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반복되는 실패는 왜? – 이승만에서 윤석열까지 비극이 재연되는 이유

2025-04-07     성일권 발행인

202544,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파면 선고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전환점이 될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코 고립된 비극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반복되는 보수의 흑역사 속에 살아왔다.

이승만의 부정선거, 박정희의 군사독재, 전두환·노태우의 내란죄, 이명박과 박근혜의 사법적 단죄, 그리고 이제 윤석열의 탄핵과 기소까지, 정치적 계보를 따라가 보면 보수정당이 한 세대도 거르지 않고 스스로의 몰락을 재연해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보수의 반복되는 실패는 권력의 사유화에서 시작되었다. 보수 정치가 실패할 때마다 재연되는 양상이 있다. 정권의 사유화, 권위주의의 강화, 공공성과 절차에 대한 무시, 그리고 그 끝에 찾아오는 시민의 분노와 사법의 심판이다.

박정희의 권력은 18년 독재로 이어졌고, 군인출신 전두환은 총칼로 권력을 찬탈했다. 역시 군인출신이었던 노태우는 제법 영리한 합리적 독재자였고, 기업인 출신 이명박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명분 아래 공공 권력을 사적 이익에 끌어들인 유사 파시스트였다. 경험없는 박근혜는 국정을 최측근과 공유했고, 검사출신 윤석열은 법치의 외피 아래 공권력을 사유화하여 사실상의 비상 통치 체제를 시도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민주주의를 통치의 수단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보수는 법치와 헌정의 외형을 존중하는 척했지만, 내부에서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유린했다. 형식을 갖추었으나, 정신은 외면했다.

 

'자기 편은 보호하고, 남은 짓밟는' 정치의 이중성

 

보수 정치의 가장 뿌리 깊은 문제는 이중성과 선택적 정의다. 자기 사람의 부정과 비리에는 침묵하거나 방어에 나서고, 정치적 반대세력에게는 사정기관과 언론, 이념을 총 동원해 가차없는 응징을 감행한다. 윤석열 정권은 이 점에서 가장 노골적이었다. 본인의 부인 김건희 씨에 대한 각종 의혹에는 모든 법적 장치를 동원해 방어막을 치면서, 정권 비판 세력에 대해서는 검찰·경찰·감사원이 총동원되었다. 국회가 통과시킨 탄핵안에 대해 한결같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태도는, 국민의 대표기관과의 단절을 넘어, 헌법정신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윤석열의 탄핵은 부정한 시도에 대한 헌법의 응징이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보수가 자기 성찰을 거부했을 때 국가가 치르게 되는 비용에 대한 경고였다.

 

보수의 재구성, 늦었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보수는 이 흑역사를 또다시 침묵과 왜곡으로 덮을 것인가. 아니면 그 모든 실패를 직시하고, 근본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가. 한국 사회에 보수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를 중시하고, 질서와 안정을 중시하며, 공동체에 대한 보수적 가치관을 제안하는 정치세력은 언제나 필요하다. 문제는, 이 땅의 보수가 보수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보수의 옷을 입고 권위주의를 실행했고, 공정을 말하면서 사익을 취했으며, 법치를 외치면서 헌법을 무력화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보수는 더 이상 합리적 보수의 언어를 말하지 못하는 이념적 파산 상태에 놓였다.

진정한 보수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다음의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 과거와의 단절이나 이념적 프레임의 청산이 아니라 과오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정책적 현실성을 확보해야 하고, 둘째 사법권력에 기댄 통치가 아니라 정치 본연의 회복에 나서야 하고, 셋째 선동과 혐오가 아니라 시민과의 소통과 신뢰 회복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보수는 권력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위임으로 관리하는 것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보수는 더 이상 이승만과 박정희의 유산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을 수 없고, 전두환과 노태우의 반민주적 유산을 이어받는 시대도 끝났다. 이제야말로 법과 원칙을 자신의 사람에게도 적용하고, ‘공정과 정의를 자신의 집단 내부에도 묻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보수가 반성할 줄 모르는 전 대통령의 선동과 파시즘적 기독교 극우의 준동에 휘둘린다면 다음 정권에서도, 그 다음 세대에서도 보수는 심판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시민들은 다시 물을 것이다. “당신들은 대체 몇 번을 실패해야 멈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