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반복의 한 자락, 모험없는 노화의 흔적들 – 한국영화가 자초한 현재의 무력감
가끔 궁금해졌다. 이렇게나 신선하고 저렇게나 짜릿한 화두를 던졌던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10년 중후반 많은 젊은 감독들이 등장하며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고 그때의 문제의식은 지금까지도 곱씹을만 한 것이었지만 그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들 대부분의 차기작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안다는 것 역시 쉽지는 않지만, 종종 전혀 그의 스타일이 아닌 차기작으로 잠시 얼굴을 비췄다 사라진 이들을 생각했을 때 짐작을 할 수 있는 것들은 있었다. 신인 감독들에게 자신의 장점이나 연출관을 유지할 수 있는 만큼의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매우 익숙해 보이는 대본들이 그들에게 도착할 확률이 높다는 것. 결국 이는 모험을 해볼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없다는 쪽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관심이 멀어진 것이 최근의 일은 아니지만 점점 더 그 거리는 좁힐 수 없을만큼 멀어져 간다. 누군가는 COVID-19를 결정적인 계기로 삼을 수도, 또 누군가는 OTT의 점령을 시발점에 놓을 수도 있겠지만 COVID-19이든 OTT이든 이 사이를 상당한 콘텐츠가 채우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늘 재미있는 것들을 원하고 있고 그것을 만족시키는 쪽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명확한 일이다. 물론 여기에 영화는 한 가지 허들을 가지고 있다. 긴 시간을 견디고 극장으로 나갈 수 있는 동력까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만큼 강력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해결책으로 한국영화는 대형 스펙터클을 앞세운 영화들을 내놓았고, 어느 정도 관객을 확보해 둔 소스를 확보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결과 영화를 검색할 때 제작비의 규모와 ‘원작’이 함께 연관 검색어로 함께 뜨는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 되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영화는 이미 오래전 이 상황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OTT 자리에 (컬러) 텔리비전 혹은 비디오로 대체하고, 각종 원작의 소스들 그러니까 웹툰이나 웹소설 등을 소설로 바꾸면 1970-80년대 지겹게 이야기해왔던 한국영화의 위기라는 말과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매체로 옮겨갔을 때 영화는 그들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으로 가장 가시적으로 포착되는 것들, 그러니까 다른 매체에서는 보기 힘든 자극적이면서도 상당한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는 대작들로 그 자리를 채워보려 했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방법이라기보단 당장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된 이 시도들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를 따르고 있는 현재의 상황 역시 처참할 것이라는 결과를 그리 어렵지 않게 예측해볼 수 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영화가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앞서 과연 이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들은 어디에서 무슨 영화를 만들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면 이를 전혀 답해주지 않는 한국영화가 궁금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1990년대 중후반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많은 감독과 배우들에게 기대고 있는 현 상황은 그들의 이후 담론을 만들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렀다. 불황에 접어들면서 이들의 이름이 더욱 필요해지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안정감, 즉 작품성이든 대중성이든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가 이미 ‘확보’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그들에 대한 기대는 더욱 무거워지고 있다. 누군가는 진입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부담에 허덕이는 불균형은 결국 새로운 세대를 보여줄 수 있는 어떠한 시도도 해보지 못한 채 지금에 닿았다.
안정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반복된다는 것이다. 두 글자의 사극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거나 중년의 아저씨들이 다투는 권력 싸움을 언제까지 보아야 하냐는 푸념은 결국 안정성의 부작용을 가리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역사이든 권력이든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세대의 시각은 더 이상 한국영화에 자리할 수 없고 어떠한 화두도 던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새로운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이도, 그것이 만들어낼 이야기도 어찌보면 모험이라는 불안정성에 기반하기에 여기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탓이다. 그때의 영광을 현재에도 그리려 하고, 그때의 아픔을 당사자로서 설득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은 이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막은 채 고여 맴돌고 있을 뿐이다. 이것마저 걷어낸다면 도대체 지금 이 작품이 왜, 어떤 이야기를 하기 위해 관객 앞에 서려는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작품들이 넘쳐난다. 이 사이 ‘K-영화’라는 기호가 벌써 식상해진 것처럼 한국영화는 늙고 낡고 닳아지며 관심에서 밀려났다.
한국영화가 가장 빛났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지금의 중견에 자리한 많은 감독들이 그리고 배우가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보여줄 수 있는 스타일이, 그리고 등장 자체로의 신선함이 전 시대와 현 시대를 갈랐고 그렇게 문화적 담론이 새로 쓰이고 있었다. 이제는 이 새로움이 다시 기회를 찾아야 하건만 지금까지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요원해 보인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영화의 흥행 앞에 과거의 흥행이 어떻게 미래의 안정성을 확보한다고 믿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무논리 속에 영화에 대한 기대는 점점 사라져 간다. 이 사이 많은 것들이 개입하고 있을 것이며 가장 크게는 영화의 ‘산업적’ 측면이라는 것이 힘을 발휘하고 있겠지만 그 결과가 이미 보이는 것이라면 적어도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화를 궁금하게 만드는 것은 극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존재 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