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주의 문화톡톡] 창조는 진행형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창조론,’ 또는 ‘근본주의’다. 이 견해는 세상이 엿새 동안 창조되어 현재처럼 완결되었다고 믿는다. 이른바 ‘즉각적 창조’(creatio de novo), 단 한 번 일어난 일로 간주한다. 여기에 질문이 당장 제기된다. 그러면 창조 이후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현대 과학 이론이 파고들 공간이 없다. 한편 창조 세계를 ‘점진적 창조’(creatio continua)로 보는 견해가 있다. ‘창조론’이 아니라 ‘창조’에 관한 신학적 이해를 추구한다. 과학과 이성을 수용하는 태도다. 최근 한국교회의 급격한 위축과 감소에 대한 우려와 분석이 오르내린다. 여러 요인 중 성서 문자주의와 근본주의 신앙이 앞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중세 유럽 교회의 갈릴레오 재판 이후 과학은 성서 이해에 도전과 함께 새로운 제안을 던져주었다. 교회가 과학과 이성을 하느님이 주신 능력으로 받아들인다면 창조 및 성서 이해에 훨씬 다양한 해석과 풍성한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세상의 출현 과정이 어떠했는지 엿새 동안의 창조 과정을 마치 동영상처럼 묘사한다. 우주의 최초 현상에 대하여 창세기가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창세기가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창세기의 진실이 현대 독자의 해석과 다를 수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누구랑 삽니까?’라는 질문에 ‘여우 하나와 토끼 둘이요’라고 대답한다고 치자. 한국 사람이라면 ‘아하 부인과 두 따님이군요’라고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관용적 용법을 모른다면 ‘여우와 토끼’ 비유는 자칫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이성적으로 받아들여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창세기 1장의 기록도 비슷한 맥락이다. 창세기는 지구과학 이론으로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믿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가장 친숙하고도 설득력 있는 형식의 제의(liturgy)로서 예배에서 사제가 선포한 것이다. 창세기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과 사회문화적 배경을 압축한 ‘삶의 자리’를 무시하면 성서를 엉뚱한 방향으로 읽게 된다.
창세기 1-2장에 묘사된 엿새 동안의 창조 서사에는 치밀한 듯 허술하고, 논리적인 듯 모순적인 측면이 드러난다. 그런데도 성서에 부여된 종교적 권위로 인해 본래 ‘삶의 자리’보다 교회가 원하는 의도와 해석에 맞춰왔다. 창조 기사에서 창조와 관련된 어휘를 살펴보자. 첫 번째 창조 동사는 ‘바라'(בָּרׇא)다. 전통적으로 이 동사가 창조에 차지하는 위상은 높고 크다(창세기 1:1,21,26×2,27), 아무런 물질이 없는 절대적인 ‘무’(nothingness)의 상태에서 창조가 일어났다고 믿는 근거가 된다. 소위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 이론이다. 대개 ‘창조하다’로 번역하지만, 주어를 일반명사로 바꾸면 ‘바라’의 의미가 다양해진다. 예컨대 재단사는 ‘자르다,’ 조각가는 ‘깎다,’ 그리고 정원사는 ‘다듬다’ 등으로 활용된다. 사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정원사, 조각가, 재단사처럼 세상을 다듬고, 깎고, 자르는 과정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바라’의 영어 번역 create에서 창조의 의미를 유추하는 것은 흥미롭다. 곧 계속적이며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형국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창조의 진행 및 확장성이 반영된 번역이다.
두 번째 동사는 ‘바달’(בׇּרַל)이다. 창조와 관련되어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보통 ‘나누다, 분리하다, 명료하게 하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엄밀하게 창조의 이차적인 과정이다. 이를테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물과 물로 나뉘라,’ ‘낮과 밤을 나뉘게’ 등등에 반복적으로 나온다(창세기 1:4,6,7,14,16). 창조의 선언과 함께 보이지 않던 실체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다시 분할되는 모습이 이어진다. 이미 창조된 빛과 궁창이 다시 빛과 어둠으로(4절),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7절) 나뉜다. 이와 같은 분화는 맨 먼저 빛이 낮과 밤으로 나뉘는 상태로 진행된다.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창조 이전의 상태에서 빛과 어둠의 분화는 낮과 밤의 창조라기보다는 시간의 창조를 의미한다. 이것은 성서에서 공간의 창조보다 시간 창조가 우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바달 동사로 묘사된 빛과 어둠의 분화는 시간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놀라운 선언이다. 그러니 ‘나누다’ 또한 ‘창조하다’의 후속 과정으로 창조의 연속성, 또는 점진적 과정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고 창조가 반드시 행위를 수반하는 동사로만 진행되거나 드러나지 않는다.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물과 육지와 하늘에 사는 각종 어류와 짐승, 식물과 조류 등에 관한 창조 어휘는 뜻밖에도 명사 ‘종류대로’(לְמִין)가 쓰인다.
전치사가 덧붙어 형식은 부사어지만 내용은 명사 ‘종류’(מִיוּן)다. 식물과 동물의 창조에서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 땅에 자라는 각종 식물을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로(11-12절), ‘큰 바다 짐승’과 ‘작은 생물들’과 ‘각종 새’로, 땅에 ‘기는 짐승’과 ‘가축’ 등으로 분류가 그것이다. 창세기가 각 종류의 구체적인 목록까지 제시하지 않은 이유는 백과사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 기사에서 ‘종류대로’ 곧 분류의 목적은 동사의 창조 선언 못지않게 중요하다. 창세기 1장에 ‘하느님이 말씀하셨다’(ןַיּ֗אמֶר)는 선언이 10차례 언급되고(3,6,9,11,14,20,24,26,28,29), 또한 ‘종류대로’(לְמִיבָחּ)가 마찬가지로 10차례 나온다(11,12×2,21×2,24×2,25×3). 단순히 우연의 일치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하느님의 창조 선언이나 종류별 배열 역시 창조의 핵심적 가치로 여길 수 있는 대목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처럼 적절한 분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창조의 질서와 조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시간 |
대상 |
분류 |
1일 |
빛 |
낮과 밤 |
2일 |
하늘 |
궁창 위 궁창 아래 |
3일 |
물 |
뭍과 물 |
식물 |
채소, 과일 |
|
4일 |
광명체 |
낮과 밤, 계절, 날, 해 |
5일 |
생물 |
바다짐승, 날 짐승 |
6일 |
생물 |
땅의 짐승, 가축 |
사람 |
사람 (수컷 암컷) |
|
7일 |
휴식 |
안식일 |
수학에서 분류(taxonomy)는 일반적으로 주목의 대상이 아니다. 보통 수학을 4 연산(演算) 범위에 두기 때문이다. 뚜렷한 공통점이나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일정한 법칙 또는 일관된 흐름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은 수학의 분류와 관련된다. 예컨대 χ2+7χ+12의 방정식은 (χ+3)(χ+4)로 분해할 수 있다. 전항에는 일정한 논리가 없이 무질서해 보인다. 하지만 후항에서 보듯 공통 인수를 찾아 분류하면 (χ+3)과 (χ+4)처럼 질서정연한 수식이 드러난다. 따라서 공통점이나 동류항을 찾아 배열하는 분류는 수학의 핵심 중 하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창세기의 창조는 앞선 방정식처럼 다수의 항이 무작위로 열거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7일 구조(septadic)’ 창조 과정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한 번 읽으면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소개한 점은 수학의 분류와 배열에 속한다. 이렇듯 ‘종류’ 또는 배열이 인류사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한다. 창조의 순간 수만 갈래로 분화되는 각종 식물, 물속의 생물들, 땅의 짐승이나 새들의 분류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창세기의 종류에 따른 분류가 실상 최초의 창조 사건처럼 소개된 까닭이다. 거의 동시적인, 혹은 일련의 동작처럼 보이나 점진적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확인한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기사가 무려 10번이나 반복되지 않았는가!
창조의 결과는 질서와 조화다.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טוֹב)’는 표현이 일곱 차례 반복된 이유다. 흔히 창조의 신학적 의미를 논할 때 ‘무에서 유의 출현’(creatio ex nihilo), 또는 ‘혼돈에서 질서의 세계’(cosmos out of chaos)로 변화를 주장한다. 실제 창세기는 창조 이전의 상황을 ‘혼돈과 공허’(חֹהוּ וׇבֹהוּ)로 표현한다. 질서와 조화를 즉각적인 창조의 완결된 상태에 초점을 맞추기 쉽다. 곧 창조 과정에 필연적인 ‘나뉘고 분류되는’ 창조의 계속적 진행을 놓치거나 건너뛴 셈이다. 종류대로 ‘분류’되지 않으면 창조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일순간 혼란(disorder)에 빠질 수 있다. 이 점에서 창조는 지속적인 창조이며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래 그림은 창조의 진행이 날짜별로 배열된 모습이다. 시간별로 질서 있게 완성되고 종류별로 조화롭게 창조되는 7일 동안의 진행 과정, 계속적 창조가 화가의 통찰로 아름답게 배열된 모습이다.
이른바 신인 협력(synergy)이다. 그리스어 ‘함께 일하다’(συνεργόν)에서 비롯되어 둘 이상의 협력과 상호작용의 예상된 합보다 큰 경우를 가리킨다. 신학적으로는 하느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가 협력하여 구원이 완성된다는 이론이다. 창조에서 시너지란 ‘신과 모든 피조물의 협력’으로 계속되는 진행형이다. 그것은 물리적 협력이나 총합이 아니라 비선형적 영적 상승 작용이다. 하느님은 태초의 창조 세계를 잘 보존하고 운영하라며 사람을 지으셨다. ‘아담’은 피조물 중의 일부인 ‘땅의 먼지’로 창조되어 자연과 세상과 우주를 함께 보살피는 창조 과정의 협력 대상이다. 우리는 모두 점진적인 창조에 초대받은 하느님의 협력자다.
글·김창주
한신대 신학부 교수.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으로 푸는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