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우익, 극우담론 확산의 징후인가?

2012-12-11     김민하

'넷 우익'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진중권이라는 시대의 논객과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 추천된 네티즌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공개적인 토론을 벌이게 된 사건 이후로 이러한 주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벌어지게 됐다. 논란이 된 커뮤니티를 자주 이용하는 이용자들로서는 조금 난감한 상황이기도 할 것 같다.

'넷 우익'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주목받는 이 현상은 새로운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과거에 겪었던 어떤 경험의 또 다른 단면인가? 이것은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분명 인터넷이란 것에 대하여 진보적 대중이 다수인 가상공간이며 이들의 이러한 성향이 마음껏 드러날 수 있는 어떤 조건을 갖춘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대표되는 인터넷의 위력을 확인한 불과 얼마 전의 몇몇 선거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순식간에 우리는- 어떤 편협한 표현대로라면- 인터넷의 구석 공간에 서식하는 '괴물'과 마주하게 됐다. 도대체 그 몇 개월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꿈틀대기 시작한 '괴물'

우선 이 현상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에서 일어난 특징적 현상들을 짚어나가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게 된 '넷 우익'들의 정체를 알 수 있는 통찰을 얻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인터넷을 통한 어떤 '정치적 현상'으로 평가받을 만한 최초의 기록으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 주저 없이 <딴지일보>를 이야기하고 싶다. 김대중 정권의 출범과 함께 세간의 관심사가 된 <딴지일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합성 그래픽물을 활용한 정치인 풍자와 '씨바'로 대표되는 적나라한 욕설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풍자적 표현들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평가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해방감'이라는 단어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군부독재의 종식은 그간의 권위적인 중압감에 눌려 있었던 국민이 각기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줬다. 김영삼 정권 시기 'YS는 못 말려'라는 게임이 등장하고 대통령을 소재로 한 우스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딴지일보> 역시 김대중 정권의 탄생과 함께 표현된 또 다른 '해방감'의 모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군부독재 정권과 보수 정치의 주요 인사들을 통쾌하게 비꼬고 놀리는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이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2002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면서 조금 양상을 달리하게 된다. 이때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된 것은 이른바 '아햏햏' 현상인데, 이것은 이제 와 떠올려보자면 슈티르너류의 해체주의적 냉소였던 셈이다. '디시인사이드'라는 디지털카메라 커뮤니티에서 대유행한 이 현상은 주로 난감한 상황이나 뭐라 표현할 말이 없는 상황에서 '아햏햏'이라는 의미 없는 문자를 내뱉는 행위가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잡은 케이스다. '아햏햏'이라는 게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무엇을 어쩌자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해석할 수 없는 네티즌 특유의 어떤 특징'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이러한 표현도 결국 어떤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일례로 '병욱대첩'이라는 사건을 보자. 이것은 서울대 학생 커뮤니티에 병욱이라는 학생이 과외비를 담합하자는 취지의 글을 올린 것이 발단이 돼 디시인사이드를 비롯한 인터넷 이용자들이 일제히 분노해 봉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서울대 학생 커뮤니티는 과도한 트래픽을 견디지 못해 접속이 제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아햏햏'이라며 세상과는 담을 쌓은 듯한 도인의 풍모를 흉내 내던 네티즌들이 세속적 정의감으로 뭉쳐 큰일을 내고야 만 것이다. 물론 그 큰일의 실제라는 것은 과외비를 담합하자는 글에 '아햏햏하다'는 둥 '고구마 장사 하게 십원만 달라'는 둥 맥락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글을 계속해서 써대는 것에 불과했으나 어쨌든 그 결과는 불의를 응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 디시인사이드의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불의를 향한 일종의 자력구제를 놀이의 형식으로 공유하는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네티즌 수사대가 신상을 턴다'와 같은 표현이 전형적이다. 이런 일들을 하게끔 만드는 사건을 부르는 말로 '막장'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다. 디시인사이드의 수많은 갤러리에 막장 갤러리가 추가됐고 이곳 이용자들의 엽기적 행태는 코미디 갤러리에 전파됐다.

이러한 현상을 어떤 일관된 틀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 '사이버 민중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정치적 상황에서 민중주의(보다 일반적인 용례로 '인민주의'라는 표현이 있을 것이다)는 체제의 부조리로 인한 대중의 분노와 이로 인한 직접적인 어떤 행동들로 표현된다.

인터넷에서 일어난 사건·사고들은 대개 시대의 부조리를 담고 있다. 대중은 군부독재 정권을 겪으면서도 국가의 권위를 신뢰했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이러한 신뢰를 송두리째 뒤엎었다. 이때부터 국가와 기득권의 권위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됐고,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시장에 위임하는 동안 방치된 민중은 스스로의 정의를 직접 구현할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 내몰리게 됐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 앞서 서술한 인터넷상의 사건들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맥락 때문에 이런 사건들은 필연적으로 막연한 진보적 가치와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디시인사이드의 정치·사회 갤러리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애당초 인터넷에 가장 강력한 우군을 보유했던 정치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디시인사이드 정치·사회 갤러리의 이용자들 역시 대부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였다. 노무현 정권의 어느 날, 이들은 한나라당 대변인을 지냈던 전여옥 당시 의원을 불러 오프라인 모임을 추진해 혼을 내주기로 했는데, 혼을 내주기는커녕 전아무개의 입담을 이기지 못하고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한 것에 그치게 된 사건이 일어나자 이용자들의 성향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정치·사회 갤러리의 다수 이용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집단에서 극우·보수적 언사를 여과 없이 늘어놓는 반동적 인자들로 인적 구성이 변화하게 된 것이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국내 인터넷 공간에 의미를 가지는 '넷 우익'이 처음 등장한 사건이라고 평할 수 있다. 이들은 2008년 촛불 정국 때 진보신당 측의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던 진중권과 전화를 이용한 공개적인 토론을 벌이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최근 진중권을 중심으로 한 공개 토론의 축소판이 이미 벌어졌던 셈이다. 이런 흐름들이 디시인사이드 등의 재미있는(?) 게시물을 선별하여 게시하는 '일간베스트저장소'에 모이게 되어 오늘날의 구도가 생겨난 셈이다.

시대적 부조리에 대한 또 다른 불만 양식

이들의 특징은 민주정부 10년간 성취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고 저항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들이 생각하는 부정적인 여성상에 대한 극렬한 적개심을 갖고 있으며 한동안 죄악시됐던 특정 지역에 대한 지역주의적 비하를 다양한 방식을 통해 공개적으로 표명한다. 또한 진보적 가치를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감성팔이'라고 부르며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들이 보이는 이러한 특징 역시 앞서 이야기한 사례들처럼 어떤 시대적 부조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민주정부 10년간 서민들의 삶이 개선되지 못했다는 것이 이들의 행동 방식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이다. 과거의 인터넷 현상들이 국가와 기득권의 권위가 해결하지 못한 어떤 상황들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현상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진보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서사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본인들이 속고 있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상당수의 여성이 남성을 속여서 얼마 남지도 않은 남성들의 금전을 갈취하려는 부도덕한 존재고, 촛불시위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칭 진보의 선동에 속아 나라를 망칠 일을 저지른 경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부조리를 통해 이득을 보는 자들은 우리가 이제는 진보라고 부르는, 전통적으로는 민주·평화·개혁 세력이라 불렸던 자들이고 이들의 정치적 기반이 바로 특정 지역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을 응징해야 한다!

만일 민주정부 10년 동안 국민 대다수가 만족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었더라면 이들의 이러한 생각은 별 의미 없는 외침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상황은 그렇게 되지 않았고 결국 우리가 이들의 존재를 나름 심각한 사회적 현상으로 지금 다루고 있다. 바로 이 상황 자체가 이들의 존재를 이해하는 두 번째 열쇠이다.

"사민주의의 위기가 유럽 극우 발흥의 모태"

이쯤에서 최근 유럽의 상황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겠다. 유럽은 나날이 고조되는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와 이에 기초한 극우 세력의 성장 덕에 사회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다. 대다수 국민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줄만 알았던 노르웨이에서는 이민자들을 적대하는 한 청년이 집권 노동당 학생 캠프에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민혁명의 종주국으로서 전세계 좌파의 경외를 받고 있던 프랑스는 2005년 방리유 사태를 시작으로 전면에 드러난 이민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머리를 싸매고 있고,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에 시달리는 국민이 오히려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에 표를 던져 극우 정치세력의 유례없는 성장을 방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이 겪고 있는 곤혹스러움의 공통점은,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우던 국가들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국가와 지배층이 이것을 현명한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민중에게 고통을 전가한 것으로부터 이 모든 사태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유럽의 민중은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틀에 따라 해결책을 모색해왔지만 이것이 양극화 심화와 신자유주의 개혁 조치의 도입으로 귀결됐음을 알게 되자 더 이상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게 되었고, 이런 상황이 유럽 도처에서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중이 사회민주주의적 틀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남은 '민중주의적' 선택지는 극우 정치의 틀에 따라 문제의 해결법을 재구성해보는 것뿐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극우 정당의 자양분이 됐고 극우 정치 영향력의 신장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분석이다.

이러한 상황을 한국의 인터넷 세계에 대입해보면 우리가 지금 분석하고 있는 대상과 그 대상들이 하고 있는 행위 자체의 의미가 드러난다. '넷 우익'의 발아는 한국의 민중 또한 진보적 정치 세력에 냉소를 보내고 있으며 자신들을 둘러싼 고통의 의미를 극우 정치의 틀로 해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극우 정당과 극우 정치는 신당을 창당하는 것이든 기존 정치 세력에 기생하는 것이든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든 늘 그 존재를 드러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들에게 '넷 우익'의 존재는 훌륭한 아군이 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조만간 한국에서 국민전선의 탄생을 목도하게 될지 모른다.

 

/ 김민하 정치평론가. 저서로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공저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 해제> <우파의 불만> <당신들의 대통령>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