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제거’, 이스라엘의 오래된 꿈(2)

수에즈 전쟁에 묻힌 가자에서의 학살

2025-04-08     알랭 그레쉬 | 온라인 매체 <오리앙 XXI> 편집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가자지구의 20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집트와 요르단으로 강제이주시키자”라고 한 제안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스라엘 내에서는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이 제안은 시온주의 운동과 이스라엘 지배층이 오래전부터 품어온 구상과 일치하며, 이들은 1949년 이후 계속해서 가자지구를 반드시 제거해야 할 골치 아픈 장애물로 여겨왔다. 라빈 총리부터 네타냐후 총리에 이르기까지 가자지구를 지우려던 시온주의의 민낯을 2회에 걸쳐 진단한다.

 

1955년 4월, 이스라엘 정부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다비드 벤구리온이 제안한 가자지구 점령 계획을 논의했다. 내각은 이 계획을 일단 거부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보류에 불과했다.

1956년 7월 26일,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 회사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프랑스·이스라엘 3국은 나세르를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각국은 저마다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전쟁을 이집트에서 만회하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에 대한 무기 공급을 차단하려 했다. 영국은 중동에서 약해진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점령지를 확대하고, 특히 가자지구 장악을 노렸다.

결국, 가자지구 점령은 1956년 11월 2일부터 1957년 3월 7일까지 이어졌다. 이스라엘 정부는 철수에 극도로 소극적이었지만, 미국의 최후통첩으로 마지못해 철수를 결정했다. 우리가 흔히 ‘수에즈 위기’라 부르는 사건의 전개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가자 점령 기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다.

많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이집트에서 투옥된 탓에, 무장 저항 시도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탄압은 훨씬 거셌다. 역사학자 장피에르 필리우는 “인구 33만 명 가운데 최소 930명에서 최대 1,200명이 살해됐다. (…) 여기에 부상자, 투옥자, 고문당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전체 주민의 약 1%가 점령군의 폭력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라고 지적했다.

 

가자를 방문한 체 게바라,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가자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요구했던 이집트 행정부의 복귀는, 비교적 평온한 시기의 시작을 알렸다. 이스라엘의 공습은 줄어들었고, 침입자들의 활동도 감소했다. 그 사이 나세르는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서 위상을 굳혔다. 팔레스타인 해방은 아랍의 단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지배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아랍연맹의 결정으로 PLO가 1964년 창설되었으며, 이 조직은 철저히 카이로의 통제 아래 놓였다. 한편, 야세르 아라파트가 창설한 파타흐는 1965년 1월 요르단에서 첫 무장 작전을 감행했으며, 나세르는 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 민족 수난사의 상징적 무대로 만들었다.

1959년에는 체 게바라가, 1967년에는 장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가자지구를 방문했지만, 이 유명한 철학자 부부의 방문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난민들의 처참한 상황을 목격한 보부아르는 오히려 이렇게 자문했다. “이들의 비극에, 정녕 이들 자신도 일정 부분 책임이 없는 건가?”(3)

 

샤론이 대규모로 동원한 불도저들, 가자 난민 캠프 무참히 파괴

1967년 6월 전쟁과 가자지구 점령 이후 몇 달 동안, 이스라엘 정부는 약 7만 5천 명을 요르단으로 강제 추방했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는 이들을 ‘제5열’(내부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전쟁 당시 가자지구 밖에 있었던 2만 5천 명은 귀환이 금지되었다. 이와 별도로, 4만에서 5만 명의 민간인이 가자지구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1968년, 가자지구에 두 개의 이스라엘 정착촌이 세워졌다. 요르단에서 출발한 펫다인(팔레스타인 전투원)들이 서안지구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동안, 가자지구에서는 후방 기지 없이 캠프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기반한 가장 오랜 저항이 조직되었다. 당시 무슬림 형제단은 이 저항에 참여하지 않고, 1987년 하마스 창설까지 합법적인 활동 노선을 선택했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한 것은 1971년, 아리엘 샤론의 지휘 아래에서였다. 샤론은 불도저를 동원해 가자지구 곳곳에 대규모 통로를 개설해 장갑차 이동로를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의 난민 캠프 주민들이 쫓겨났고, 수천 채의 가옥이 철거되었다. 1970~1971년의 학살은 1956년 학살과 함께, 팔레스타인인들의 몸과 기억에 깊이 새겨졌지만, 그들의 저항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트랜스퍼’, ‘팔레스타인 민족 청소’를 꿈꿨던 시온주의

이런 배경에서 시온주의 운동의 오랜 구상인 ‘트랜스퍼’(이주)가 다시 떠오른다. ‘트랜스퍼’라는 표현은, 사실상 주민들을 자신들의 터전에서 몰아내는 ‘민족 청소’를 에둘러 표현한 완곡어법이다. 이스라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톰 세게브는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트랜스퍼는 시온주의 꿈의 본질 그 자체다.” 수개월 동안, ‘좌파’가 주도하던 이스라엘 정부 내에서 장관들은 이 문제를 놓고 아무런 금기 없이 논의를 이어갔다. 한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4) “우리는 그들에게 엘아리시(시나이)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고 말합니다. 우선은 자발적으로 나갈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만약 짐을 챙기러 오지 않으면, 불도저를 동원해 집을 철거합니다. 사람들이 남아있으면, 그들을 강제로 내쫓습니다. 48시간의 기한을 줍니다.”

다른 장관도 이를 시인했다. “이 땅을 이스라엘의 일부로 만들고 싶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부 주민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한편, 또 다른 장관은 강제력 행사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강제 이주를 둘러싼 충돌은 일시적인 고통일 뿐이며, 이는 안보상의 필요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장관은, 국제적 여건이 아직 이런 대규모 작전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언적 발언을 남겼다. “이런 강제 이주는 오직 ‘대규모 충격’이 발생할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트럼프의 ‘중동 리비에라’ 구상은 ‘반인도주의적 범죄’

가자에서 무장 저항이 철저히 진압된 이후, 정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PLO와 산하 조직들이 전통적 엘리트들을 밀어내고 주도권을 장악했다. 가자에서 1987년 12월 9일에 제1차 인티파다가 발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 봉기는 이후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고, 결국 1988년 팔레스타인국 수립 선언과 이어지는 오슬로 프로세스로 이어졌다. 그러나 오슬로 프로세스의 실패는, 애초부터 이를 비판하던 하마스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고, 하마스는 2005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아랍과 국제사회의 각종 압박, 그리고 파타흐와 하마스 양측의 분파적 행태가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결국 하마스가 가자지구의 권력을 장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봉쇄를 가했고, 7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인 끝에,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이르게 됐다. 오랫동안 예견되어 온 ‘거대한 충격’이 결국 이스라엘을 뒤흔들었고, 이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가자 주민들의 강제 추방이라는 구상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국가원수가 국제법이 규정하는 ‘반인도주의적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공개적으로 촉구한 사례일 것이다. 그 뒤에는 냉소적 계산과 탐욕이 자리 잡고 있다. 트럼프 주변의 올리가르히 재벌 그룹은 ‘중동의 리비에라’로 가자지구를 개발해 부동산 투기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폐허 속에서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계속돼 

이스라엘 정부는 이런 상황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스라엘의 카츠 국방장관은 자국의 군대에 가자 주민들의 ‘자발적 출국’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혀 진정성 없이 이렇게 덧붙였다. “가자 주민들도 전 세계 다른 지역 사람들처럼, 원하면 자유롭게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5)

하지만 카츠 장관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1967년 이후,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다시는 이 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그런 이주의 자유를 허락했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걸어서, 말을 타고, 수레를 타고, 혼자서 또는 가족과 함께, 짐을 챙기기도 하고, 빈손으로 떠나기도 하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과 무너지는 건물 잔해 속으로 다시 돌아갔다. 무너진 집터 위에 천막을 치고 살아야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팔레스타인인들은 수십 년에 걸친 전쟁과 점령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자신들의 땅을 지키려는 강한 애착과 저항의 정신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글·알랭 그레쉬 Alain Gresh
온라인 매체 <오리앙 XXI> 편집장, 저서 『팔레스타인, 죽음을 거부하는 한 민족』, 파리, 2024


(3) 시몬 드 보부아르, 『모든 것이 계산되었다』, 갈리마르, 파리, 1972.
(4) 오퍼 아데렛, 「‘우리는 그들에게 떠날 48시간을 준다’: 가자인들을 이주시키려는 이스라엘의 계획은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및 「‘본질적으로 시오니스트의 꿈’: 팔레스타인인 이주 논쟁의 역사, 설명」, <하아레츠>, 예루살렘, 각각 2024년 12월 5일과 2025년 2월 12일.
(5) <타임스 오브 이스라엘>, 2025년 2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