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파리 한복판에서 극우 폭력조직이 “파리는 나치다”라고 외치며 행진하고, 좌파 활동가들을 칼로 찌르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파시즘’이라고 불릴 만하다는 것이 꽤 명확해졌다고 봐야 한다.
그렇지만,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아직 그리 분명하지 않다. 사건을 통해 떠올려지는 역사적 장면들은 이제 더 이상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바로 그게 비극이다. 이렇게까지 누구나 단번에 알아볼 만큼 선명하게 드러나야만 비로소 ‘파시즘’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현실 말이다.
아마 공공건물 정면에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나치당의 상징)가 걸려야만, 그제야 전문가들은 ‘탈선한 파시즘의 위험’이라는 표현을 애매모호하게 쓸지도 모른다. 현재는 그나마 정치적 취기가 잔뜩 오른 날에나 ‘비자유주의적’이라는 말 정도를 간신히 끄집어내는 수준이다.
사실, 어떤 이들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협력과 강제 연행(1940년 독일에 점령당한 뒤, 프랑스는 남부에 ‘비시 정부’를 세워 나치와 협력하여 레지스탕스들과 유대인들을 독일군에 넘김—역주)에 대해 그 어떤 형태의 ‘프랑스식 파시즘’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끝끝내 부정하고 있다.
파시즘이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그 ‘정치적 속내’
장애물 회피, 즉, 파시즘이라는 말을 끝내 회피하는 태도는 불행히도 부르주아 언론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겉으로는 역사적 정확성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훨씬 더 숨기고 싶은 정치적 계산 때문에, 비판적 좌파 진영의 많은 이들조차 ‘파시즘’이라는 말을 쉽게 꺼내려 하지 않는다.
‘파시즘 공포’에 휩싸이는 건 좋은 상황이 아니며, 그런 공포는 선거에서의 무분별한 쏠림과 아무렇게나 짜맞춘 공화국 전선(反파시즘 연대)으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대중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속내다.
그럼 ‘역사적 정확성’이라는 이들의 요구는 명목상 무엇인가. 이들은 폴란차스(그리스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역주), 마르크스, 그람시(이탈리아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역주) 같은 이론가들의 권위 뒤에 숨어버린다. 그래서 차라리 ‘권위주의 국가’, ‘보나파르트주의’, ‘카이사르주의’ 같은 표현은 써도, ‘파시즘’이라는 단어만큼은 끝끝내 입에 올리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권위주의 국가가 일정 수준을 넘어 인종주의적 요소와 결합될 때, 이는 ‘보나파르트주의’나 ‘카이사르주의’를 벗어나게 된다. 사실,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인종적 요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구조다.(1) 원시적 축적 과정에서 벌어진 약탈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식민지 출신과 노예제 후손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국가는 언제나 인종 차별적 성격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경우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일정한 임계점을 넘는 순간, 질적으로 다른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를테면, 국가 차원의 구조적 인종주의가 ‘추방’이라는 체계적 형태로 구체화하기 시작할 때가 바로 그 전환점이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서는 이제 이런 흐름이 대놓고 드러나고 있으며, 르펜-르타이요(르펜은 극우 RN(국민연합)의 대표이며, 르타이요는 제1야당인 공화당의 상원 원내대표—역주) 시대의 프랑스에서도 머지않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트럼프의 미국이든 르펜의 프랑스든, 두 경우 모두 강제 추방을 상징하는 ‘전세기’와 극우의 폭력적 탄압을 상징하는 ‘전기톱’의 동맹은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프랑스 사회당(PS)은 못 본 척하고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조지 오웰이 경고했던, ‘중절모에 우산을 든 파시즘’
사실, 이렇게 눈에 빤히 보이는 변화조차 그들의 거부감을 무너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유니폼, 완장, 깃발 같은 온갖 상징적인 파시즘 장식들이 거리에서 다시 선명하게 보이기 전까지는 말이다(물론, 이미 슬슬 보이기 시작했지만). 역사에 기록되어 있고, 이미 익숙해진 외형적 상징들에만 집착하는 태도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는 같은 본질을 알아보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트럼프주의의 ‘부동산 버전’ 같은 변종은 예측하지 못했지만, 저명한 작가 조지 오웰은 이런 식의 변종 파시즘이 다시 나타날 위험에 대해 이미 경고한 바 있다. ‘중절모에 우산을 든 파시즘’ 말이다. 혹은, ‘MAGA’ 빨간 모자를 쓴 파시즘도 마찬가지다. 이게 핵심이다.
하지만 그 경고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결과 파시즘은 여전히 단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여겨져, 오늘날의 정치 현실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개념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의 이미지에만 매달리는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다.
‘개념’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적용될 수 있으며,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파시즘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 속에 갇혀, 오늘날의 현실과는 연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정의만으로 원인이나 해결책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태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일 자체가 원인을 밝히고 대책을 마련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단순히 이름을 붙이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다.
움베르토 에코를 넘어서 – 파시즘을 새롭게 정의해야
보통 이런 상황에서, 작가 움베르토 에코가 제시한 ‘파시즘을 알아보는 14가지 신호’(2)를 소환하는 경우가 많다. 그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지만, 14가지 기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들은 개념이나 정의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묘사일 뿐이다. 게다가, 이는 역사상 처음 등장한 파시즘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데칼코마니에 가깝다.
하지만, 최초의 그 사례가 똑같이 반복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결국, 이런 방식으로는 새로운 형태로 출현하는 파시즘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개념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도해야 한다. 그 시도의 출발점은 다음과 같다. 파시즘은 다음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
1) 권위주의 국가
한편으로, 국가는 교육, 연구, 문화, 언론 등 사상생산 영역 전반을 제도적으로 통제하며 ‘규범화’하는 데 집중한다. 미국 공공기관에서 진행되는, 진보적 가치를 겨냥한 ‘안티-워크(anti-woke)’ 숙청은 아마도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폭력 기구가 더욱 강화되어 경찰과 사법부가 국가의 이념적 방향에 철저히 충성하는 구조로 재편된다. 필요할 경우, 군대마저 경찰 기능의 연장선에서 동원 가능한 도구로 자리 잡는다. 여기에 공식적 폭력 기구뿐 아니라, 비공식적 폭력 집단들도 결합한다. 국가와 느슨하게 연결된 위성 조직들, 거리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준군사조직들, 그리고 이들을 선동하며 여론을 형성하는 온라인상의 디지털 폭력 집단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엮이며, 결국 정치적 폭력에 대한 모든 규범과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치적 암살의 등장은 파시즘을 가리키는 ‘신호’ 중 하나로 거의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날이 머지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결국, 파시즘 체제 아래에서 정치적 폭력에 관해 유일하게 확실한 원칙은 단 하나다. 언제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2) 피지배층을 부추겨 그릇된 분풀이를 유도
쉽게 말해, 사회경제적 질서 속에서 실제로 고통받고, 상징적으로 멸시당하는 대다수의 피지배층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배층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보다 더 약하고 취약한 이들에게 분풀이하도록 유도되는 것이다. 그렇게 희생양이 되는 ‘더 아래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더럽고 불결한 존재’로 규정된 특정 집단이며, 그 역할을 맡도록 의도적으로 설정된다.
3) 정당화되는 ‘실존적 위협’의 담론
‘파시즘 부활의 징후’나 ‘신호’가 궁금한가? 요즘 넘쳐나는 ‘실존적 위협’이라는 말 자체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신호다. 이 표현은 파시즘 특유의 편집증적 사고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폭력을 정당화하는 열쇠 역할을 한다.
일단 ‘실존적 위협’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그것은 곧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되며, 이런 생존 위기 상황에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예를 들어, 난민선에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도, ‘거대한 대체’(The Grand Replacement, 이민자들이 서구 사회를 대체할 수 없다는 백인 우월주의적 주장—역주)의 위협이 우리 존재 자체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명분 아래 얼마든지 정당화된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고, 살아남은 이들을 강제로 내쫓는 것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실존적 위협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국내 문제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외부의 적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면, 러시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 모든 퍼즐 조각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정치권과 언론을 포함한 프랑스 지배계급은 이미 반아랍 인종주의를 새로운 핵심 가치로 삼았다. ‘벤라자르 사건’에서 ‘베타랑 사건’, 그리고 ‘아베로에스 고등학교’ 논란에 이르기까지, 최근 사건들은 이전부터 이어진 반아랍 정서의 흐름을 명백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프랑스의 모든 우파는 이미 하나로 뭉쳐, 극우적 이념 블록을 형성했고, 여기에 마크롱주의 역시 예외 없이 포함된다. 지난 8년 동안 마크롱주의는 이 흐름의 기반을 다지는 데 충실히 기여해왔다.
이제 주류 언론의 관심사는 단 하나, 좌파를 막는 일이다. 프랑스에서는 진보 정당인 불복하는 프랑스(LFI)가 반유대주의로 몰리고, 우파 정당인 국민연합(RN)은 공화주의 세력으로 인정받는다. 미국에서는, 트럼프보다 조금이라도 왼쪽에 있는 건 모두 ‘공산주의’로 취급된다.
그곳에서 대통령이 나치 스타일의 경례를 해도, 평론가들은 그저 약간 서툰 제스처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심지어 역사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도, 보지 않는 선택은 여전히 가능하다. 한편, 공영 라디오는 ‘가자지구 리비에라 개발 프로젝트’라는 황당한 발상을 진지하게 검토 중이다. 모든 과정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 중이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1962년 출생, 프랑스의 대표적인 진보 경제학자이자 철학자. 현재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에서 연구 이사로 재직 중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마르크스 이론에 접목 ‘정념의 구조주의’라는 사회과학 이론을 구축했고,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의 욕망과 예속의 관계를 분석한 『자본주의와 자발적 예속』이 2024년 국내에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