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센트리즘(기괴주의), 레닌주의에서 버스터 키튼까지
러시아 혁명 초기의 소련 아방가르드 예술그룹은 프롤레타리아 해방이라는 구상에 부합할 만한 예술 양식을 모색했다. 그중 몇몇은 미국 무성영화 거장들의 작품을 높이 샀고 그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구하기도 했다.
버스터 키튼은 1924년 중편 영화 <셜록 주니어 Sherlock Jr.>에서 영사기사 겸 안내인으로 일하는 무일푼 청년을 연기했다. 극 초반에 그는 영화관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더미 속에서 1달러 지폐 몇 장을 줍지만, 이내 관객들이 돌아와 돈을 되찾아간다. 그의 꿈은 자신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여인의 마음을 사고 형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꿈은 모두 수포가 되고 만다. 키튼은 <마음과 진주 Hearts and Pearls>라는 사뭇 의미심장한 제목의 통속극을 틀어둔 채로 깜빡 잠이 든다. 마침 스크린에 투사된 제작사 이름도 수면 유도제의 이름을 딴 '베로날 영화사(Veronal films Co.)'다. <마음과 진주>는 튜더 건축양식을 따라 지은 저택 세트를 배경으로 전개되는데, 영화 주인공들은 어느덧 키튼이 사모하는 여인과 그의 경쟁자의 모습으로 바뀐다. 그 모습을 본 키튼은 몹시 괴로워하면서 영화 속으로 뛰어들지만 금세 스크린 밖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다시 한번 키튼이 영화 속으로 들어가자, 경계를 초월해 영화에 침범한 그를 혼쭐내려는 듯 위협적인 몽타주 기법이 이어진다.
키튼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지만, 시시각각 영화의 배경이 도로 한가운데에서 벼랑 끝으로, 그리고 다시 사자 소굴로 변화한다. 이 장면은 전율 넘치는 영화적 트릭이 등장해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뿐 아니라 컷과 몽타주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통속극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키튼 주연의 탐정물로 돌변한다. 키튼은 일련의 기계적 장치의 도움을 받아 테일러리즘에 버금가는 정확한 타이밍을 선보이고, 사실상 거의 모든 종류의 육상 교통수단을 활용해 각종 고비를 넘긴다. 끊어진 교량을 코앞에 둔 순간에 발밑으로 트럭 두 대가 교차해 지나가는 덕에 키튼이 무사히 이 고비를 넘기는 식이다.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러시아의 주요 감독이자 연극 이론가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Vsevolod Medyerhoild)‒가 지적한 것처럼, 키튼은 매번 정확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기계와 특수효과를 전면에 부각한다. 이렇게 배우의 고난도 동작에 빨리 감기와 되감기 효과가 더해진 영화의 특수효과 메커니즘은 단순하면서도 교묘하다.
키튼이 극중 영화와 꿈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사모하는 여인을 만나는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영화와 현실 세계 사이의 간극을 엿볼 수 있다. 키튼은 스크린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영화 속 연인들의 연기를 그대로 따라 하는데, 화면이 검은색으로 암전되면서 드러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끝까지 웃음을 자아낸다. 통속극 속 남녀 주인공은 어린 자녀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이를 지켜보던 키튼은 순간 어쩔 바를 모르는 모습으로 영화가 막을 내린다. 셜록 주니어는 희망, 교육, 이념을 한데 아우르는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모호하게 제시하면서 다른 영화 장르에 반하는 풍자를 연이어 늘어놓는 등 현대 영화에 어울릴 법한 여러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특별한 묘기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적 기법을 접목하는 방식 역시 소련 아방가르드 희극의 핵심 법칙에 부합한다. 인공의 산물인 기계 장치가 대립적인 요소로 배치돼 긴장을 이루고, 인체의 묘기가 가미돼 병치와 대조라는 모순을 보여준다.
키튼의 작품과 소련 구성주의‒현대성을 강조하고, 예술과 공학의 거리를 좁히고,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탄생시킨 20세기 초의 예술사조‒의 또 다른 공통점은 기술에 대한 집념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를 활용해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기계가 주는 재미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키튼은 영화 <전함 포템킨>으로 명성을 드높였던 구 소련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감독처럼 토목 공학에 일가견을 보였다. 그런 면모는 키튼의 초기 단편 영화 두 편에서 잘 드러난다. 그중 하나는 조립식 주택을 풍자한 영화 <일주일 One Week>(1920)이고, 두번째는 <일렉트릭 하우스 The Electric House>(1922)다.
<일렉트릭 하우스>에서는 식물학을 전공한 키튼이 착오로 전기공학 학위증을 받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학위증을 받은 그는 즉석에서 젊고 어여쁜 딸을 둔 남자에게 고용돼 본의 아니게 집 전체의 배선 공사를 맡는다. 에디슨의 발명이 널리 상용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 키튼이 맡은 배선 작업은 전구와 플러그를 설치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러시아 미래주의와 전기에 대한 낭만을 공유하는 측면이 있다(한 가지 예로 레닌이 "공산주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전기를 더한 것과 같다"라고 했던 평등주의 약속을 들 수 있다).
키튼은 일상생활과 직결된 집의 모든 부분을 전기 장치로 연결한다. 전기 레일을 타고 음식이 나오도록 설계된 시스템 덕에 기계가 식사를 가져다주고, 의자가 저절로 뒤로 물러나며, 찬장에도 물건을 꺼내고 보관하는 레일 시스템이 장착돼 있다. 학위증이 뒤바뀐 진짜 전기공학자는 발전실에 숨어서 기계 장치가 가족들을 위협하도록 배선을 조정하고, 결국 키튼까지 위험에 빠져 하수도 배관을 타고 집을 빠져나오게 된다. 누가 봐도 유복한 이 가정의 편의를 향상하는 데 공학과 전기가 사용됐지만, 사실 공학과 전기의 잠재력은 불가능할 듯한 기술을 창출해내고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능력에 있다.
러시아 작가 시클롭스키가 분석한 채플린과 로이드
한편, 미국의 영화감독 겸 배우였던 해럴드 로이드는 무성영화 3대 거장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런 그의 영화에 혁신을 가져온 요인은 다름 아닌 2차 산업 혁명 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공간의 활용이다. 1926년, 빅토르 시클롭스키‒작가, 시론 학자 빅토르 쉬클로프스키(Viktor Shklovsky, 1893-1984)‒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선전문에 찰리 채플린과 로이드의 특징을 대조해 소개하면서, 로이드는 자신을 영국 출신 배우 겸 감독인 채플린과 차별화하려고 새로운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했다고 설명했다.
채플린은 불운한 노동자의 이미지를 구현했다. 반면 해럴드 로이드는 완전히 다른 마스크를 택했다. 영화에서 로이드는 옷을 말끔히 차려입고 안경을 쓴 젊은이의 모습으로 분했다. 그 안경 덕분에 로이드는 채플린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미남 주인공의 외견을 갖춘 희극 배우라는 찬사를 얻었으며, 그 이전까지 희극 등장인물에 부여했던 통상적인 특징 같은 낡은 틀을 바꿔놓았다. 그는 색다른 방식으로 촌극을 연기했는데, 그런 연기는 영화계의 상투적인 표현처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클롭스키는 로이드가 도구를 활용하는 이유가 단지 자신을 구분 짓기 위한 것이라고 봤다. 다시 말해, 안경과 교복처럼 단정한 정장을 선택한 것은 채플린의 낡은 중절모와 구겨진 양복과 대비되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고, 내면의 심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무방한 캐릭터를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됐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로이드는 노동 계급이 아닌 중산층 남성을 대변하면서, 번듯한 희극배우의 모습을 보여줬다. 예컨대 <그랜드마즈 보이 Grandma's Boy>(1922)에서 로이드가 연기한 캐릭터는 늘 다소 빈궁해 보이는 채플린이나 다소 어두워 보이는 키튼과 사회적으로 대척점에 있었다. 영화는 마을을 위협하는 떠돌이(채플린이 연기한 떠돌이에 비해 몹시 흉폭한 인물)를 체포하는 과정을 그린다. '거짓 플래시백'이라는 다소 특이한 액자식 이야기 전개와 함께 일그러진 거울과 자칫 위험을 야기할 뻔한 촛불과 같은 장치가 할머니의 화장대마저 장애물 경주의 일부로 만든다. 이처럼 주변 사물이 하나 같이 로이드에게 반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짧지만 인상적인 이 장면에서도 사물에 대한 로이드의 애착이 드러난다. 하지만 영화가 들려주고자 하는 바는 평소 괴롭힘을 당하던 주인공이 적들보다 더 잘 싸우는 법을 배워 그들을 무찌르고 마침내 상대를 포용하는 이야기다.
해럴드 로이드의 여러 특징 중에서도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 얽혀 유독 흥미를 끄는 요소가 있다. 그가 도시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갑작스럽고 위태로우며 환상적인 추상화를 방불케 한다는 점이다. 이 추상화 속에서 벽체를 채 올리지 않은 건물의 골조는 우리의 무모한 주인공을 허공으로 몰아넣고 목숨을 위협하는 역할을 한다. <네버 위큰 Never Weaken>(1921)은 미국의 도시경관을 집중적으로 조망한 로이드의 두 작품 중 첫 번째 영화다(두 번째 영화는 더 잘 알려진 1923년 작품 <안전불감증 Safety Last>). 키튼이나 채플린처럼 로이드 역시 연극적 기법에 조소를 보냈다(자막에는 처음부터 "셰익스피어도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나오고, 다소 지나치게 과장된 산문을 통해 상투적인 문학 표현을 조롱하기도 한다).
마천루 한가운데에서 젊은 남녀가 서로 이웃한 사무실에서 일하며 밀애를 즐기지만, 주인공은 곧 공사 중인 건축물의 골조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무용극을 펼치게 된다. 의자에 앉아 사무실 문에 권총을 연결해두고 '미수로 끝나는 자살극(당시 희가극에서 흔히 등장하던 장면이었을 것이다)'을 흉내 내던 로이드는 그만 크레인에 걸린 철제 빔에 얽혀 의자에 앉은 채로 사무실 밖으로 끌려나간다.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를 들어올린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사무실 건물 한편에 자리한 천사 조각상이라서, 로이드는 자신이 천국에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이후 10분에 걸쳐 시선을 뗄 수 없는 시퀀스가 일련의 추상화처럼 전개된다. 여기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로이드가 펼치는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스턴트 연기다. 시퀀스 후반부에서 로이드는 이미 지상에 내려와 있지만, 자신이 여전히 아찔한 골조 구조물 위에 있다고 여기며 철근 덩어리에 매달리듯이 경찰관의 다리를 힘껏 부둥켜안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찰리 채플린의 영화가 동시대 영화보다 밋밋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계에 빗대서 인간의 상호작용을 주제로 다룬 이는 채플린 뿐이었다. 악의적인 기술이라도 로이드와 키튼에게는 해가 없는 외부 요인에 그치지만 채플린에게 기계는 내재적 요인이다. 그런 점에서 소련이 채플린을 새롭게 도입한 영화 제작과 연기 기법의 중요한 표준으로 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던 타임스>에서 채플린이 과학적 경영방식을 풍자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러시아에서 그를 마치 테일러주의 방식으로 '표준화'했다는 표현이 자칫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소련의 테일러주의자들은 기계를 대하는 채플린의 방식에 한껏 매료됐다. 테일러주의와 채플린의 만남은 이후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 감독이 고안한 생체역학‒작가, 시론 학자 빅토르 쉬클로프스키(Viktor Shklovsky, 189301984)‒기법으로 발전한다. (...)
*후속 기사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