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중심주의, 비인간적 폭력의 그늘(1)

2천 년의 역사,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

2025-04-17     크리스티앙 드 브리 | 언론인

20년 이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던 크리스티앙 드 브리는 2023년 2월 4일 세상을 떠 났다. 그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역사를 만들었으나 역사 속에서 잊힌 이들’이라는 관점에서 2천 년의 역사를 조망하 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저서의 서문을 이곳에 게재한다.

 

세바스치앙

천 년의 역사를 전 지구적 시각에서 조망하려는 시도는 수많은 통념을 뒤흔들 위험이 있다.
18세기까지 세계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였다. 중국, 인도, 근동(중동) 지역이야말로 지리적 위치, 면적, 인구, 정치·경제·사회·문화 구조,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고려할 때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오히려 유럽이 중심이었다는 착각을 계속 심어주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주장에서도 드러났다.(1)

 

2천 년의 역사,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은 이미 3만 년 전, 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정착하여 사회와 문명을 발전시킨 땅이었다. 같은 논리라면, 유럽은 서기 710년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들이 지브롤터(Gibraltar. 이베리아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영국의 해외 영토.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제하는,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역주)로 상륙했을 때 발견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구의 역사 서술에서 지난 2천 년의 역사는 서구 중심의 이야기로 채워져 왔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은 오직 서구와 접촉하는 순간에만 역사적으로 의미를 부여받았으며, 그 접촉은 대부분 정복과 폭력적 지배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서구 사회가 역사를 상대적으로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향은, 특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두드러지며, 결국 그 경향은 20세기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전면전, 대량 학살, 학대, 민간인 강제 추방은 결코 현대의 산물이 아니다. 이러한 폭력은 이미 과거에도, 다른 지역에서도 존재했으며, 그 규모 또한 절대 작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에 대한 파괴와 학살이다. 물론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는 세계 인구가 15억 명에서 60억 명으로 급증했고, 기술과 생산력, 통신, 파괴 수단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전례 없는 변화를 경험했다. 

그러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2)이 말한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 1994년에 출간한 저서로 1914년부터 1991년까지의 역사를 다룸—역주)가 20세기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오히려 진정한 극단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는 권력을 위한 이야기다

역사는 권력자들의 기억을 영원히 보존하는 이야기일 뿐이며, 그 과정에서 대다수의 인간은 철저히 외면당한다. 그들은 역사를 만들어왔지만, 역사는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노동 덕분이었다. 수많은 세대에 걸쳐 그들은 땅을 개척하고, 고르고, 건조하며, 물을 대고, 경작하고,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었다. 또한, 각종 곡물과 콩류, 과수, 섬유 작물을 재배하며 문명을 일구었다.

이 모든 것은 토양과 기후에 맞춰 끊임없이 실험하고 개량한 끝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리고 가축을 길러 우유, 고기, 가죽을 생산하고, 노동력을 제공할 동물을 길렀으며, 어업을 통해 자연이 주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들이 자기 노동의 결실을 제대로 누릴 권리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생산한 가장 좋은 농산물과 생산물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들, 즉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은 권력자들에게 돌아갔다.

더 나아가, 그들은 석재와 대리석을 채굴하고, 금, 은, 철, 석탄, 납, 구리를 캐내며, 수많은 도구와 물건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물건들조차 대부분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특히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공예품들은 오직 부유한 지배층만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들이 세웠으나,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성을 쌓고, 요새를 세우고, 사원과 영묘, 대성당과 바실리카, 모스크와 파고다를 지은 이들은 그것을 차지한 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일한 사람들이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를 직접 지은 것이 아니며, 표트르 대제 자신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세운 것도 아니다. 그들 중 누구도 단 한 장의 돌담조차 무너지지 않게 쌓을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0세기까지, 인류의 90% 이상은 대지에 묶여 살아가는 농민과 시골 장인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기술 발전이 진행되면서 세대가 거듭될수록 인류의 절반 가까이가 거대한 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거의 모든 곳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존재로 남아 있다. 소수의 권력자는 대중을 가차 없이 수탈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그들의 노동 위에서 번영을 누려왔다.

 

권력과 피지배자의 역사, 약탈과 불평등의 연속

대다수의 삶은 비참하고 짧았으며 불안정했다. 그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었고, 무지와 두려움, 미신 속에서 살아갔다. 권력자들의 횡포와 자의적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으며, 끊임없는 전쟁과 전염병, 주기적으로 닥치는 재난 속에서 삶이 피폐해졌다. 

반면, 극소수의 사람들—황제와 왕, 군주와 제후, 술탄과 칸, 고위 성직자와 칼리프, 국가 원수와 독재자, ‘민족의 아버지’와 ‘위대한 조타수’—그리고 그들의 친족과 부하, 전쟁광과 용병, 투기꾼과 금융업자들은 그들을 섬기며 동시에 자신의 몫을 챙겼다. 그들의 끝없는 권력 욕망과 탐욕은 끊임없이 서로를 대립하게 했으며, 모든 것은 부의 약탈과 공동 자원의 독점을 위한 것이었다.

폭력과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통해 민중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극소수 엘리트 계층의 위계적 구조는 세기를 거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권력 구조의 정점에는 세계를 나누어 통치하는 소수의 폭군(수천 명 정도)이 서로 교대하며 존재해 왔다. 세습 군주제는 천 년 동안 지배적인 통치 형태였으며, 일부 예외(폴란드나 신성 로마 제국의 선출 군주제, 베네치아 공화국 등)가 있었다.

이러한 통치 형태는 20세기 말에도 중동과 아시아에서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일부 유럽연합 회원국에서도 민주적 형태로 남아 있다. 이들 폭군은 황제, 왕, 술탄, 차르, 에미르, 바실레우스, 칸, 샤, 쇼군, 대통령, 카우디요 등 다양한 직함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여겨졌으며(때로는 자신들이 신격화되기도 함), 다양한 절차에 따라 세습되었다. 

20세기부터는 원칙적으로 제한된 기간 동안 다소 조작된 보통선거로부터 권력을 얻게 되었다. 권력의 영속성은 보장되지 않았으며, 최고 권위는 종종 무력, 살인, 배신을 통해 찬탈되거나 정복되었다. 3세기 이상 지속된 왕조는 드물었는데, 유럽의 카페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스튜어트 왕조, 로마노프 왕조, 아바스 칼리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일본의 천황,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조 등이 그 예이다.


 

글·크리스티앙 드 브리  Christian de Brie
언론인


(1) 피에르 미켈, 『역사의 거짓말』, 페랭, 2008.
(2)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콩플렉스-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파리, 1999; 『극단의 시대: 짧은 20세기의 역사(1914-1991)』라는 제목으로 재출간, 아곤, 마르세유,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