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제거’, 이스라엘의 오래된 꿈(1)
트럼프의 ‘중동 리비에라’구상을 거부하는 팔레스타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가자지구의 20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집트와 요르단으로 강제이주시키자”라고 한 제안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스라엘 내에서는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이 제안은 시온주의 운동과 이스라엘 지배층이 오래전부터 품어온 구상과 일치하며, 이들은 1949년 이후 계속해서 가자지구를 반드시 제거해야 할 골치 아픈 장애물로 여겨왔다. 라빈 총리부터 네타냐후 총리에 이르기까지 가자지구를 지우려던 시온주의의 민낯을 2회에 걸쳐 진단한다.
"가자가 바다에 가라앉았으면 좋겠소.”
때는 1992년 9월. 소련은 붕괴했고, 남아프리카에서 중앙아메리카까지 냉전 기간 내내 이어져 온 여러 국제 위기가 하나둘씩 해소되던 시기였다. 워싱턴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뿐만 아니라, 요르단-팔레스타인 공동 대표단과도 서안지구(웨스트뱅크), 가자, 그리고 동예루살렘의 미래에 대해 협상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측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서도 가자지구가 사라지길 바란다는 망상을 드러낸 인물은 바로 1992년 6월 총선에서 승리해 이츠하크 샤미르가 이끄는 우파 연합을 꺾은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이었다.
라빈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95년, 오슬로 협정(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이에 1993년 체결된 평화 협정—역주)에 서명한 대가로 유대인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라빈 총리, 지도에서 가자를 지우려던 망상
라빈은 당시 ‘가자를 바다에 가라앉히고 싶다’라는 꿈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인정했지만, 그는 자신과 같은 망상을 품고 있는 동포들과 정치적 반대 세력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50년 넘게 팔레스타인 민족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이 땅에서 좌절됐기 때문이다.
가자 항(港)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곳으로, 때로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지닌 도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자지구’라는 지역은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1922년부터 1948년까지 이어진 영국 위임통치 시절에도 결코 하나의 동질적인 행정 단위로 구성된 적이 없었다.
현재 우리가 아는 가자지구의 경계는 1948~1949년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형성됐다. 전쟁 결과,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따라 이스라엘에 할당된 것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요르단은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합병했고, 이스라엘은 시나이 국경 근처 365㎢의 땅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 땅 한편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가자 시였다. 가자지구의 법적 지위는 오랫동안 불분명했는데, 이는 당시 이 지역을 관리하던 이집트가 1952년 7월 23일 파루크 왕이 물러나면서 정치적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나크바로 난민들이 몰려든 가자지구
가자는 난민 비율이 매우 높은 지역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1948~1949년 나크바(Nakba,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이주, 억압, 강탈을 통해 이루어진 민족 청소—역주)를 겪으며, 기존 주민 8만 명에 더해 자신들의 집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 20만~25만 명이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그들을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은 ‘귀환’이었다.
이스라엘이 침입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휴전선을 넘어 자신들의 몰수당한 재산을 되찾거나, 복수를 위해 침투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의 절박한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한 인물은 당시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이었던 모셰 다얀이었다.
1956년 4월, 가자 국경 인근 키부츠에서 한 이스라엘인이 피살된 후, 다얀은 그 청년 장교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해범들을 비난하지 맙시다. 지난 8년 동안 그들은 난민 캠프에서 살아왔고, 우리(이스라엘)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살던 땅과 마을을 차지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봤습니다.”
첫 인티파다의 역사적 성과, 가자지구 법적 지위 얻어내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침입자’들의 행동은 곧,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이 주도하는 집단적 행동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공습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침투의 근원을 직접 타격한다’(1)는 목표 아래 비밀부대를 조직했는데, 이 부대를 이끈 인물이 바로 훗날 총리가 되는 아리엘 샤론이었다.
이후,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은 또 다른 싸움에 나섰다. 바로 카이로 정부와 팔레스타인 난민기구(UNRWA)가 합의해, 수만 명의 난민을 시나이로 이주시킨다는 계획에 반대하는 투쟁이었다. 1955년 2월 28일,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스라엘의 잔혹한 공격은 다음 날인 3월 1일 가자에서의 첫 번째 인티파다(팔레스타인 저항운동)로 이어졌다.
이 민중 봉기는 무슬림 형제단,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무소속 인사들로 구성된 공동위원회가 주도했다. 가자 시내 곳곳에서, 그리고 이내 전역에서 구호가 울려 퍼졌다.
“그들은 시나이 이주 계획에 서명할 때 잉크를 사용했지만, 우리는 우리의 피로 그 계획을 지워버릴 것이다”, “강제 이주도, 정착도 없다!” 시위대는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이집트의 새 권력자 가말 압델 나세르를 성토했고, 무장과 군사훈련, 조직할 권리를 요구했다.
이 움직임은 곧 카이로까지 번졌다. 결국 나세르는 시위 주도자들을 만났고, 난민 정착 계획을 철회하고 민병대 창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나세르는 가자지구의 법적 지위를 공식화했다.
그는 1955년 5월 11일, ‘팔레스타인 내 이집트군 통제 지역 기본법’을 공포했다. 이 법은 가자를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 가운데 유일하게 자치권을 유지하며,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의 희망을 이어가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 법은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국제 사회에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랍권을 불신한 팔레스타인 수뇌부
영국과 미국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을 시도하던 나세르는 점차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잃고, 급진화의 길로 들어섰다. 1955년 4월 반둥회의(비동맹회의)에 참석한 나세르는, 같은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무기 구매협정 체결을 공개하면서, 중동 지역에서 서방이 장악하고 있던 군비 독점을 깨뜨렸다.
또한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부대 창설을 발표하지만, 철저한 감시 아래 두었다. 나세르는 이 부대가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을 하는 활동가들을 체포하고 투옥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가자지구의 용광로 속에서, 훗날 파타흐(Fatah,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정당—역주)에서 핵심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들이 단련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칼릴 알와지르(아부 지하드)와 모하메드 할라프(아부 이야드)가 있었다. 이들은 훗날 야세르 아라파트(2)의 주요 참모가 된다. 이들은 나세르의 태도 변화와 자신들의 요구가 카이로의 지역·국제정치 계산에 종속되는 경험을 통해, 아랍 정권에 대한 깊은 불신을 품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해방은 팔레스타인인 스스로의 손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념이 이때부터 그들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글·알랭 그레쉬 Alain Gresh
온라인 매체 <오리앙 XXI> 편집장, 저서 『팔레스타인, 죽음을 거부하는 한 민족』, 파리, 2024
(1) 장-피에르 필리우, 『가자의 역사』, 파야르, 파리, 2012.
(2) 「불굴의 가자,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용광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8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