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터처블 CEO, 알아서 기는 미디어

2012-12-11     마리 베닐드

2012년 4월 14일 <RTL> 방송의 <깜짝 뉴스> 시간에 퍼블리시스 그룹의 모리스 레비 회장이 출연했다. 출연자에게 뉴스캐스터 역할을 맡기는 이 프로그램의 원칙에 따라 레비 회장은 <RTL>과 <프랑스2> 여성 앵커인 마리 드뤼케르(<M6> 창립자인 장 드뤼케르의 딸)와 함께 뉴스를 진행했다.

조금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뉴스캐스터'에게 프랑스 기업 대표가 받은 보너스로는 역대 최고액이라 할 수 있는 1620만 유로에 대해 물어야 하는 순간이 오자 마리 드뤼케르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물론 당신이 부당하게 보너스를 받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퍼블리시스를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 그룹으로 변화시켰고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었다. …당신이 퍼블리시스로 일궈낸 일에 대해서나 당신이 훌륭한 경영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개인적인 모순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어쩌면…." 30여 분간의 방송 시간 동안 방청객은 여성 앵커의 입을 통해 <챌린지>의 2011년 순위상 CAC40(프랑스 주가지수)의 가장 유능한 경영자가 '모범적'이고, 시민적·윤리적 문제에 신경 쓰고 있으며,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에너지를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를 타파하는 데 많이 쏟아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역'이 된 거대 광고주

이 신생 프로그램은 그에게 넉넉하게 시간을 할애했고, 그는 주어진 시간을 자신의 진실을 밝히는 데 활용했다. 그는 1996년 직원 6천 명이던 자신의 그룹- 엘리자베스 바댕테르의 부친 마르셀 블루스타인 블랑셰가 창립(1)- 을 15년 만에 직원 5만4천 명, 매출은 10배가 늘어난 58억 유로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키웠다. 그러면 그의 메가 보너스는? 그는 그 보너스가 목표를 초과 달성한 자신의 대단한 역량의 대가로 2003년부터 받기로 돼 있던 수당이 지연된 것이라고 밝혔다. 축구선수 호날두나 지단의 경기 보너스와 비슷하며, 수익 1유로에 대해 0.5상팀 이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언제나 모범적으로 행동해온 경영주를 흠집 내려 한다"고 항변했다. 퍼블리시스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던 '불안정한 세대' 소속 운동원들은 그와는 의견이 다르다. 그들 중 한 명은 "컨설턴트 일을 하며 한 달 평균 400유로를 받는 연수생들 비율이 그룹 인원의 35%를 차지하는데, 모리스 레비의 보너스 1600만 유로로 정규직 직원 740명을 고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모범적이라고? '제4의 권력'을 대변하는 여성 앵커 마리 드뤼케르는, 지난 6월까지 프랑스기업협회(AFEP) 회장으로서 레비가 "경영진에 대한 보수는 신중해야 하고 형평성을 갖춰야 하며 공정해야 하는 동시에,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기업협회 규정 20조 2항을 준수할 책임이 있다고 반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퍼블리시스 매니저들이 겁에 질린 직원들에게 회장과 그에 대한 보너스 지급을 지지한다는 연판장에 강제로 서명하게 했다는 정보(2)에 대해 질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언론계에서 레비 회장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거물이다. 그는 인맥과 이해관계를 활용하는 데 능하다. 이 대단한 보스의 '과도함'을 전면 기사로 다루며 고발한 <카나르 앙셰네>('사슬에 매인 오리'라는 뜻)와 <마리안>을 제외하면 자신들의 수입 일정 부분을 보장해주는 세계 3위 광고그룹 회장을 문제 삼는 위험을 감수하는 언론은 거의 없다. <챌린지> 편집위원 에리 루티에는 3월 28일 자신의 트위터에 "광고계를 장악하고 있는 모리스 레비의 보너스 스캔들에 대한 신문들의 신중함과 절제"라는 표현으로 이들의 태도를 요약했다. 이 주간지의 뱅상 보피스 부장은 '최고경영자들은 희생양으로 간주되는 게 지긋지긋하다'는 제목으로 레비 회장과의 인터뷰를 실었다(2012년 3월 29일).

이런 정략결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3년에 이미 <엑스프레스>는 레비 회장을 묘사하면서 때로는 '아름다운 거인'으로, 때로는 '완고한 거물들 중 한 명'으로 소개했다. 그에 대한 표현에 다소 망설임이 느껴지는 것은 과연 퍼블리시스 회장이 '재능을 겸비한 접골사'인지, 아니면 '기업들에 정통한 금은세공사'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가 움직이고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첩한 중재자'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을 게다. 어쨌거나 "이 보스의 에너지가 경탄을 자아낸다고 말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이 주간지는 단정지었다(2003년 4월 3일). 2010년 9월 <리베라시옹> 편집부는 '사자왕'이라는 잔인한 제목 아래 레비 회장을 묘사하면서 퍼블리시스가 <리베라시옹> 광고의 반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독자들은 그 기사를 통해 퍼블리시스 회장이 비즈니스계에서 조난사고를 겪는 사람들에게 구조의 손길을 내밀고, 경제적 부상으로 절뚝거리는 환자 머리맡에서 일생을 보낼, 뻔뻔한 체제 순응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 너무나도 큰 배려에 감동한 듯한 <르몽드>는 '위기 후의 자본주의는 윤리적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2010년 5월 28일)를 설명하기 위해 그에게 한 면을 할애했다. 이후 모리스 레비는 인터뷰를 통해 68살에 자신의 회장직 임기를 연장하기로 결정하면서 회장으로서 장수를 누리게 된 상황을 정당화했다. "대단히 능동적으로 여전히 주도권을 장악하는 캡틴이 떠나는 상황을 보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감독위원회가 알아봐준 고전적인 상황이다. 남아 있으라는 상당한 압력이 있었다."(2010년 6월 3일)

1년 뒤 또 다른 인터뷰는 "2012년 1월부터 나는 더 이상 고정 급여를 받지 않을 것"(2011년 11월 30일)이라며 그의 보수 시스템의 대담함과 미덕을 전면에 내세우는 기회를 제공한다. 언론에 엄청난 광고를 대주는 레비 회장은 사실 자신의 보수가 퍼블리시스의 '하이퍼 퍼포먼스' 실적과 연동되고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되기를 원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월급 중에서 정액 부분, 다시 말해 연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만 포기했고 2003년부터 누적된 보너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잊어버렸다. 일간지 인터뷰에서 그는 퍼블리시스가 르몽드 그룹 계열사인 <M 퓌블리시테>의 주주(49%)임을 밝히지도 않았다. <르몽드>의 역대 경영진들은 레비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 중 한 명인 에리크 포노리노는 이 '친구'의 충고를 따라 니콜라 사르코지가 2010년 언론그룹 재자본화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했음을 고발하는 사설을 쓰는 것을 포기했을 정도였다.(3)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임기 말년 미디어의 지원을 기대하며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모리스 레비가 있다"(<레트르 A>, 2012년 1월 27일)고 말했다. 2012년 3월 13일부터 '경쟁력의 도전'이라는 주제로 <르몽드>와 공동 개최한 프랑스기업협회(AFEP) 심포지엄에는 프랑수아 바이루, 사르코지, 올랑드, 세 명의 대선 후보가 참석했다. AFEP 회장이 <RTL> 방송에서 내건 심포지엄 목표는 '공공지출 문제 최우선 해결'이었다. "프랑수아 올랑드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면 모리스 레비는 엘리자베스 바댕테르, 시몽, 그리고 산업부에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의 보좌관을 지낸 장 이브 나우리와 함께 별 어려움 없이 엘리제궁에 입성할 것"이라고 <레트르 A>는 예견했다(2012년 1월 27일). 사실 레비는 사회당 거물이던 스트로스칸의 측근이었다. 레비는 스트로스칸과 산업 동아리(Cercle de l'Industrie·스트로스칸과 르노 그룹 회장 레몽 레비가 만든 기업 대표들의 로비 조직)를 혼동했던 것이고, 언론이 그를 가혹하게 대했다고 생각했다("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일화들을 하루 종일 과장해가며 떠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엑스프레스>, 2011년 5월 31일).

<르몽드> 마저도…

<르몽드> 전산 기록을 살펴보면 퍼블리시스 회장에 관한 기사가 507개나 올라 있다. CAC40 주식 시가총액 1위인 토탈사 크리스토프 드 마르주리 회장 관련 기사(277회)나 프랑스 다국적기업들 중 중요한 기업인 다논의 프랑크 리부 회장 관련 기사(261회)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 <피가로> 사이트에도 마르주리 회장(125회)이나 리부 회장 관련 기사(281회)보다 레비 회장 관련 기사가 많다(390회). 2011년 3월 미국 남성잡지 <GQ>에서 미디어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비에 닐(인터넷 업체 <프리> 창업자이자 <르몽드> 주주) 다음으로 많이 언급된 퍼블리시스 CEO는 자신의 그룹의 중요성을 넘어서는 권력을 갖고 있다. 그는 신문들이 광고주에게 도움을 주기 이전에 이미 광고주들이 특정 신문을 도와주도록 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제 곧 사람들이 문진(文鎭) 없이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보게 될 것"이라고 그는 조롱했다.(4)

2011년 여름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통해 레비 회장은 퍼블리시스의 경영진 16명과 주주들이 최소한의 세금을 더 내자고 대대적으로 호소했다. 최고 수입의 1∼2%에 해당하는 특별 분담금을 내자고 한 것이다.(5) 레비 회장은 <CNN>에서 "부자들이 불균형한 방식으로 더 부담하지 않아서 가난한 사람들이 더 고통받는 걸 지켜보게 되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단언했다(2012년 1월 27일). 그렇다고 대기업 회장들의 임금에 상한선을 정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2011년 8월 25일 <유럽1>에서 "공공지출을 정리하고 노력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정의를 구가하는 것 외의 그 어떤 계산도 들어 있지 않다"고 하면서 "통제 경제에서라면 모를까 보수를 표준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제안 때문이었는지 마리 드뤼케르는 <RTL> 인터뷰 도중에 레비 회장이 "프랑스를 돕기 위해 더 많이 내놓는 것"을 받아들였음을 강조했다. 물론 이런 발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부채의 중압감을 느끼게 하고, 올랑드 후보가 나중에 제안한 최고 수입에 대한 75% 세금 공제- 이에 대해 레비 회장은 "몰수에 가까운 것"이라고 평했다(<챌린지>, 2012년 3월 2일)- 를 막기 위한 임시방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렇지만 마리 드뤼케르는 엉뚱하게도 그의 보너스가 폭로되면서 사회당 선거운동의 표적이 됨으로써 소통의 의무를 저버린 것은 아니냐고 질문했다. "이렇게 민중 선동이 고조되는 시기에 왜 좀더 앞당기지 않았습니까?"(물론 이 말에는 "왜 그의 보너스를 좀더 이전에 받지 않았느냐"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레비 회장이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호소하기 며칠 전인 2011년 8월 16일, <르몽드> 1면 기사는 레비로 장식됐다.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가 프랑스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하향 조정할 전망을 내놓자, 그는 사르코지가 제안한 예산 '황금률'이 모든 정치 계층에 의해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심심한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역대 정부들이 사회 시스템, 행정, 국가의 구조적 비용 개혁에 애쓰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달리 말하면, 차기 프랑스 대통령은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곳에만 쓰도록 최대한 지출을 삭감하고, 부채 청산만을 목표로 하는 민영화 프로그램으로 보완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2012년 1월 17일 <르몽드>에 다시 기사와 논설이 실렸다. "AAA가 무너졌으니, 국가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로 삼자."

그의 영향력이 여전히 대단하기는 하지만 언론그룹의 자본 참여가 레비 회장에게 건드릴 수 없는 지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2012년 8월 27일 <리베라시옹>은 "레비 회장이 몇몇 납품업자의 몫에 손댄 이유로 르노 임원 한 명을 부당하게 고발하기 위해 자신이 광고 부문 예산을 보유하고 있는 르노 경영진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이 고발은 근거 없는 르노 산업 스파이 사건으로 이어졌지만 이것은 <르몽드>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 마리 베닐드 Marie Vénilde 주요 저서로 <사람들은 두뇌를 산다>(레종 다지르·파리·2007) 등이 있다.

번역 / 김계영

(1) ‘퍼블리시스, 하나의 권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6월호 참조.
(2) 엘자 파이네르, ‘모리스 레비 지지를 지시받은 퍼블리시스 직원들과 그들의 보너스’, www.rue89.com, 2012년 4월 2일.
(3) <나의 르몽드 타워>, 갈리마르, 파리, p.489.
(4) <챌린지>, 파리, 2011년 12월 6일.
(5) ‘프랑스 최고 부자들의 호소: 우리에게 세금을!’,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파리, 2011년 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