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인영의 무용가 집중탐구 (2) 무용계의 이단아 김보람

2025-04-04     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손인영

무용계의 일반적인 춤 스타일을 비켜서 가는 무용가들이 더러 있다. 그런 면에서 김보람은 단연 독보적이다. 그의 남다른 행보는 늘 위험한 듯 비틀거리지만, 실상은 더 잘 가고 있다. 김보람은 2025년인 올해도 위험한 시도를 했다. 1천 석이 넘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바디 콘서트’ 작품을 장장 15일 동안 장기공연을 시도했다. 무용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주변에서는 무모한 시도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그의 과감한 시도는 성공했고, 무용계도 그만큼 성장했다. 

무용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놀지 않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로써 인정받기를 누구보다 원하는 사람이 김보람이다. 그는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를 이끌며 일론 머스크와 미래에 화성에서 재미있는 기획을 해보고 싶다는 엉뚱하면서도 거창한 포부를 밝힌다. 그의 삶과 춤과 생각에 대해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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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바디 콘서트’ 15주년 공연을 축하드립니다. 무용가로 토월극장에서 15일 장기공연을 하는 건 쉽지 않은데 어떻게 이런 과감한 행보를 하게 되었는지요? 

그냥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희는 지원금도 못 받았고 뭐 협찬이나 이런 것도 없이 그냥 해보자는 생각이었고 잘 안 돼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도전을 했습니다. 무모한 도전일지라도 무용도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무용관객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고요. 

티켓 값이 일반적인 무용공연보다 굉장히 비싼 편이었는데, 공연장에 관객이 많아서 손해를 많이 보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떠셨어요?

손해나 이익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데, 정리하고 보니 손해를 본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이런 걸 해보겠다는 생각을 작년부터 했고, 토월극장에 공고가 났기에 지원했는데 저희 공연하는 날짜에 공연이 없었는지 장기공연인데도 선정이 되었습니다. 무용가로 과감하게 제가 하고 싶은 걸 했기에 기분이 좋았고, 그나마 손해는 보지 않았으니 전반적으로 성공적인 공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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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계 누구도 해보지 않은 역사적인 일을 하셨는데, 그 과감성에 박수를 보냅니다. 무용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났고,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TV를 보고 따라 하곤 했어요. 당시만 해도 영상을 따로 보지 못하고 TV로만 접했기에 따라 하려면 순서를 빨리 외우는 거 외엔 방법이 없었지요. 늘 집중하고 춤을 보고 바로 따라 하고 해서 순서를 빨리 외우는 편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방송 댄스를 직업적으로 했습니다. 

9년 정도 방송 댄스를 했는데, 프렌즈라는 백업 댄스팀에 소속되어 있었어요. 그 당시 가장 잘나가는 댄스팀이었죠. 김완선, 엄정아, 코요테, 조성모 등 수많은 가수의 백업 댄스를 하다가 마이클 잭슨처럼 유명한 해외 가수들과도 작업하고 싶어서 해외로 나가려고 했어요. 당시엔 비자 받기가 쉽지 않을 때였는데 가장 쉽게 받을 수 있는 게 학생 비자더라고요. 그래서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해외에 진출하려고 진학을 하게 된 거네요.

그런 셈이지요. 학교에 가서 처음으로 무용이란 걸 배우게 된 거예요. 새로운 것을 배우니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서울예술대학교 무용가 김기인 교수님으로부터 ‘스스로 춤’에 대해 배우면서 춤에 대한 철학적 깊이와 자유로움을 알게 되었고 이후 무용가로 주저앉았습니다. 하하(웃음).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안성수 교수님의 픽업댄스그룹에 무용수로 오래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건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요?

김설진 무용가(현대무용 안무가)도 저와 같은 길을 걸었는데, 그분이 안 교수님을 소개해 줘서 하게 되었어요. 2008년부터 2013년 동안 안 교수님의 픽업그룹에서 작업했고, 교수님의 거의 모든 수업을 청강하면서 무용수로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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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댄스와 안성수 픽업그룹에서 주로 무용수로 활동을 하다 언제부터 안무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가요?

서울예대 김기인 교수님께서 안무를 해보라고 권유해 처음 하게 되었어요. 서울예대 학생들과 같이했는데 땀 흘리며 안무했던 그 기억이 너무 좋았기에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기인 장경민과 함께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를 창단하고 ‘볼레로’라는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게 2008년도 CJ 영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으면서 안무도 하는 무용수가 되었죠. 이후 안무작들이 다양한 수상을 했지만, 사실 저는 춤추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춤을 많이 추기 위해 안무를 하는 거 같습니다. 다작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기에 요즘엔 신작은 많이 안 하려고 해요. 이미 안무작이 많기도 하고요. 작품을 만들어 올리는 시점은 완성된 게 아닌 거 같아요. 작품을 올리고 수정하고 다시 올리면서 지속해서 2~3년 수정을 해야 제대로 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저는 완성도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원 제도도 이런 쪽으로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보기에 보람 씨의 춤 스타일이 굉장히 독특한데요. 방송 댄스도 아니고 발레도 아니고 현대춤도 아닌 단체명처럼 애매모호한 춤인데요. 보람 씨의 춤 스타일이 스스로는 어떤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스타일이 나왔는지요? 

제 춤 스타일이 어떻다 하고 말하기는 그렇고 저는 계속해서 제가 왜 춤을 추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춤이란 것이 뭔지에 대해서 질문을 계속 던지죠. 제 춤이 관객들에게 이상하게 또는 괴상하게 보이는 이유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본질에 가까운 춤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 춤은 보여주기 위한 춤이 아니라 말하기 위해 추는 춤이에요. 언어를 대변하는 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끊임없이 저 자신에게 질문하면서 작업을 합니다. 좀 더 근본적인 움직임이 무엇이고, 리듬이란 게 뭐고, 내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 게 재밌지 등등 요. 결국, 제 춤은 제 몸의 언어며 가장 진실하고 군더더기 없는 몸 언어라고 할 수 있죠. 그 말은 내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를 온몸으로 이해하고 말하는 거, 결국 쓸데없는 말이나 사사로운 감정 없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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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느끼기에 보람 씨의 작품에서 음악의 느낌을 그대로 춤에 이입한 듯한 경우가 많던데, 어떻게 그런 스타일을 추구하게 되셨는지요? 제가 알기로 안 교수님이 주로 그런 기법을 줄리아드 무용원에서 수학할 때 배워서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작품에 활용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혹시 안 교수님으로부터 배우기도 하셨는지요?

방송 댄스도 음악을 기본으로 춤을 추기에 음악과 춤의 연관 관계에 대해 평소에 생각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음악을 표현하자 뭐 그런 생각이었어요. 어떤 움직임이든 음악에 어울리게 표현하자고 생각하고 연습을 하다 보니, 이게 음악이 아니라 소리가 모여서 음악이 되었네!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소리를 분석하기 시작했는데, 소리란 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무용수들끼리 말로 그 소리에 대해 소통할 수도 없었어요. 

무슨 얘기냐면, 우리끼리 소리를 들을 수는 있는데, 듣는 귀가 다 다르다는 거죠. 서로 다르게 들리는 것을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를 느꼈어요. 그래서 제가 그 소리를 어떤 기호처럼 하나하나 다 분석해서 그리기 시작했어요.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듯 저는 들리는 소리를 그림으로 그려 분석을 한 후에 움직임을 만들었죠. 그러다 보니 음악과 춤이 거의 맞아떨어지게 된 거 같아요. 이런 안무방식은 저 나름대로 터득했어요. 안 교수님과 작업할 때, 저와는 다른 뉘앙스로 음악을 분석하여 움직임에 활용하시는 걸 보면서 영감을 받긴 했지만, 전혀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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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에서도 그렇고 또 몇 년 전에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범 내려온다’에서도 그랬지만, 보람 씨의 움직임이나 작품이 대중에게 어필되는 부분들이 있는 거 같은데 왜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하나요?

일반인들은 ‘무용’에 대한 편견이 있는 거 같은데 저희 춤에서는 그런 편견을 깨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형태의 춤과 조금 다른 에너지가 제 작업에 있어요. 움직임을 만들 때나 출 때도 저희만의 어떤 표현방식이 대중들에게는 직접적이거나 감각적으로 잘 와 닿는 거 같아요. 

저희는 뭔가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땀을 많이 흘리는 걸 추구 합니다. 춤추는 것에 목숨 걸고 해요. 예술을 하기 위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어쩌면 춤추기 위해 예술을 한다고나 할까요. 완전히 몰입하여 폭발적인 에너지를 드러내면, 체력적인 면에서도 경이롭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관객들이 저희 춤을 통해 카타르시스나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아요. 

무용수로 작업하다가 안무가로 탄탄하게 바닥을 다질 때, ‘범 내려온다’가 삽입된 한국관광공사의 홍보영상으로 갑자기 뜨게 되었는데, 당시 상황을 좀 설명 해주시죠. 어떤 경로와 상황에서 홍보영상을 찍게 되었고, 그게 그렇게 뜨게 될 것을 알았는지,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요? 

작곡가인 장영규 감독님과 제가 그 전에 작업을 했는데 이후, 감독님께서 뭐 이날치와 작업 한번 하자고 해서 이날치와도 작업했었어요. 그러다 장 감독님께서 한국관광공사에서 홍보영상을 찍는데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고 해서 여러 가지 일 중 하나 정도로 작업을 했는데, 사실 이게 이렇게 뜰 줄을 몰랐어요. 갑자기 전 세계적으로 뜨게 되면서 이후 여러 도시에서 계속 영상을 찍었어요. 작업할 때는 사실 많이 힘들기도 했었죠. 

이게 뜨게 된 이유는 아마도 일반적인 홍보영상과 좀 다른 부분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힙 하다고 해야 하나요? 사실, 그 홍보영상이 뜨면서 여기저기서 다양한 행사나 광고성의 기획 프로젝트들이 들어오는데, 저로서는 무용가 김보람이 본업인데, 본업이 전도된 거 같아 가능하면 안 하려고 거절을 많이 했어요.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에서도 그렇고 개인 공연에서도 움직임뿐 아니라 의상도 굉장히 독특한데 이런 건 디자이너와 같이 결정을 하나요, 아니면 본인 혼자의 생각이신지요?

제 작품에서는 거의 제 아이디어로 디자인합니다. 색동으로 만든 의상도 원래 저희 작품 의상인데, 쫄쫄이로 된 색동을 찾았으나 천 자체가 없어서 공단 비슷한 천을 사서 의상 샘플을 미싱 해주시는 분에게 맡겨 만들었어요. 동대문 5가에 가면 미싱 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관광공사 때는 디자이너가 있었어요. 그래도 제가 주로 의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그분과 같이 상의해서 만들곤 했어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예술가로서 김보람의 능력을 알 수도 있을 듯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락 그룹인 콜드플레이의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하셨는데, 그 이야기도 간단히 해주시죠.

콜드플레이에서 저희 영상을 보고 연락을 다방면으로 줬어요. 저는 메일을 못 읽고 있었는데, 저와 작업하는 분들에게도 메일이 와서 저에게 전달되어 알게 되었어요. 우주적인 복장을 하고 영상을 찍는다기에 관심이 가서 메인 보컬인 크리스 마틴을 만났는데, 제가 선글라스를 낀 우주인으로 하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받아주고, 제안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도 그쪽에서 좋아해서 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2022년인 것으로 아는데요. 일반인과 더불어 만든 작품 ‘홀라당’으로도 이슈가 되었는데요. 그런 프로젝트를 만드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예술가와 일반인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판이 점점 커져 이슈가 되었죠. 참가자들이 4개월 동안 직접 조명, 안무, 음악, 홍보, 마케팅, 무용수, 무대 등 공연의 모든 상황을 그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한 것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고 정신없는 상황이 되었지요. 저는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산으로 가보자며 만든 작품인데, 모두 즐겁게 참여했고 공연했던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어요. 당시 저는 예술이란 것이 꼭 예술가만 만들어야 하느냐고 생각하며 무용이라는 좁은 영역을 펼쳐 대중적 저변을 넓히고 싶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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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공연이었고 재미있었어요. 저도 그 공연 즐겁게 봤어요. 무용가로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셨는데요. 무용계 유명한 플랫폼인 일본 요코하마 댄스 콜렉션(YDC)과 스페인 마스단자(MASDANZA) 국제무용페스티벌 등에서 상도 받았지요.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상주단체로도 활동하고 많은 해외공연 등으로 국제적인 인지도도 높은데 무용가로 만족하며 사시나요? 한국에서 무용가로서 살아남기가 쉽지 앉잖아요? 

무용가로 만족하고 안 하고의 문제보다 그냥 그동안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했던 것 같아요. 한국의 문화가 약간 사회적으로 억압적인 부분이 있잖아요. 저는 무용을 하면서 오히려 자유롭게 저의 개성을 살리며 제가 하고 싶은 걸 한 것 같아요. 뭔가를 표현해 보려는 데 잘 안되더라도 저는 그 작업을 계속합니다. 모두가 내가 표현하려는 게 틀렸다고 하더라도요. 저는 직진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떤 것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이 바로 작업의 재미이니까요. 

제가 어떤 작업을 할 때, 뭔가 명확하게 알고 시작하는 게 아니기에 그 답이 나올 때까지 그냥 멈추지 않고 작업을 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어떤 동작을 만들 때, 그 동작이 너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아, 이게 맞는구나 하고 생각한다는 거죠.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힘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만족과 불만족의 문제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만족하든 만족하지 않든지 저는 이 일을 그냥 합니다. 제가 선택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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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를 어떻게 이끌고 나가실 생각인가요?

저희 컴퍼니는 굉장히 자유롭습니다. 제가 단체를 이끌기는 하지만, 무용수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은 없습니다. 무용수들도 각자 자기 길을 가야 하고 스스로 서바이벌해야 한다고 봐요. 무용수들은 매일 출근하지만, 본인의 일이 있거나 하면 안 와도 됩니다. 일단 왔다 하면 저희는 에너지를 모두 소진할 때까지 춤을 춥니다. 

무용단의 작업 방향에서는 AI 시대에 무용의 역할이나 창작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합니다. 저는 사실, 일론 머스크 초기 때부터 지켜보며 연구를 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그와 어떤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화성 이주나 로봇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일론 머스크와의 작업은 먼 미래의 고민이고 가까운 미래에 작품적으로 어떤 것을 계획하고 있는지요? 요즘 해외공연도 많이 다니신다는데 어떤 곳에서 주로 공연을 하며 앞으로의 해외공연 계획도 있으시면 알려주시죠. 

작년에 영국에서 초연한 ‘벨트’라는 작품이 거기서 굉장히 인기를 끌었고 영국의 무슨 상 수상 후보자로 올라가 있기도 합니다. 올해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이 작품을 초연하고 내년부터 이 작품을 해외에서 공연하려고 합니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장기공연을 계획하고 있는데 지금은 추진 중이라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워요. 그 외에 2017년부터 매년 여러 곳을 다니고 있어요. 미국, 네덜란드 누더죤 공연예술축제, 독일 탄츠임오그스트, 호주 캐슬메인 페스티벌, 루마니아 시비우국제연극제, 홍콩 시티컨템포러리 무용축제 등 수없이 다녔고 앞으로도 해외공연은 많아질 듯합니다.

무용가 김보람은 생각하기보다 행동으로 실행하는 직진형이다. 대중이 무용을 사랑할 때까지 온몸을 불태울 듯하다. 남들과 다른 감각을 가진 그의 취향이 작품의 스타일로 드러나고 그 남다른 취향에 대중이 열광한다. 앞으로 해외에서 더 많은 인기를 누릴 안무가이자 무용수 김보람이 한국에서도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정부 관계자나 한국의 관객들이 더 유심히 지켜봐 주면 좋겠다.

 

 

한 안무자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기까지는 자신의 능력이 우선이나 더 큰 그릇으로 만드는 것은 지원의 힘이다. 무용은 소외된 순수예술로 관객층이 두껍지 않으나 김보람은 특별한 지원 없이 혼자 동분서주하고 있다. 무용이 한국에서 대중과 더불어 호흡하길 바라며 다양한 기획을 만들고 있는 그의 동분서주를 눈여겨 봐주는 지원기관들이 더 늘어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