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악대의 변화, 저항의 울림
시대를 초월한 관악 앙상블의 부활
“너, 시립 관악단을 꿈꾸었지 / 장군의 복장을 입고 싶었지 / 떠나라 / 군악대에 합류해 / 그리고 군가를 연주해.”
1990년대 말, 레 지노상 그룹은 이러한 가사를 통해 군악대를 다소 경멸적인 시선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오늘날, 군악대의 이러한 앙상블은 대중에게 인기를 얻고 있으며, 특히 지역 당국의 지원 덕분에 활성화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저항의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때 구식, 전통적,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군악대(fanfare)는 최근까지도 유행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제 어디에서나 군악대를 볼 수 있으며, 대중으로부터 많은 호감을 사고 있다.
2024년 7월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가장 주목받은 공연 중 하나는 가수 아야 나카무라가 프랑스 공화국 근위대 음악대와 함께 한 무대였다. 공화국 근위대는 군악대의 전통을 이어가는 대표적인 군 음악 앙상블이다. 몇 달 뒤, 에마뉘엘 쿠르콜 감독의 영화 <군악대에서(En Fanfare)>가 개봉했고, 영화는 명망 높은 지휘자와 북프랑스의 한 관악단에서 활동하는 트롬본 연주자인 두 형제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영화는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시대를 초월한 관악 앙상블의 부활
2025년 3월 독일 출신 테크노 군악대 메우테가 프랑스의 주요 공연장 제니트에서 연주했다. 이들은 대형 페스티벌에서 자주 초청받는 인기 있는 군악대이며,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를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 관악 앙상블 발전 협회(Afeev) 회장인 작곡가 올리비에 칼멜은 “새로운 역동성이 형성되고 있으며, 드디어 이러한 앙상블이 인정받고 있다”며 반가움을 표했다. 음악학자 파트리크 페로네는 영화 <군악대에서>에 등장하는 앙상블을 설명하며, “실제로는 군악대가 아니라 ‘하모니’에 가깝다”라고 평했다.
군악대는 금관악기 위주로 구성된 앙상블이다. 하모니는 여기에 목관악기까지 포함된다. 브라스 밴드는 이와 또 다른 형태로, 타악기가 포함된 독자적인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다. 이 모든 유형을 통틀어 ‘관악 앙상블’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로 부를 수 있다.
관악 앙상블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바로크 시대부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과 앙드레 다니캉 필리도르(1726~1795) 같은 작곡가들이 축제나 의식에서 연주될 목적으로 관악 합주곡을 작곡했다. 당시의 군악대는 귀족 사회에서 활용되는 ‘사교적 앙상블’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관악 합주는 유럽 전역에서 문화 민주화의 도구로 발전했다. 오페라 극장은 상류층을 위한 공간으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작은 관악 앙상블(주로 8인조 관악단)은 오페라 음악을 편곡하여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야외 공연장에서 연주했다. 이처럼 군악대와 관악 앙상블은 시대와 계층을 초월하여 대중과 소통하는 음악적 역할을 해왔다.
산업혁명과 함께 찾아온 군악대의 황금기
군악대의 황금기는 산업혁명과 함께 도래했다. 아돌프 삭스(1814~1894)의 영향 아래 새로운 악기들이 등장하면서 관악기 제작이 획기적으로 발전했고, 정치적 상황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군악대 및 군악 앙상블이 급격히 성장했으며, 많은 기업도 자체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창설했다.
이러한 흐름은 프랑스 혁명 시기에 탄생한 ‘오르페온 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오르페온 운동은 합창단을 중심으로 한 음악 교육 활동에서 출발했으며, 이후 군악대와 유사한 형태로 발전했다. 오늘날 ‘오르페온(orphéon)’이라는 단어는 군악대(fanfare)의 동의어로도 사용된다.
이러한 음악 활동은 단순한 여가 활동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 교육적 기능을 수행했다. 프랑슈콩테 음악 연맹의 자비에 셰이드 회장은 “벨포르에서 알스톰은 직원들에게 매일 두 시간씩 할애하여 관악 합주 연습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음악사학자 필리프 굼플로비츠는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기업의 후원으로만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런 정책은 기업주들의 온정주의적 태도로 볼 수도 있지만, 노동자들 또한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살아 있는 문화로 만들었다”라고 지적했다. 노동자들은 관악합주단을 통해 연주 여행을 떠나고, 각종 음악 경연대회에 참가하며 활동의 폭을 넓혔다.
특히 철도의 등장은 이들의 이동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어, 음악을 통한 사회적 연결과 문화적 경험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노동자들에게 음악은 단순한 여가를 넘어 자유와 해방의 수단이 되었다.(1)
그러나 점차 쇠퇴가 찾아왔다. 음악학자 파트리크 페로네는 “1968년 이후 관악 앙상블은 매우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반군사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제복을 입고 행진하며 연주하는 이러한 오케스트라(노동자 군악대 포함)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라고 설명했다.
탈산업화 역시 큰 타격을 입혔다. 광산과 기업이 운영하던 관악합주단은 점차 사라졌고, 많은 단체가 해체되었다. 일부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제는 기업이 아닌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 협회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단체는 여전히 역사적인 명칭을 유지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군악대에서>에 등장하는 라랭 광산 노동자 관악합주단이 그중 하나로, 기존의 전통을 간직한 채 변화된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새로운 군악대의 등장, 부활하는 전통
이와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군악대들이 등장했다. 먼저 학생 군악대가 그 흐름을 이끌었다. 1948년 파리 보자르에서 시작된 전통을 이어받아, 많은 그랑제콜이 자체적으로 군악대를 창설했다. 학교 측에서는 트럼펫, 트롬본, 타악기 등 다양한 악기를 학생들에게 제공했고, 학생들이 직접 군악대를 조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늘날 이를 하나의 유행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20년 전만 해도 낭트에는 군악대가 두 개뿐이었지만, 이제는 20개가 넘는다”고 낭트 지역 군악대 ‘파이어 립스’와 ‘판타르시’의 단원 오렐 살몽은 말했다.
일부 지방정부는 이러한 군악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프랑스 관악 앙상블 발전 협회가 2023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음악원과 관악합주단 간의 협력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관악합주단 활동을 정식 음악 교육 과정의 일부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공식적인 음악 교육기관과 군악대 사이의 연결고리는 드물며, 현재 활동하는 군악대 연주자의 대다수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이다.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프랑스 음악 연맹은 ‘음악 단체 지휘 자격’을 신설하여, 관악합주단과 군악대를 이끌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프랑슈콩테 음악 연맹의 자비에 셰이드 회장은 “이러한 앙상블을 발전시키고 더 매력적인 형태로 만들려면, 단순히 의욕적인 자원봉사자들만이 아니라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지휘자가 필요하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23년, 파리 필하모니는 역사상 최초로 ‘전국 관악합주단 경연대회’를 개최하여, 군악대와 관악 합주의 부활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무대를 마련했다.
군악대와 관악합주단의 또 다른 주요 변화는 레퍼토리의 확장이다. 오랫동안 이들은 주로 대규모 클래식 작품을 관악 편성으로 편곡한 곡들을 연주해 왔으며, 때때로 이러한 편곡은 원곡의 섬세함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작곡가 올리비에 칼멜은 “1990년대까지 국가 지원을 받아 작품을 작곡할 때, 관악합주단을 위한 곡을 쓰면 교향악단을 위한 곡을 작곡할 때보다 30% 적은 보수를 받았다”라고 회상했다. 이처럼 관악 앙상블에 대한 음악적 평가와 지원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작곡가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관악 앙상블을 위한 창작에 뛰어들고 있으며, 다양한 장르와 예술적 시도를 결합하고 있다. 오늘날 관악합주단과 군악대는 힙합 댄서, 펑크(funk), 메탈 음악가들과 협업하며 공연을 펼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2019년 창설된 벨포르 국제 콩쿠르는 관악합주단과 현대 음악을 위한 작품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시상하는 플랫폼이 되었다.
“군악대는 세대간의 교류를 가능하게 해”
2021년부터 ‘군악대 발전 계획’이 시행되었고, 2024년 예산은 170만 유로(약 25억 원)로 책정되었다. 또한 2024년 여름, 당시 문화부 장관 라시다 다티는 ‘문화와 농촌’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3년간 총 9,800만 유로(약 1,542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며, 이 중 ‘마을 축제(Villages en fête)’ 프로그램은 아마추어 군악대와 같은 지역 문화 활동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단순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전통적인 문화 보존이 아니라, 실제로 문화 접근성을 확대하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음악사학자 필리프 굼플로비츠는 “군악대는 세대 간의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 할아버지가 손녀와 같은 활동을 함께할 기회는 매우 드물지만, 군악대에서는 가능하다”라고 강조했다.
음악학자 파트리크 페로네도 군악대와 관악합주단이 갖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많은 지역에서, 군악대나 관악합주단이 유일한 문화 활동의 형태다.” 이는 군악대가 단순한 전통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 접근성이 부족한 지역에서 필수적인 예술 활동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트롬본 연주자이자 즉흥 연주자인 파브리스 샤를은 ‘라 투프 군악대’를 창설했다. 이곳에서는 “8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군악대를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를 소개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참가자들은 스스로 악기를 선택하고, 다 함께 두 시간 동안 연습을 합니다. 이후 도시나 마을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펼치죠. 거리를 울리는 것입니다!” 샤를은 연주의 흐름을 직접 조율하며 손짓을 통해 음량의 변화, 음의 길이를 지시하는 방식으로 그룹을 이끈다.
“군악대는 정치적으로 불편한 존재”
여전히 대부분의 군악대는 남성 중심적인 구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여성 전용 군악대가 창설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또한, 다양성을 반영하는 흐름 속에서 퀴어 군악대가 등장하고, 음악 페스티벌에서도 이들을 정식 프로그램에 포함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군악대가 단순한 전통적 음악 그룹을 넘어, 개방성과 포용성을 갖춘 창의적인 실험의 장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군악대가 언제나 사회적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1936년 6월 13일, 부롱뉴-비양쿠르의 르노 공장에서 총파업이 한창이던 시기, 한 군악대가 지역 의원들을 선두에 세운 채 행진을 벌였다. 군악대는 역사적으로 단순한 음악적 퍼포먼스를 넘어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는 존재였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흐름은 계속된다. 낭트의 ‘KGB(Kapital Gros Bruit)’는 스스로를 ‘투쟁의 군악대’라고 정의하며, 집회와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릴의 ‘트락토펠 군악대’는 최근 총선 기간 중 투표율 제고를 위한 음악 시위에 참여했다.
음악학자 파트리크 페로네는 “군악대는 정치적으로 불편한 존재다. 저항의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저항의 공간이 되는 군악대, 사회운동에 참여
가장 정치적 성향이 강한 군악대 중 하나는 ‘보이지 않는 군악대’다. 이들은 극우 반대 시위,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 공립학교 파업, 화석연료 반대 시민 불복종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에 참여한다.
그들의 선언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비폭력적 행동 전략을 추구하며, 음악적 게릴라전을 수행한다. 우리는 음표로 테러를 감행하고, 음향의 무질서를 통해 저항한다. 우리는 사회 운동과 투쟁하는 단체들을 위해 연주한다.”
이 군악대에는 지휘자가 없으며, 모든 단원이 평등한 위치에서 함께 연주하고, 매주 반복 연습을 통해 투쟁 음악 레퍼토리를 새로 합류한 이들에게 전수한다.
단원인 마르크는 “우리는 재정적으로 자립하며, 특정 정당에 소속되지 않는다”라면서, “2016년 프랑스 노동법 개정 반대 시위 이후 경찰의 탄압이 강해졌지만, 군악대의 존재가 시위대에게는 안전함을 주는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라고 자랑스러워했다.
“군악대는 축제성과 정치성을 결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위에 가벼운 분위기를 불어넣고자 합니다. 삶의 기쁨 자체가 정치적 투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군악대의 미래, 어떤 울림일까?
KGB 단원인 니콜라는 자신들이 참여한 행동이 실질적인 변화를 불러왔다고 평가한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한 투쟁이 성과를 냈습니다. 코르쿠에쉬르로그뉴에서는 바이오가스 플랜트 설치를 막았고, 몽베르에서는 아마존 물류센터 건립을 저지했습니다. 매번 우리는 큰 소리를 냈고, 그것이 승리에 기여하지 않았을까요?”
2025년 5월 1일부터 4일까지 파리에서 ‘유럽 투쟁 군악대 대회’가 열릴 예정이며, 수백 명의 음악가들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음악사학자 필리프 굼플로비츠는 군악대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군중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든다. 군악대가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소속감이 있다.”
그러나 그 소속감은 무엇을 향하는가? 군악대는 오랫동안 권력의 상징(군악대와 국가 행사 속 연주)이자, 동시에 저항의 상징(시위 속 행진 음악)이기도 했다. 과연 미래는 어떤 울림으로 기억될 것인가?
글·앙투안 페쾨르 Antoine Pecqueur
기자
(1) 필리프 굼플로비츠, 『오르페우스의 작업: 프랑스의 아마추어 음악 활동 200년 (1820~ 2000). 관악합주단, 합창단, 군악대』, 플라마리옹, 파리, 2001.