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유혹에 빠진 한국적 니힐리즘을 치유하려면…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1)
프리드리히 니체가 1882년, 무기력한 삶의 현실 속에서 서구 최고 가치로서의 신의 죽음을 선언해 독일 니힐리즘의 비극적 종착인 파시즘을 예고했다면, 한국의 전광훈 목사가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느님 까불면 죽어”(2)라고 외친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경박성과 자만심으로 가득한 한국적 파시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우리 말 허무주의로도 해석되는 니힐리즘은 라틴어 ‘nihil’(無)에서 유래된 탓에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온 생활상의 가치, 즉 이상이나 도덕규범이나 문화, 생활양식 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의미를 가졌으나, 독일 나치의 학살을 피해 미국에 망명한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는 1941년 『독일 니힐리즘(German Hihilism)』이란 글에서 “보편적 가치의 기반이 무너지면, 니힐리즘이 그 공허함을 파고들며, 파시즘의 유혹에 빠진다”라고 지적했다.(3)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제국이 붕괴하고, 자유주의적 민주 공화국인 바이마르 체제가 수립되었지만, 이는 보편적 가치의 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탄생한 취약한 체제였다. 기존의 귀족적인 가치, 독일 민족주의, 군부 권위는 해체됐고, 새로운 가치체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사회적 정당성을 얻지 못했다.
그 결과, 바이마르 공화국은 가치 공백과 정당성 위기 속에서, 극우적 국가주의와 극좌적 혁명 세력이 극단적 대립을 벌였고, 바로 이 틈에서 나치즘이 급부상했다. 스트라우스적 시각에서는, 이 과정은 니힐리즘적 공허함이 파시즘적 신화로 대체되는 전형적 흐름이다.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 짓는 네오콘(미국의 신보수주의)의 사상적 스승으로 알려진 스트라우스는 현대 사회가 자연법을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이 무엇을 ‘옳다’고 말할 보편적 기준을 상실했다고 진단했다. 그 결과, 현대 사회는 모든 가치가 동등하고, 어떤 가치도 절대적으로 우월하지 않다는 가치 상대주의에 빠졌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무너지고, 결국 힘을 가진 집단이 자기 입장을 강제로 밀어붙이는 방식, 즉 ‘힘=정의’라는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독일 나치즘과 소련 전체주의는 권력이 지식인과 학생, 일반 시민에 널리 퍼진 니힐리즘을 파고든 구체적 사례다.
반면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미래학자인 에마뉴엘 토드는 최근작 『서구의 패배(La défaite de l’Occident)』 (갈리마르, 2024)에서 미국의 반(反)프로테스탄티즘과 신자유주의가 니힐리즘을 부채질했고, 정당성 없는 호전적 전쟁에서 출구를 찾는다고 주장했다.(4)
“서구는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의 사회가 아니며, 리버럴 올리가쉬(Liberal oligarchy, 자유주의적 과두정치)다. (기독교 사회를 표방하면서도 신성 모독이 자행되고, 물신주의에 빠진)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소멸이 서구의 붕괴를 가져왔다.”
두 철학자의 지적대로라면, 한국의 극우 보수파가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를 함께 흔드는 행위는 나치 파시즘을 탄생시킨 독일 니힐리즘의 전형을 연상시키면서도, 동시에 극우 시위를 주도하는 기독교 목사의 ‘신성모독’ 자행이 미국 등 서구 사회적 니힐리즘을 내포한다. 스트라우스라면, 광화문 거리를 꽉 채운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의 물결에 대해 “가치 공백을 신화적 종교성으로 덮는 니힐리즘적 증상”이라고 진단할 것이고, 토드라면 시위 현장에서 헌금을 거두고, 다단계 회원을 모집하고, 물건을 파는데 ‘진심’인 목사들에 대해 물신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소멸을 지적할 것이다.
특히 스트라우스는 보편적 자연법의 해체를 니힐리즘 확산의 근본 원인으로 본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사라지고, 역사적·문화적 상대주의가 지배하게 되면, 가치 부재의 니힐리즘이 확산하고, 이를 틈 타서 강한 자가 자신의 신화를 절대적 진리로 강요하는 파시즘적 질서가 등장한다.
해결책으로, 그는 고전적 자연법으로의 회귀, 즉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 보편 정의의 회복을 주장하지만,(5)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하며, 니힐리즘적 혼돈 속에서 파시즘적 충동은 쉽게 꿈틀거린다. 한국 극우 보수 세력은 반공·반북·국가 구원 서사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바로 이 스트라우스적 니힐리즘-파시즘 경로를 그대로 밟고 있다.
소외와 인간성 파괴가 파시즘으로 이어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에서 근대적 소외와 인간성 파괴가 어떻게 전체주의적 파시즘으로 이어지는지를 분석했다. 특히, 고립된 개인들이 사회적 관계를 상실하고, 거대한 이념과 국가 기구에 완전히 종속될 때 전체주의적 파시즘이 작동한다고 보았다.(6) 그녀는 인간성의 파괴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파시즘이 개인의 도덕적 사고 자체를 봉쇄하고, 오직 체제의 명령에 맹종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분석했다.
한국적 파시즘에서 자신들만 뺀 모두를 지워야 할 불순분자로 간주하는 ‘검찰 공화국’ 수호자들과 전광훈 세력의 극우 운동은 국가와 민족의 구원 서사 속에서 개개인의 윤리적 성찰을 차단하고, 극우적 신념 체계에 절대적으로 복무하는 집단적 심성을 만들고 있다.
아도르노는 파시즘의 대중적 기반을 분석하며, ‘권위적 성격(Authoritarian Personality)’ 이론을 제시했다. 권위적 성격은 강한 권위에 복종하고,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경멸하는 심리 구조를 말한다.(7) 그는 불안한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불안을 권위적 체제에 투사하고, 그 체제를 강화하는 데 스스로 가담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했다.
한국의 극우적 엘리트·예비역·보수층이 윤석열 검찰 공화국의 권위주의와 전광훈식 극우 종교운동에 스스로 동원되는 것은 아도르노의 분석과 맞아떨어진다. 니힐리즘적 불안이 강한 권위에 대한 복종 심리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파시즘적 흐름은 바로 니힐리즘의 산물이다.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가치의 공백을 힘과 집단적 열광으로 메우려는 운동이다. 스트라우스적 관점에서 보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자연법적 질서(정의, 자유, 인권)가 붕괴한 자리에서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민족, 국가, 혈통, 이념 같은 집단적 신화를 만들어낸다.
이 신화는 논리적·이성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지만, 집단적 열광과 강압적 동원을 통해 마치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포장된다. 니힐리즘 상태에서 흔히 나타나는 “우리만 옳다”라는 식의 집단 광기가 바로 파시즘이다. 가치의 부재, 즉 니힐리즘이 극단적 집단주의, 즉 파시즘으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을 스트라우스는 꿰뚫어 본 것이다.
대중 선동과 파시즘적 대립 구도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니힐리즘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이성적 대화와 합의를 통해 공통 가치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각 집단은 자신들의 ‘가치’를 절대화하고, 반대편 가치를 ‘절멸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현상은 뚜렷하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조정하는 민주적 절차 대신, ‘적폐 청산’ 같은 전쟁 언어가 일상화된다.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완전한 배제와 침묵 강요를 시도한다. 대중은 논리에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집단적 열광으로 동원된다. 스트라우스적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현상은 니힐리즘적 가치 공백에서 비롯된 파시즘적 충동이다.
니힐리즘의 공허함을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다음 두 갈림길에 서게 된다. 절대적 권위를 가진 새로운 신화(국가, 민족, 정당, 이념)를 만들고, 모두가 그 신화에 무조건 충성하도록 강요하는 파시즘적 정치로 흐르거나, 서로 다른 가치들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민주적 절차와 이성적 토론을 통해 최소한의 공통 규범을 모색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스트라우스는 고전적 자연법을 통해 보편적 기준을 회복하는 길을 제시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철저한 민주적 갈등 조정 시스템과 열린 토론 문화의 회복일 것이다. 스트라우스의 니힐리즘 진단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적 기류가 왜 등장했고,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경고는 단순히 과거의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금 당장 직면한 현실적 위기와 직결되어 있다.
특히, 촛불혁명 이후 권위주의적 질서가 무너지고, 기존 국가주의적 가치체계와 냉전적 반공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보편적 동의를 얻지 못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가치의 공백, 정당성 위기, 서로 다른 가치들 사이의 격렬한 충돌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보수 진영은 이러한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들의 몰락을 국가적 위기, 문명의 위기로 과장하며, 강력한 국가 권력과 신성화된 상징(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기)을 동원해 보수적 가치의 신성화와 극우적 구원 서사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이 바로 스트라우스적 의미에서의 니힐리즘이 파시즘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검찰 공화국’의 계엄령 선포는 자유롭고 다양한 가치들이 충돌하는 민주적 공간을 관리하고 조율할 능력을 상실한 국가 권력이 강제적 질서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물리적 폭력과 군사적 통제로 상황을 ‘정리’하려는 시도였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자연법적 질서(보편적 정의와 윤리)가 붕괴하고,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정당성마저 무너지면, 결국 국가 권력은 힘 그 자체를 정당성의 원천으로 삼는다.
전광훈 목사를 중심으로 한 극우 개신교 세력은 자신들을 단순한 보수 정치 세력이 아니라 한국과 세계를 구원할 ‘신적 사명’을 부여받은 구원자 집단으로 규정한다. 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를 동시에 흔들며, 대한민국-미국-이스라엘을 ‘성스러운 동맹’으로 포장하고, 그 외의 모든 가치는 ‘반국가’, ‘반신적(反神的)’이라는 논리로 몰아간다. 이 역시 스트라우스적 니힐리즘 분석에서 설명할 수 있다.
보편적 가치체계가 붕괴한 사회에서는 특정 정치 세력이 스스로를 유일한 정당성의 수호자로 포장하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화를 신성화함으로써 공허해진 가치의 자리를 신성한 이데올로기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들이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를 흔드는 행위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하늘의 권위’를 부여해 더 이상 논박 불가능한 절대적 가치로 만드는 의례적 행위다. 이는 민주적 토론과 합의의 공간을 봉쇄하고, 신성화된 가치 아래 모든 반대자를 이단(적폐)으로 몰아 제거하는 정치 종교화, 극우적 파시즘의 전형이다.
한국 극우 세력이 태극기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성조기와 이스라엘기까지 동시에 흔드는 것은 자신들의 운동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전 지구적 성스러움이라는 허구적 장막을 씌우기 위한 시도로 이해된다. 이는 논리적 정당성의 결핍을 이미 신성화된 외부 상징을 끌어와 메우려는 니힐리즘적 공허 채우기 전략이다.
한국적 파시즘과 니힐리즘적 귀결
한국 사회는 지금 경계 위에 서 있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자연법적 질서와 보편적 가치체계가 붕괴한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창조해야 하는 공허한 상태에 놓인다고 보았다. 이는 특히 국가적·군사적 권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명예를 유지한 집단일수록 더 큰 불안과 혼란을 느끼게 만든다. 과거 반공주의, 국가주의, 산업화 신화에 기반해 자신의 역할을 정당화했던 군 엘리트·예비역 세력은 민주화 이후 기존 국가주의적 가치체계가 해체되고, 젊은 세대와 시민사회가 국가 폭력, 군부 권위주의, 보수 엘리트 기득권을 비판하자, 자신들이 과거에 믿어왔던 가치와 정체성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 중심의 가치체계로의 전환은 이들이 자신을 정의해온 프레임을 약화했다. 여기에 병영문화 개혁, 군사권력 축소, 남북화해 기류 등이 이어지면서 자신들의 상징적·실질적 권위가 빠르게 소멸하는 위기감을 느낀다.
이들이 전광훈식 극우 운동과 ‘검찰 공화국’의 권위주의적 통치 행위에 동참하는 것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와 특권을 회복하려는 퇴행적 시도이자, 니힐리즘적 불안을 극우적 구원 서사로 메우려는 집단적 자기 정당화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민주화 이후, 시민적 가치, 보편적 인권, 사회적 다양성이 강조되면서, 군의 역할은 제한되고, 군 내부 권위주의적 문화도 비판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군 엘리트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한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경험한다. 이들은 자연법적 정당성이 사라진 자리에 오로지 ‘힘=정의’라는 논리로 돌아가고 싶어 하며, 이는 파시즘적 권위주의 질서와 쉽게 결합한다.
대립과 갈등을 치유할 사유의 복원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붕괴 직전이다. 그러나 그 붕괴는 거대한 폭발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서서히 퍼지는 침묵과 냉소로 우리를 갉아먹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선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은 생각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라고 말했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들. 믿고 따를 신화만 있으면 되는 인간들. 오직 누군가의 입에서 떨어지는 절대적 명령을 기다린다. 그것이 국가의 이름이든, 신의 이름이든, 지도자의 이름이든 상관없다. 스스로 진리를 찾는 일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사유의 죽음’을 방치해왔다. 이념은 타인의 손에 맡겨졌고, 사유는 정치적 수사로 변질되었다. 극우는 ‘반공’과 ‘애국’을 신성화했고, 진보는 ‘촛불’과 ‘적폐청산’을 신성화했다. 보수와 진보 모두 스스로를 성역화했고, 서로를 절멸시켜야 할 악으로 규정했다. 철학은 사라지고, 광장에는 두 개의 신정국가가 서로의 목을 조르고 있다.
아도르노는 파시즘을 낳은 근원적 조건을 ‘권위적 성격’에서 찾았다. 불안한 개인들이 강한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불안을 덜어내고, 자신보다 약한 자를 증오하고 학살하는 구조. 한국적 파시즘도 다르지 않다.
반공이라는 국가적 공포, 종북이라는 신화적 악마, 촛불과 태극기의 끝없는 대립. 니힐리즘과 파시즘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불안과 공포를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우리를 보호할 거라는 착각, 종교가 모든 답을 줄 거라는 환상, ‘우리만 옳다’는 집단적 광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정치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기술이다.” 정치는 적을 죽이는 기술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정치이다. 서로의 역사, 서로의 상처, 서로의 두려움, 서로의 진실을 외면하는 한, 우리는 끝없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국적 니힐리즘과 파시즘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잃어버린 사유의 복원이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1)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지식』(Die frohlich Wissenschaft, 1882)의 108장, 125장, 343장에서 반복되어 언급된다. 이 글은 『신은 죽었다』(스타북스, 2011)에 실려있다.
(2) 전광훈 2019년 10월 3일 발언. 성일권, 「두 교황, 광화문 목사들에게 강추하고 싶은 영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 온라인판 2020년 1월 12일.
(3) Leo Strauss(1899~1973)는 미국에 망명한 독일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로서 신보수주의(네오콘)의 사상적 스승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입양 딸인 제니 스트라우스 클레어는 네오콘들이 제멋대로 부친의 철학을 오독했다고 비난했다. 그녀는 2003년 7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언론은 내 아버지 스트라우스가 마치 미국의 외교정책을 조종하는 네오콘들의 배후 주모자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나는 그들에서 스트라우스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4) 성일권, 「나치즘의 유혹에 빠진 서구의 니힐리즘 사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24년 3월호.
(5) 성일권, 「네오콘 이념, ‘선과 악’의 단순 흑백논리」,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고즈윈. 2007).
(6)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한길사, 2006/1951).
(7) 아도르노는 미국 망명시절 미국의 연구자들과 함께 『권위주의적 성격 연구』를 공동 집필했다. 그는 권위주의적인 성격과 파시즘의 상관관계를 집중분석해, 권위주의적 성격이 파시즘을 강화하는 사회심리학적 토대임을 밝혀냈다. 그에 따르면 권위주의적 성격은 정치적, 경제적 기준들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과 무기력에 대한 사유의 경직성과 무반응, 관습주의, 동조습성, 자기 신념의 결여, 그리고 경험능력의 전적인 결여 등과 같은 특성들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