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그림자를 걷어낼 때다

2025-03-28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대한민국은 지금 극단적 분열 속에서 파시즘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서울에서부터 부산, 대구, 광주에 이르기까지 분노와 적대감의 파도가 휩쓸고 있다. 공정과 정의의 수호자라는 검찰과 법원은 이미 권력 카르텔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법조문은 마치 엿가락처럼 권력의 필요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하며, 정의는 골목 장터의 상품으로 전락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진리와 지식의 전당이라는 교회와 대학, 그리고 지식인들이 오히려 혼란을 부채질하며 대중을 현혹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란 수괴를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할 역사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에 물든 세력은 그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라는 찬사와 함께 “반국가세력 분쇄”라는 냉전의 유령을 소환한다. 극우 정치인과 종교 세력은 과거 정치적 반대 세력을 ‘친북·종북세력’으로 몰아붙이던 낡은 전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중국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적을 창조했다. 숭미-친일의 시각에서 중국을 적대시하며 대통령 탄핵 국면을 ‘중국 공산당의 공작’으로 왜곡하는 음모론이 난무하고 있다.

과연 우리 사회에 중국 공산당의 공안과 요원들이 그토록 많은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검찰과 경찰은 그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더욱 위험한 것은 이러한 음모론을 극우 목사와 보수 정치인 등, 우리 사회의 소위 ‘확성기’들이 부추기고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21세기 초강대국들의 패권 경쟁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70~80년 전 낡은 이념의 족쇄에 묶여 있다. 이러한 광기 어린 대립 속에서 파시즘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파시즘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편 가르기를 통해 복잡한 현실을 왜곡하고, 사회적 불안을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배제로 치환한다. 파시즘은 결코 우연히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불안과 분열이 극에 달했을 때, 마치 병든 육체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듯 우리 사회의 균열 속으로 파고든다는 점을 역사는 분명히 보여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분열상은 파시즘이 확산하며 각국에 전체주의 체제를 가져온 1930년대 유럽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파시즘적 흐름에 굴복하느냐, 당당히 맞서느냐의 갈림길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전국 곳곳에서 파시즘적 극우세력이 망가뜨린 민주공화국의 불씨를 되살리려 뜨겁게 행진하는 거리의 전사들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지정학적 소용돌이 속의 자기 고립

트럼프의 미국과 시진핑의 중국이 신냉전 구도를 형성하며 세계를 양분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지정학적 십자로에 서 있다. 무역 전쟁과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내부적 분열은 국가 생존의 심각한 위협 요소가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국제 질서의 격변보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쿠데타의 트라우마, 분단의 상흔이 여전히 우리의 현재를 지배한다.

세계는 기후 위기와 인공지능 혁명이라는 문명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냉전의 유물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유령과 싸운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 경제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국제신용도의 급락으로 인해 환율은 오를 대로 올랐고, 수많은 자영업자는 폐업하며 자취를 감추었고, 실직자 수는 매일 기록을 깨며 급증하고 있다. 

 

종교적 광신과 리더십의 실종

위기의 시대일수록 균형 잡힌, 통합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정치 지도자들은 극우 종교세력의 인질이 되어 합리적 판단력을 상실했다. 이념적 광기가 종교적 열정과 결합하면서 그 파괴력은 극대화되고 있다.

‘신의 뜻’이라는 초월적 가치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할 때, 대화와 타협의 여지는 사라진다. 오직 ‘신의 편’과 ‘악마의 편’이라는 이분법만이 남게 된다.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양성과 관용, 그리고 비판적 이성의 가치를 송두리째 훼손한다. 근대 계몽주의의 성과가 종교적 광신에 의해 부정되는 역설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가장 심각한 위기는 세대 간 소통의 단절이다.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의 등대가 되기는커녕 낡은 이념의 짐을 그들에게 지우고 있다. 청년 세대는 이미 취업난, 주거 불안, 기후 위기 등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 이념적 갈등까지 더해져 사회적 연대는 파괴되고 있다.

파시즘은 이런 불안과 분노를 교묘히 악용한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 “적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자”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수사는 불안한 대중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특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극단적 메시지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매혹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비판적 이성과 연대의 회복이 절실한 이유

갈등 공화국이 파시즘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비판적 이성과 대화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이념적 적대감을 넘어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성적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정치는 적과 동지의 전쟁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집단지성의 작동 방식이 되어야 한다.

둘째,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파시즘은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배제가 만연한 토양에서 자란다. 청년실업, 주거 불안, 양극화 등 시스템의 모순에 대한 과감한 개혁 없이 사회통합은 불가능하다.

셋째, 미디어와 시민사회의 책임 있는 역할이 절실하다. 클릭을 위한 선정적 보도와 극단적 발언이 아닌, 사실에 기반한 정보와 건설적 비판이 필요하다. 미디어는 갈등을 증폭시키는 확성기가 아니라 사회적 대화의 매개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 교육의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가 이분법적 사고의 함정에서 벗어나 복잡한 현실을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비판적 사고력을 함양해야 한다. 교육은 기존 질서의 재생산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탐색이 되어야 한다.

갈등 공화국이 파시즘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역사가 경고하고 있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 아시아의 군부독재 경험은 민주주의가 단순한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시민의 비판적 각성과 연대의 정신으로 지켜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식민지와 전쟁, 독재의 어둠을 뚫고 경제발전과 민주화, 여기에 K-문화강국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은 세계사적 기적을 이룩했다. 그 성취를 파시즘적 퇴행으로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갈등 공화국’의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고 새로운 사회계약을 모색해야 한다.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결단과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4월호는 트럼프 등장 이후 극우 정치와 경제전쟁으로 치닫는 국제 관계를 조망하고, 우리 사회의 심각한 현안으로 부각한 파시즘의 흐름을 특집으로 마련했다. 독자 여러분과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