "평범한 회계 담당자들이 왜 큰돈을 거머쥐고 퇴직할까? 이런 상황을 다 알고 있으니 입단속 시키는 것이다."

회계 담당자는 법률 자문을 받아 복잡한 회계 처리 방식을 구축하기도 한다. 이 업체들은 자신은 그저 밀이나 원유 따위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며 세계 무역에 일조하는 일개 중개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도 굳이 이국 지역의 법적 관할하에 놓이려 한다. 2006년 임대 선박 '프로보 코알라'호를 통해 유독성 폐기물을 코트디부아르에 무단 투기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원유 중개업체 트라피규라의 경우 마셜제도·바하마제도·키프로스 등 세계 각지의 조세천국에 사업장 40곳을 두고 있다.(4) 조세 최적화와 법적 책임 희석을 위한 노력은 비단 트라피규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중개업체들은 세계 시장 장악력이 클수록 그에 비례하는 과감함을 보인다. 21세기 초 원자재 가격 급등에 힘입어 이들은 기존 중개상 역할을 넘어 에너지자원·농식품·광물 가격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로 행동반경을 넓혔다. 제네바 고등경영학교 에마뉘엘 프라그니에르 교수는 "주유소, 농장, 정유시설, 광산을 사들이면서 공급사슬의 상부인 생산이나 하부인 유통·판매까지 개입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중개업체들은 본업인 물류업에서 벗어나 생산자, 유통업자, 광산 채굴자 등으로 변신하고 있다. 반대로 토탈·엑스트라타·발 등 전통적으로 원자재 생산에 주력하던 업체들이 상품 중개 자회사를 설립해 임대·트레이딩 기업 대열에 합류하기도 한다.

<마이닝저널>의 크리스 힌데에 따르면, 이제 메이저 업체들은 '가격결정자' 지위까지 확보했다.(5) 2010년 비톨과 트라피규라의 일일 원유 판매량은 무려 810만 배럴에 달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베네수엘라의 수출량을 합한 수치다. 세계 아연 시장의 55%, 구리 시장의 36%를 장악한 글렌코어도 가격 결정 레이스에 동참하고 있다. 이 정도로 영향력을 키운 거대 업체들은 지정학적 주체로까지 변모하고 있다. 2011년 비톨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뿐만 아니라 트리폴리로 진격하는 리비아 반군에게도 원유를 공급했고, 글렌코어는 2011년 7월 남수단이 독립한 지 불과 사흘 뒤 남수단의 새 수도 주바와 판매계약을 체결했다.(6) 원자재 무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사례가 적지 않다. 이 기업들은 막대한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로 각국 정부로부터 공급계약을 따낸다.

"교역을 규제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중개상들은 늘 세계 뉴스의 중심에 가까이 있다. GTSA의 토만 회장은 "시장에 원자재를 공급하다 보면 분쟁국가에 소재한 생산업자로부터 상품을 공급받기도 하는 게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거래는 입찰을 거쳐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토만 회장은 상품 중개 자금조달의 선두주자인 BNP은행에서 관련 업무를 담당한 바 있다. '이면거래를 통해 공급계약이 체결될 위험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은행은 공급자의 신용, 구매 가격, 수익자, 거래 조건 등을 사전에 조사할 뿐만 아니라 해당 거래가 금수 조치나 법령을 위반하지 않는지도 확인한다"며 안심시킨다. 그렇지만 어떤 나라의 권력자가 중앙은행을 자기 호주머니처럼 다루는지는 은행도 알 수 없다(사실 알려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위험성을 해소하기 위해 업계 관계자들이 원자재 시장의 투명성 강화를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토비요른 토른크비스트 군보르 회장은 "교역을 규제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본다"고 말한다. 토탈의 석유 중개 자회사로 제네바에 소재한 토탈 오일 트레이딩의 피에르 바르브 사장도 "우리 나름의 비밀이 있고, 이는 해당 국가와 우리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며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7)

이 업체들은 이런 비밀을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글렌코어는 오랫동안 미꾸라지 전술을 사용해왔다. 1994년 'Global Energy and Commodity Resources'(글로벌 에너지 및 상품자원)의 머리글자를 딴 글렌코어(Glencore)로 개명하기 이전의 회사명은 '마크리치&Co.AG'였다. 마크 리치는 바로 요주의 인물로 알려진 창업주의 이름이다. 벨기에 출신으로 한때 미국에서 살았던 그는, 스위스 고유의 중립정신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 국제사회의 각종 금수 조치를 무시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흑백인종 분리정책) 체제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끌던 이란, 피델 카스트로가 정권을 쥔 쿠바와도 교역을 서슴지 않았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10대 수배자 명단에 오르기도 한 그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날에 특별 사면을 받았지만 그 근거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글렌코어는 2011년 5월 기업공개를 하고 런던과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면서 대중의 날카로운 눈길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대대적인 자본 투입과 동시에 글렌코어는 그동안 누려온 평온함과 투자자들의 매수 열기를 맞바꾸었다. 특히 마찬가지로 주크에 소재한 거대 광물 생산업체 엑스트라타를 40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글렌코어의 증시 상장으로 회사 지분의 상당 부분을 보유한 6명의 주주 겸 간부들은 단숨에 갑부로 등극했다. 반면 비톨의 이언 테일러 회장은 이러한 동종 업계의 움직임에도 꿋꿋했다. 그는 사외 주주, 기자들과 긴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상장사 대열에 동참하고 싶은 기분이 싹 가신단다.

글렌코어의 증시 상장 이후 이반 글라센버그 회장이 거머쥔 주식의 시가총액은 161억9천만 달러로 아프리카 남부 내륙국인 잠비아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을 상회한다. 글렌코어는 모파니 구리광산(MCM)과 공동으로 잠비아 최대의 구리·코발트 광산을 소유하고 있다.(8) '구리 벨트'라 불리는 잠비아 북부 광산지대에 위치한 이 광산은 잠비아 세무 당국의 요청으로 실시된 회계감사 보고서가 지난해 유출되면서 도마 위에 올랐다.(9) 컨설팅회사인 그랜드 손튼과 에콘 포이리는 2005년에서 2008년 사이 MCM의 회계 자료에서 많은 '불일치' 사항을 발견했는데, 이는 세금을 축소하려는 사 쪽의 고의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었다. 잠비아에서 과세돼야 할 수익을 가격 이전 메커니즘을 통해 스위스로 이전하고 이곳에서 세금을 납부한 것이다. 글렌코어는 2011년 6월 2일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관련 서류에 사용된 세금공제 계산법에 '실수'가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스위스 시민단체 베른선언을 비롯한 비정부기구(NGO)들이 연대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스위스 지부에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는 현재 처리 중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개상들의 평온함이 깨질 조짐은 없다. 스위스 정부가 무역업을 돈세탁금지법 적용 대상에 포함시키려던 계획을 최근 포기한 것도 이를 증명한다. 토만 GTSA 회장은 "국제무역과 이에 수반되는 자금조달, 결제는 은행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은행에는 이미 돈세탁금지법이 적용되고 있다. 게다가 트레이딩 업체들은 부패방지법을 비롯한 스위스 형법 일체를 준수할 의무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크 피에트 OECD 부패방지 위원장은 이런 규제로는 불충분하다고 본다. 그는 유엔이 이라크에서 추진한 '식량 수입을 위한 원유 수출 프로그램'(Oil-for-Food Program)을 둘러싼 비리 조사에도 참여했는데, 당시 많은 스위스 소재 기업들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피에트 위원장은 "스위스가 원자재 교역의 허브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은행의 철저한 비밀 유지와 되도록 규제를 최소화하려는 정책 성향"이라고 분석한다.

스위스의 이미지 추락 우려 깊다

이런 상황은 스위스 특유의 모순적 현상을 야기한다. 스위스연방은 한편으로는 인권 수호에 힘쓰고 자랑스럽게 개발원조에 적극 참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격적인 조세정책으로 원자재 중개업체들을 유인하면서 이 기업들이 개발도상국에 설치한 지사에서 벌이는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체한다. 하지만 이처럼 크나큰 양심적·정치적 괴리를 방어하기란 갈수록 쉽지 않다. 얼마 전 스위스 정부가 스위스를 간접적으로 경유해 세계로 판매되는 엄청난 양의 석유와 구리, 밀에 대해 조사를 벌이기로 한 것도 외부의 압력에 못 이겨 내린 결정이다(이는 과거 이른바 '탈세 산업'에 대한 수사를 벌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2011년 12월, 스위스에 본거지를 둔 기업들이 전세계 어디서나 인권을 존중하고 환경을 보호하도록 스위스연방 국회에 법제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10) 연방 평의회는 마지못해 해당 분야에 관해 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11)

최근에는 스위스연방 외무부 경제·인권 본부장인 레미 프리드만이 스위스 정부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인권 종주국'이라는 스위스의 이미지로 덕을 보고 있는 스위스 기업들이 그 이미지를 위태롭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그는 "인간의 안전과 투자의 안전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양쪽의 움직임이 상호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위스 기업들이 깨달아야 한다"고 덧붙였다.(12)

피에트 OECD 부패방지 위원장은 스위스가 자국의 은행 부문 때문에 입은 이미지 손상을 원자재 중개 부문을 통해 또다시 겪을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규제를 강화하려는 당국의 소극적인 몸짓 앞에서 트레이딩 업체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기세다. 일부 업체들은 싱가포르나 두바이처럼 기업 활동에 더 유리한 곳으로 이전하겠다며 진작부터 으름장을 놓았다. 더욱이 이 기업들은 조직이 비교적 단순해 더 나은 조세·규제 조건을 제공하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 신속하게 짐을 싸서 터전을 옮길 수 있다는 점이 은행과는 다르다.

 

/ 마르크 게니아 Marc Guéniat 스위스 거주 언론인.

번역 / 최서연 qqndebien@naver.com

(1) www.gtsa.ch.
(2) Philippe Revelli, ‘브라질 거인 광산업체의 지구를 파헤칠 권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0월호 참조.
(3) 스위스 라디오·텔레비전(RTS) 프로그램 <미조푸앵>, 2012년 4월 29일.
(4) <스위스 트레이딩 SA: 스위스, 무역 그리고 원자재의 저주>, Editions d’En bas-Déclaration de Berne, Lausanne, 2011.
(5) <로이터통신>, 2011년 11월 21일.
(6) 장밥티스트 갈로팽, ‘분리독립 남북 수단, 쓰디쓴 내부 분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6월호.
(7) <로이터통신>, 2012년 4월 24일.
(8) Jean-Christophe Servant, ‘죽음으로 내몰리는 잠비아의 광부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5월호 참조.
(9) www.amisdelaterre.org에서 감사보고서 열람 가능.
(10) www.droitsansfrontieres.ch.
(11) 사회당 의원 힐데가르트 패슬레르 오스테르발데르의 청원에 대한 스위스 연방 평의회의 2011년 12월 9일자 답변. www.parlament.ch.
(12) 제네바대학 2012년 4월 27일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